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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구제불능 종족 ‘야후’와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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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08-13 13:49 조회4,0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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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종족 ‘야후’와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장면 1

한 중년남성에게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온다. 그녀는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한다. 백화점·레스토랑·극장 등등.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그녀. 그는 그녀를 애타게 부른다. 그녀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으므로. 불면의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굿모닝~ 하고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성은 다시 황홀경에 빠진다. 이 여성은 다름 아닌 신용카드다.

#장면 2

갑자기 ‘데이트 폭력’이라는 낱말이 등장했다. 한번 터지자 봇물처럼 쏟아진다. 너도 나도 데이트 중에 폭력을 당했다는 것. 데이트는 낭만적 연애의 표상이고, 폭력은 조폭·범죄·감옥 등과 연루된 낱말 아닌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두 단어가 찰싹 붙어버렸다.

최근 내 시선을 붙든 두 개의 이슈다. 둘 다 아주 역설적이다. 전자는 중년남성의 지순한 로맨스 뮤비인 줄 알았더니, 그 대상이 카드라는 것이고, 후자는 사랑과 낭만의 표상 안에 폭력이 내재해 있었음을 환기해주는 사건이다. 화폐와 에로스, 에로스와 폭력.

교집합인 에로스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보면 ‘화폐와 에로스, 그리고 폭력’의 삼중주가 탄생한다. 화폐와 에로스는 현대인이 열망하는 가치다. 헌데, 그것이 폭력과 혼연일체라니.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흔히 등장하는 답이 있긴 하다. 삶이 팍팍해서, 한 마디로 돈이 ‘웬수’라는 것, 또 불우한 환경 탓에 폭력의 가해자가 되었다는, 한 마디로 유년기의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것. 아주 틀린 답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저 삼중주의 기저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그런 상투성과 감상성을 넘어 인간 본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사가 필요하다.

소유욕은 언제나 약탈 욕구 수반

­『걸리버 여행기』(박용수 옮김, 문예출판사)는 소인국, 거인국, 라퓨타 등 이상하고 괴상한 나라로의 여행기다. 가장 특이한 여행지가 마지막 4장에 나오는 ‘흐이늠의 나라’다. 이 나라의 통치자는 다름 아닌 말[馬]이다. 말은 고매한 덕성과 지혜의 소유자다. 이들이 다스리는 족속 가운데 야만적이고 비열하며 구제불능의 종족이 하나 나오는데, 그게 바로 야후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그 출처가 바로 여기다.

야후의 기이한 행동 가운데 하나가 어떤 돌에 미쳐 있는 증상이다. 야후는 이 돌을 깊숙이 묻어놓고 몰래 즐긴다. 흐이늠 하나가 실험 삼아 그 돌을 몰래 캐내 감췄다. 돌이 사라진 걸 알게 되자 야후는 온갖 소리를 질러대면서 난리를 부린다. 그 소리에 다른 야후들이 몰려들어 울부짖고 물어뜯고 할퀴고 하다가 나중에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일도 하지 않은 채 야위어 갔다.

흐이늠이 그 문제의 돌을 다시 도로 제자리에 묻어두자 야후는 돌이 다시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원기를 회복했다. 짐작하겠지만 이 돌이 곧 화폐다. ‘화폐본능’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대목이다. 대체 왜 이토록 돌을 열망하는가.

아무 이유가 없다. 그냥 좋다. 유용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기 때문에 유용해진 것. 그와 연관된 이상한 습속 하나. 야후들은 자기 집에서 제공해주는 좋은 음식은 놓아두고 남에게서 빼앗은 것이나 훔친 것을 더 탐닉한다. 그렇다. 소유욕에는 언제나 착취(혹은 약탈)에 대한 욕망이 수반된다.

즉, 얼마를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남보다 얼마나 많은가가 더 중요하다. 남과 비슷하게, 또 골고루 나눠 갖는다면 그건 영 재미없다. 이것이 ‘화폐본능’의 속성이다. 맹목적이면서 동시에 폭력적이다.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풍자의 달인이다. 어찌나 신랄한지 풍자라기보다 차라리 ‘똥침’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경이다. 과연 그의 진단은 적중했다. 자본주의의 맹아기인 대항해시대를 목격하면서 그는 인간본성이 어디로 향할지 정확히 예측한 셈이다.

특히 금융자본주의는 돈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시대다. 백수나 빈곤층이 돈을 원한다면 그건 자연스런 본성이다. 하지만 잘 나가는 정규직도, 중상류층도 다 돈을 원한다. 어디에 쓸지 그게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냥, 무조건 갖고 싶다. 그리고 반드시 남보다 많아야 한다.

성욕은 화폐적 욕망을 부추기는 원동력

이런 충동에 휩쓸리게 되면 당연히 성호르몬의 분비가 왕성해진다. 성욕이야말로 화폐적 욕망을 부추기는 원동력이므로.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돈이 우는” 따위의 신파는 이제 없다. 화폐와 에로스는 고스란히 포개진다. 사랑의 기쁨이나 화폐가 주는 열락이 같은 생리적 회로를 타게 된다.

다시 『걸리버 여행기』를 보자. 야후들은 당연히 성적 탐닉도 왕성하다. 한 명의 파트너로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암야후는 강둑이나 수풀 같은 데 숨어서 숫야후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는 슬쩍 나타났다가 또 숨고 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그때 어떤 수컷이 다가오면 자주 뒤돌아보면서 천천히 도망친다. 그러고는 그 수컷이 따라올 것이 뻔해 보이는 적당한 장소로 들어간다.’

이 대목에서 빵 터졌다. 연인을 유혹하는 방식은 예나 이제나 다르지 않아서다. 이 장면에서 흐이늠이 주목하는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밀당’이다.

이 기묘한 게임에선 더 많이 ‘원하는’ 자가 약자가 된다. 상대가 나를 더 ‘원하면’ 나는 그의 지배자가 된다. 해서 상대로 하여금 나를 더더욱 갈망하게 하기 위한 온갖 책략이 시도된다. 말하자면 데이트가 권력투쟁의 현장이 되는 것. 폭력을 야기할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에로스는 생의 충만한 에너지다. 그것은 생명을 낳고 또 기르는 힘의 원천이다. 거기에는 어떤 경계도 없다. 당연히 세상만사, 천지만물과 다 연결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이 화폐와 성욕이라는 회로에 갇히게 되면 창조와의 연결은 불가능하다. 내 것이 있어도 남의 것을 탐하고,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쟁투만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 현장에선 이념적 가치나 도덕적 원리 따위는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동시에 유년기의 불행이나 사회적 박탈감 등이 원인이라 할 수도 없다. 누구든, 언제든, 이 회로에 갇히는 순간 에로스는 소유로, 소유는 폭력으로 전이될 터이므로.

폭력은 소유를 증명할 최고의 방편

자, 그럼 단도직입으로 물어보자. 왜 사랑하는데 폭력을 행사하는가? 질투와 분노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공통의 전제가 하나 있다. 쾌감이다. 이 쾌감이 없다면 폭력은 일상화되지 않는다. 부부간의 폭력도, 자식에 대한 폭력도 다 마찬가지다. 약자를 제어할 때의 짜릿함, 손끝에 닿는 맛, 이런 것들로 인해 폭력적 상황을 반복하게 된다. 처음에는 우발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거꾸로 폭력을 야기할 정황을 만들어낸다(술김에 때리는 것이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에 취한다는 사실을 환기할 것). 이어지는 화해의 짜릿함도 빼놓을 수 없다. 약자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배치 하에선 폭력을 자신에 대한 욕망의 강렬함으로 착각할 수 있다.

앞의 #장면 1을 보자. 온갖 애정공세를 다 해놓고 파트너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때의 상실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다 다시 만났을 때의 그 황홀함이란. 에로스 역시 그렇다. 폭력이 주는 좌절감이 클수록 뒤에 오는 화해의 달콤함은 강렬하다. 이런 격렬한 부침을 ‘연애의 정석’이라 여기게 되면 이제 사랑과 평화의 연결고리는 심각하게 훼손된다.

우리를 둘러싼 대중문화는 이런 심리적 회로를 주입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대중가요는 ‘미쳐’ ‘내 거’가 주요 키워드고, 멜로는 점차 ‘치정’과 ‘살인’이 연계되는 호러물이 되어가고, 광고는 오감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만이 생의 유일한 낙이라고 선전선동한다. 핵심은 쾌감이다. 화폐가 에로스적 열정으로 표현되는 것도, 데이트가 폭력과 연계되는 것도 다 쾌감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쾌감은 소유와 집착에서 온다.

당연히 폭력이 수반된다. 왜? 폭력이야말로 소유를 증명할 수 있는 최고의 방편이니까. 그럼 폭력의 절정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름 아닌 죽음이다. 결국 이 삼중주의 기저음은 ‘죽음 충동’이다.

‘엔론 사태’는 오직 돈만 보고 달린 탓

‘엔론, 스마트한 자들의 몰락’이라는 다큐가 있다. 엔론은 2000년 미국에서 7위를 달리던 에너지 기업이었다.

“1985년 창립 당시 100억 달러였던 자산이 650억 달러로 폭풍 성장을 했다. 그리고 2001년 폭삭 망했다. 파산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4일. 엔론 트레이더들은 마치 고교 ‘일진’들처럼 행동했다. 트레이더들은 주식 값을 올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기세로 덤벼들었다. 캘리포니아의 전기 공급까지 조작했다. 재난으로 이어질만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다면 전쟁이라도 벌어지기를 바랬다. 오로지 돈이 목적인 기계들처럼 행동했다.(이상 박시연 블로그)

재밌는 건 이들의 일상이다. 이들은 격렬한 운동을 즐겼다. 목숨 걸고 사이클을 하고 목숨 걸고 음주가무를 즐기고. 섹스야 말할 나위가 있으랴. 대체 왜? 아무 이유없다. 쾌감 그 자체가 목적일 뿐. 야후의 현대판 버전이다.

화폐와 에로스, 그리고 폭력의 삼중주. 어떻게 하면 이 삶을 온통 집어삼키는 ‘마성의 블랙홀’에서 탈주할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미혹되지 말라. 목숨 걸고 욕망하지 말라. 화폐건 에로스건. 인생의 목적이 ‘삶’ 그 자체임을 잊지 말라. 요컨대, 부디, 살려고 하라.


(2015.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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