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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고미숙의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⑨] 자본의 황혼, 몰락의 에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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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6-02-12 15:05 조회5,58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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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든 국가든 몰락할 때 품격의 진가 드러나…
규모는 줄이고 소비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결단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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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는 미세먼지가 지구를 덮치는 상황을 그렸다. 창궐하는 미세먼지는 자본의 유동성이 커질수록 불확실성이 커지는 세계경제를 은유한다.
 
‘뉴 노멀의 시대’엔 고양이의 낙법이 필요하다. 고양이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떨어지면서 무게중심을 유연하게 옮기기 때문이다. 무게중심은 확고해야 한다. 하지만 위기가 오면 유연하게 중심을 옮길 수 있어야 한다. 몰락의 시대에 필요한 몸과 정신의 기예다.


개미는 일을 하고 베짱이는 노래를 한다. 추운 겨울이 오자 베짱이가 개미를 찾아간다. 식량을 좀 나눠먹자고. 개미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내가 일할 때 넌 놀았잖아? 하면서. 결국 베짱이는 굶어죽는다. 이게 한국식 버전인데, 이 우화를 이렇게 전복한 경우도 있다. 여기선 베짱이 대신 매미가 등장한다. 역시 식량을 나눠먹자는 매미에게 개미가 묻는다. “내가 땀 흘리며 일할 때 너는 무얼 하고 있었지?” “열심히 노래해서 모두를 즐겁고 신명 나게 만들어주었지.” “오호, 그렇구나, 그럼 이제부터는 함께 춤추며 살자꾸나.” 그렇게 해서 개미와 매미는 추운 겨울을 즐겁게 넘겼다는 이야기. 쿠바식 버전이다. 하긴 노래와 신명도 중요한 활동이지. 또 이왕 식량이 넉넉하니 같이 겨울을 나면 더 재밌겠군!

한편 잔혹 버전도 있다. “개미는 여름 내내 열심히 일하고 식량을 저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에 과로사로 죽었습니다.” 일본식 우화란다. 물론 베짱이(혹은 매미)도 죽었을 게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식 버전은 그나마 나은 셈인가? 개미는 그래도 살아남았으니까. 하지만 아주 외롭고 서글프게 겨울을 났으리라.

한국, 쿠바, 일본? 이 중에서 고르라고 하면 대개 쿠바식 버전을 선택할 것이다. (만약 일본을 선택한다면 그건 일종의 ‘변태성향’이니까 옆으로 치워두자). 인간본성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이다. 헌데 왜 현실의 정치경제학에선 그 자연스런 일이 안 되는 걸까? 솔직히 우리에게 익숙한 결론은 일본식 버전이다. 개미는 일하다 죽고 매미는 배고파 죽는! 그만큼 생명의 본성에서 멀어졌다는 뜻이다. 그 간극만큼의 ‘변태성’을 감당하자니 갈등과 번뇌가 끊이질 않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본성을 회복하자’는 말은 공허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변태성’을 넘어서려고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왜?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이다. 헌데, 그러기 위해선 노동과 신명, 활동과 소비, 삶과 죽음에 대한 전제를 몽땅 뒤집어야 한다. 그래야 누구는 ‘일’을 하고 누구는 ‘노래’를 한다는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 차이를 인정해야 비로소 교감이 가능하다. 차이와 감응의 경제학!

‘부드러운’ 몰락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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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을 덮친 서브프라임 사태. 저신용 서민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의 남발로 주택가격이 폭락했다
 
그 이전에 더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다. 이 계절이 겨울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겨울은 천지가 닫히는 계절이다. ‘생장(生長)’을 향한 흐름을 멈추고 ‘수장(收藏)’으로 방향을 바꾸는 시간이다. 그때 필요한 건 노동과 축적이 아니라 휴식과 순환이다. “좋은 것은 끝이 있고, 끝이 있어야 좋은 것.” <홍루몽>이라는 말이 있다. 인생만사 그러하다면 문명과 자본이라고 다르겠는가. 문제는 ‘어떻게 몰락할 것인가’이다. 겨울이 오고 있는데도 미친 듯이 ‘지붕 뚫고 하이킥’을 날리다 곤두박질칠 것인가? 아니면 리듬을 조율해서 ‘부드럽게’ 몰락할 것인가? 선택지는 둘뿐이다! 아주 일찌감치 몰락의 코스를 밟은 나라가 있다. 다들 성장에 미쳐서 날뛸 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 나라. 다름 아닌 쿠바다.

제국주의의 오랜 압제에 맞서 혁명에 성공했지만 1962년 케네디의 ‘쿠바봉쇄령’으로 교역과 원조가 다 막혀버렸다. 1991년 원조국 소련마저 무너지자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자립 말고는 어떤 출구도 없었다. 하지만 성장을 포기한 대가로 수많은 실험이 가능했다. 그리고 드디어 전 세계가 몰락의 스텝을 밟게 되자 쿠바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쿠바 경제는 말 그대로 몰락했다. “하지만 이 이상의 경제성장은 지구환경적으로는 한계를 넘는 것이고, 또 성장이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프랑스에서는 성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검소한 사회’를 향한 반성장이 시민권을 얻어가고 있다. ‘몰락이야말로 진보’라고 하는 역발상에서 보면, 물질적으로는 빈곤하다고 해도 쿠바는 반성장의 선두주자, 몰락선진국인 셈이다.” (요시다 타로 지음·송제훈 옮김,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위의 우화도 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하 ‘몰락선진국’으로 약칭)

몰락선진국? 형용모순의 극치다. 몰락선진국이 있다면 몰락후진국도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 몰락에도 품격이 있다. 아니, 개인이든 국가든 몰락할 때 비로소 품격의 진가가 드러난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소위 선진국들은 쿠바보다 훨씬 부유함에도 ‘저성장’이라는 말만으로도 두려움에 떨고 있다. 우리에게도 과연 ‘부드러운 몰락’이 가능할까? 쿠바로부터 그 기예를 배워야 할 때다.

대서(大暑)는 절기상 가장 무더운 때다. 대서의 끄트머리, 더위로 숨이 막힐 때 입추가 된다. 하늘이 문득 높아졌건만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한다. 여전히 대지가 남은 열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기의 변화를 계속 겪다 보면 몸은 절로 안다. 아무리 무더워 봤자 곧 가을바람이 불고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역사와 문명에 대해서는 그런 슬기를 발휘하지 못한다. 수많은 징후와 경고음이 울려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왠지 자본은 계속 성장할 것 같고, 다 망해도 나는 성공할 것 같은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하여, 몰락의 기예를 제대로 터득하려면 징후의 포착이 우선이다. 다음은 한때 일본 벤처신화의 주인공이었던 한 CEO의 술회다.

“출자한 회사는 20여 군데나 됐다. 놀랍게도 그 모두가 몇 년 만에 사라졌다.” “‘투자 위원회’를 만들고 유명한 IT기업의 경영자와 인터넷 전문가, 대형 광고회사의 컨설턴트가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그런 ‘성공한 자들’의 눈에 든 회사가 모조리 무너진 것이다. 세상에는 잘나가는 기업의 경영전략을 최고로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같은 전략과 이론을 적용한다고 해서 후발주자가 선발주자의 영광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회사가 잘 되느냐 안 되느냐는 사람에 달린 것이고, 대부분 성공에는 운이 따라야 한다. 투자회사는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대더라도 본질상 도박과 별반 다르지 않다.”(히라가와 가쓰미, <소비를 그만두다>, 80면) 이것이 ‘5억 엔이라는 거금과 10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하면서 배운’ 교훈이다. 결국 기업의 성공이란 ‘운빨’이라는 뜻인가? 그렇다!

점성술로 전락한 경제학적 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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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그와 미세먼지가 심해져 마스크를 쓴 베이징의 학생들. 미세먼지는 당장 대환란을 초래하진 않지만 미세하게 일상을 잠식한다.
 
중요한 건 망했다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최고의 경영 엘리트들의 예측이 고작 이런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경제라고 다를 바 없다. 199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루카스는 2003년 “공황을 예방하는 문제는 이제 해결이 되었다”라고 선언했지만, 그로부터 5년 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다. 갤브레이스는 “경제학적 예측의 유일한 기능은 점성술을 점잖고 존경할 만한 분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농담한 적이 있다.(<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참조)

하긴 자본주의 역사 자체가 예측불허, 좌충우돌의 연속이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 따르면 서기 1000년에서 1500년, 중세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년에 0.12%씩 증가했다. 그만큼 미미했던 셈이다. 물질적 발달 정도만 놓고 보면 현재 중국의 1년은 중세 서유럽의 83년과 맞먹는다. 그러다 자본주의는 1820년경부터 비상을 시작하여, 1870년 즈음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중화학공업 및 자유무역 등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상승국면에서 문득 대공황과 양차 대전이 발발한다. 쉽게 말해 부의 폭발적 증가가 파국과 전쟁을 초래한 것이다. 당연한 노릇이다. 문명의 동력은 불이고, 자본주의는 그중에서도 화력이 가장 센 불이다. 많은 것을 이루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 방향과 파워를 제대로 가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73년까지 자본주의는 다시 황금기를 구가했지만, 그때 역시 전 세계가 냉전으로 고통받던 시기였다. 양 진영 중에서 사회주의가 먼저 쇠락의 길을 가고,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갈아탄다.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80년에서 2007년 사이 전 세계 생산량 대비 금융자산 총량은 1.2배에서 4.4배로 증가했다. 시스템이 얼마나 복잡해졌던지 상품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무려 10억 페이지가 넘는 정보를 독파해야 한단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어이없는 시스템이? ‘계약의 자유를 많이 보장하면 금융시장의 주체들이 자산 가격을 효율적으로 매기는 방법을 생각해낼 것이고 그를 통해 금융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이 높아질 것’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불성설이다. 2008년 가을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은 보험회사 AIG의 금융책임자였던 조 카사노라는 사람은 회사가 무너지기 바로 6개월 전에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경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떤 거래든 1달러라도 손해를 보는 시나리오는 이성의 한도에서 상상할 수가 없다.”

자, 일단 여기까지. 이런 정책을 담당한 이들은 나쁜 사람도, 둔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오히려 ‘대학전공과 상관없이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불행히도 이로 인해 공학, 화학 등 다른 분야에서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을 재능 있는 사람들이 파생상품을 거래하고 그 상품의 가격을 책정하는 수학 모델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위기와 파국이 코앞에 오기 전까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수학 모델이고 ‘나발이고’ 차라리 운에 맡기는 게 나은 셈이다. 하긴 그래서 정치가든 기업가든 역술가를 그렇게 찾아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의 유동성이 커질수록 이 불확실성은 더더욱 심화된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미세먼지와 여러모로 닮았다.

미세먼지가 지구를 덮치자 지구에선 더 이상 곡물이 자라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지난해 겨울 천만 관객을 동원한 공상과학영화 <인터스텔라>의 콘셉트다. 핵전쟁도 아니고 스타워즈도 아닌 미세먼지 때문에 지구를 떠나야 하다니. 설정 자체가 놀라웠다. 헌데, 그게 공상과학이 아니라 목전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알다시피 베이징의 스모그는 거의 재앙 수준이다. 주기적으로 덮쳐올 뿐 아니라 범위도 엄청나서 한반도의 3배 면적에 해당하는 지역의 태양을 가려버렸다. 이미 수조 원이 넘는 돈을 풀었건만, 별무소용이다. 해결책은 오직 바람뿐이다. 하여, 베이징에선 “매(?)장군의 습격을 막는 건 풍(風)국장 뿐”이라는 농담이 유행이란다. 세계경제를 뒤흔드는 중국의 부(富)도,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미사일 행진도 미세먼지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물론 자업자득이다.

지금 필요한 건 발산이 아니라 수렴
세종특별자치시의 휘황한 야경. 도시의 불빛은 문명을 상징하지만 밤의 생명성을 앗아가는 빛의 공해를 만들어낸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요동에서 연경으로, 연경에서 열하로 이어지는 여정에는 끊임없이 강이 출현한다. 오죽하면 ‘일야구도하기(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넌다)’같은 명문장이 나왔겠는가. 그로부터 불과 230여 년 사이에 중국 전역에서 수만 개의 강이 사라졌다고 한다. 석탄·석유·자동차·건설기계 등의 산업이 주범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그동안 우리가 누린 부가 공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강물이 사라지면서 대기가 오염되는 징후는 충분했다. 하지만 부의 총량이 늘어나면 다 해결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니 재앙이 목전에 닥치기 전에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고. 또 하나, 가장 위협적인 것은 가장 작고 미세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것은 지진이나 해일처럼 당장의 대환란을 초래하지도 않는다. 이름대로 미세하게 일상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것은 중국 북방에 한정된 문제만도 아니다. 인도와 유럽도 미세먼지의 습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바람이 불면 미세먼지는 우리나라 상공으로 이동한다. 심지어 미국 서부까지 영향권에 들어간다고 한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자 핵물질이 섞인 바람이 불어올까 노심초사했는데, 이젠 중국발 미세먼지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우리가 배출하는 오염물질도 상당한데 거기다 양국에서 불어오는 발암물질까지,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형국이다. <인터스텔라>에선 결국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떠나버린다. 그럼 지구를 떠날 수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안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가을, 아니 초겨울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지금 필요한 건 발산이 아니라 수렴이라는 것, 성장이 아니라 몰락이라는 것을.

언급했듯이, 문명의 원천은 불이다. 주역에서도 ‘중화리(重火離)’ 괘는 두 개의 불이 겹쳐져 있는 형상인데, 그것은 문명의 빛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빛의 단계를 넘어 열에 해당한다. 하여 자본이 증식될수록 지구상의 물은 점점 고갈되어 간다. 현대인의 몸 역시 마찬가지다. 거듭 말하지만, 양생의 핵심은 수승화강이다. 신장의 물(水)은 위로 올라가고 심장의 불(火)은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위아래가 잘 순환하면 몸은 대체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물이 부족하고 불이 치성하면 순환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 이런 상태를 ‘음허화동(陰虛火動)’이라고 부른다. 동의보감에서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는 증상이다. 지구가 팍팍해지는 만큼 현대인의 몸 역시 ‘사막화’되고 있다. 이것은 그 어떤 경제지표 못지않게 중요한 사안이다. 몸의 상태가 감정을 일으키고, 그 감정의 파노라마에 따라 행, 불행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생명주권과 에콜로지가 분리될 수 없는 이유다.


‘음허화동’의 신체-새로운 ‘마이너’들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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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국내 한 백화점에서 열린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뉴 노멀 시대의 경제 환경에서는 소비의 철학과 사상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정규직,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 우리에게 익숙한 마이너 그룹이다. 하지만 이들을 마이너로 규정하는 기준은 국가, 민족, 계급, 성 같은 거시적 범주다. 만약 생명주권을 잣대로 하면 어떻게 될까? 아주 색다른 ‘마이너들’이 출현한다.

①‘밤과 잠’을 약탈당한 자들? 과로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회식과 유흥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혹은 그냥 먹방 보면서 야식하느라 그럴 수도 있다. 사회적 계층과 직업은 다양할 수 있지만 생명주권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들은 분명 마이너다. 이집트의 노예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 결정적인 이유는 과도한 조명 탓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룩소르 광선은 양초 400억 개의 불빛이라고 한다. 밤의 완벽한 실종! 대부분의 도시 역시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치장하고, 그러다 보니 전 세계가 빛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몇 백만 년 동안 낮에는 밝고 밤에는 어두운 환경에서 진화해왔다. 이런 오랜 리듬이 깨진 것은 고작 지난 100여 년 사이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현상이다.” 불면은 멜라토닌의 생성을 방해한다. 멜라토닌은 발암물질을 억제하는 호르몬이다. 그런 까닭에 ‘주요 질병은 어느 것이든 부족한 잠과 연관되어 있다.’ 그뿐이랴. 잠을 빼앗기면 사유의 회로 역시 막혀버린다. “서구문명사는 야생성-미지의 것, 신비로운 것, 창조적인 것, 여성적인 것, 동물적인 것, 어둠에 관련된 것-을 짓밟으려는 시도로 가득하다. (폴 보가드, <잃어버린 밤을 찾아서> 참조)

① 중독된 신체들? 밤과 잠을 빼앗기면 일상의 사이클은 교란된다. 교란되면서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에 꽂혀버린다. 이것이 중독이다. 이전에는 알코올, 도박, 게임, 아편 등 아주 강력한 자극을 주는 것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요즘의 중독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쇼핑중독, 몰카중독, 연애중독, 카톡중독, 치킨중독, 쓰레기중독 등등. 시사프로에 단골로 등장할 정도로 사회적 치유가 필요한 이들이다.

③언터처블-‘사람한테는 오직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명의 원리에서 배제된 이들. 흔히 1인가구, 독거노인, 비혼족을 떠올리겠지만, 그보다는 일상(밥, 말, 발)을 공유할 친구가 없는, 누구와도 ‘터치(접촉)’하지 않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에게 빈부격차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자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 사회적 배려와 연민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④‘성적’ 소수자들? 트랜스젠더나 게이, 레즈비언 등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연애와 성이라는 영역에서 배제된 자들. 대학 가서 좋은데 취업하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모태솔로가 된 모범생들. 연봉도 많고 직업도 확실하지만 에로스가 고갈된 신체들. 이들이야말로 시대의 희생양이다. 참고로 <걸리버여행기>를 보면 ‘세금을 거두는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방법’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과세의 대상은 악행과 지혜, 패션 등 다양한데, 그중 최고는 “남성의 경우,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 그들이 받는 구애의 횟수나 구애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 아주 기막힌 농담이다. ‘증세냐, 복지냐?’를 따질 때 우리는 오직 화폐의 양만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늘 삶의 현장과는 어긋난다. 일례로 여교사는 결혼상대 1순위에드는 직업이다. 하지만 교사직 자체가 여성편향이 심하다 보니 주변에 남성이 거의 없다. 짝짓기의 가능성이 그만큼 희박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교사들의 경우, 봉급 수준은 유럽보다 높은 편인데도 교사가 된 걸 후회하는 비율은 최고수준이라고 한다.

⑤ 타임푸어(연봉은 높지만 늘 시간에 쫓기는 이들), 지혜로부터 소외된 자들, 기타 등등, 이런 식으로 항목이 계속 늘어날 수 있다. 계급과 신분, 인종 같은 굵직한 선분을 벗어나면 삶의 ‘맨 얼굴’이 리얼하게 드러난다. 보다시피 삶이 잠식된 범위는 전방위적이고 전인격적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정치경제학적 과제에서 늘 배제된다. 거기에 착목하면 자본을 향해 마구 달려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를 살리자니 삶이 위태롭고, 삶을 지키자니 경제가 무너지겠고. 정치경제학적 신파의 탄생! 이거야말로 몰락의 가장 두드러진 징후다.

몰락의 에티카1-이 사람을 보라!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이름은 산초 판사. 시골 무지랭이 농부로 살다 방랑기사 돈키호테의 감언이설-자신이 공을 세우면 섬의 총독 자리를 맡기겠다는 것-에 취해 시종이 되었다. 덕분에 온갖 ‘개고생’을 다한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2권에 가면 산초가 한 공작부인의 장난질에 의해 정말로 한 마을의 총독으로 임명된다. 농부에서 총독으로! 인생역전에 성공한 산초는 총독의 임무에 매진한다. 송사를 물 흐르듯 매끄럽게 처리하고 마을의 살림을 알뜰히 챙긴다. 대신 마음껏 먹고 마시는 기본권이 박탈당해 괴로워하던 차, 마침내 공작부인의 하수인들이 전쟁이 났다며 갑옷을 입힌 채로 두들겨 패자 그 자리에서 바로 총독직을 사임한다.

신분상승이고 총독의 권위고 다 필요없다! “길을 여시오, 여러분. 나의 오랜 자유로 되돌아가겠소이다…. 나는 총독이 되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올시다. 기습하려 하는 적들로부터 섬이나 도시를 방어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외다.” “주인이신 공작님께는 내가 벌거숭이로 태어나 벌거숭이로 남았다고 전하세요. 얻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지요. 말하자면 땡전 한푼 없이 이 섬에 들어와 땡전 한푼 없이 떠나는 거지요. 섬의 다른 통치자들이 보통 떠날 때와는 다르게 말이지요. 저리 비켜요. 나 좀 갑시다. (민용태 옮김, <돈키호테>2, 632쪽) 놀라워라~, 산초 역시 대박꿈에 ‘쩔긴’ 했지만 결코 생명의 본성을 잃진 않은 것이다.

현대인이 진정 귀 기울여야 할 사항이다. 현대인들은 너무 쉽게 기본권을 포기한다. 법적, 제도적 권리에 대해서는 지극히 민감하지만 생명주권의 차원에선 자기를 배려하는 힘이 거의 없다. 돈키호테는 미치광이다. 기사도 소설을 읽느라 뇌수가 마른 탓이다. 잠도 자지 못하고 식욕은 전혀 돌보지 않고 항상 에로스를 떠들어대지만 성욕 자체는 희박하기 짝이 없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돈키호테의 충실한 후예다. 돈키호테의 웅변술은 대단하다. 논리정연하고 드높은 이상에 불탄다. 누구라도 그 웅변을 들으면 탄복할 지경이다. 그런데 왜 미치광이로 간주되는가?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기사도의 이상주의가 사라진 지 오래됐건만 자신만 그걸 모른다. 생명주권을 놓치자 인식의 차원에서도 공중부양을 해버린 것이다.

바야흐로 문명의 황혼이다. 정치경제학이 먼저 그렇게 선언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저성장·저물가 등등. 그럼에도 여전히 자본의 ‘대박’을 향해 몸을 혹사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미친 짓이다! 부디 명심할 일이다. 이 몰락의 시대에 필요한 건 돈키호테의 망상이 아니라 산초의 양생술임을.

몰락의 에티카2-‘호모 에렉투스’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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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를 맛있게 피우고 있는 한 쿠바 노인의 표정이 여유롭다. 쿠바 경제는 오래전에 몰락했지만 최근에는 ‘검소한 성장’을 실현한 경제 시스템으로 주목받는다.
 
 
인간은 ‘호모 에렉투스’다. 왜 두 발로 섰는가? 천지를 연결하기 위해서다. 두 발로 서는 순간 위는 하늘, 아래는 땅이 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다. 뇌세포가 이토록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천지는 무한하니 그 무한을 탐색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머리에서 얼굴이 탈영토화된 것, 구강구조가 직각이 된 것 역시 다 같은 원리다. 그런 점에서 언어야말로 SNS의 원조다. 결국 인간은 사유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다! 생각과 언어, 발의 삼중주! 그것이 직립의 구체적 내용이다.

이것은 생리적 원리이자 윤리적 비전이기도 하다. 농업혁명이건 산업혁명이건 소비에트혁명이건 인간은 두 발로 걷기 위해, 즉 모두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 달려왔다.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모두가 주인이 될 줄 알았다. 고도성장을 이루면 소외에서 벗어날 줄 알았다. 둘 다 아니라는 건 짐작하는 바대로다. 오히려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탓인가. 겉은 번드르르한데 속은 문드러졌다. 두발로 서기가 더더욱 난감해졌다는 뜻이다. 왜 직립보행을 하는지도 까먹은 듯하다.

다시 ‘호모-에렉투스’가 되려면 나를 압박하는 것과도 싸워야 하지만 그 이전에 나를 사로잡고 있는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망의 그물은 넓고도 깊지만 현대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건 소비욕구다. 왜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소비를 포기하기 싫어서.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소비를 줄이기 싫어서다. 왜 기꺼이 삶을 저당잡히는가? 소비, 소비를 위해서다.

자본주의는 “지역과 가정을 잘게 쪼개서 ‘개인’을 만들었고, ‘개인’의 욕망을 환기해 ‘소비자’를 만들어냈다.”(<소비를 그만두다>, 89면) “현재 주류인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에서는 궁극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일에 대한 논의는 공장 문 혹은 가게 입구에서 끝나고 만다. 일 자체가 갖는 가치는 그것이 창조하는 즐거움이 되었건 자기 성취의 기쁨이 되었건 사회에 유용한 일을 한다는 데서 얻는 자존감이 되었건 간에 별 인정을 받지 못한다.”(<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360쪽) 상품의 이미지가 뇌수를 채워버린 격이다. 소비에 미쳐버린 돈키호테의 후예들!

따라서 지금 시급한 건 소비병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내수 경제가 어떠니, 블랙 프라이데이가 어떠니 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라. 국가나 기업은 결코 소비를 줄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내수경제를 살려야 하니까. 하지만 이젠 알지 않는가? 삶은 결코 통계수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장과 혁명의 시절엔 국가와 기업이라는 큰 틀이 중요했다. 하지만 몰락의 시절엔 ‘각자도생’이 핵심이다. 모두가 자기 삶의 게릴라가 되어야 한다. 게릴라의 저력은 지형지물을 적절히 활용하는 데 있다. 앞서 나온 벤처신화의 주인공 히라가와의 결론 역시 ‘소상업, 탈소비자’다. 규모는 줄이고 소비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것, 두 발로 서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노하우다.

쿠바는 지형학적으로 열대 허리케인의 통로에 해당한다. 재난을 피할 도리가 없는 곳에 위치했다는 뜻이다. 2008년 두 개의 태풍이 연속해서 내습했을 때였다. “전자의 경우에 사망자는 전무했고, 후자도 7명이 목숨을 잃었을 뿐이었다. 허리케인 미셀로 국토의 52%가 피해를 입고 국민의 53%에 해당하는 약 500만 명이 재해를 입었을 때도 사망자는 5명에 지나지 않았다.”(<몰락선진국>, 187쪽) 세월호 참사 때 우리가 겪었던 재난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할까? “바람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면 정전으로 TV 방송이 멈추리라 예측해서 미리 꺼버립니다. 이후부터는 라디오가 중심이 됩니다. 허리케인이 상륙해서 지역이 폭풍권에 들어가면 가스와 전기 등의 라인도 멈춥니다.” 허리케인이나 지진, 해일 등은 지구의 자연스러운 운동일 뿐이다. 다만 그것이 전기와 가스, 고층빌딩, 고속도로 등과 마주칠 때 대참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재난은 문명이 초래하는 인재일 수밖에 없다. 그걸 막으려면 방법은 오직 하나! 미리 멈추는 것이다.

몰락의 에티카3-유연하게 유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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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몸처럼 유연한 사고와 세계관이 필요한 시대다. 모든 것이 몰락해도 몸의 중심만 잡으면 낙담할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선진국이 절대 하지 못하는 것이 이 점이다. 재난이 오기도 전에 멈추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해서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엔 빼앗기는 방식으로 재난을 겪는 셈이다. 쿠바는 이 점을 간파한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 하나. 재난이 꼭 비극이기만 할까. “대피자의 78%는 안전하다고 여기는 친구나 친척 집에 머물렀다. 이 연습을 통해서, 우선해야 할 사항과 물자의 적절한 분배 방법이 확실해 질 뿐 아니라 정부와 협동하기 위한 사회관계자본도 축적하게 된다.

실제로 경험한 재해의 기억은 그것이 좋든 나쁘든 중앙정부의 기록보다도 오히려 피해자의 마음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지역공동체나 지방정부의 차원에서 지도 만들기와 방재 훈련을 실시하면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논의들도 한층 더 왕성해진다. 매년 각자가 맡은 역할의 기억을 새롭게 하고 상황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같은 책, 207쪽) 재난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그것이 다시 신체적 능력이 되고, 공동체의 자산이 된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멋지다.

이것이 바로 고양이의 낙법이다. 고양이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떨어지면서 무게중심을 유연하게 옮기기 때문이다. 무게중심은 확고해야 한다. 하지만 위기가 오면 유연하게 중심을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낙법의 진수다. 몰락의 시대에 필요한 기예도 이것이다. 평생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사는 건 위험천만하다. 미래엔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생겨날 것이다. 가족관계도 재배치되어야 한다. 1인가구가 늘어나면 혈연을 넘어서는 건 물론이고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계 사이의 가족도 탄생할 것이다. 따라서 한없이 유연해야 한다. ‘내가 왕년에’ 같은 해병대식 어법이나 ‘이 나이에 뭘? 배울 만큼 배웠어~’ 같은 꼰대식 담론은 치명적이다.

이런 화법 자체가 온몸을 경직시킨다. 경직은 비장함을 낳고, 비장함은 ‘원한과 자책’의 이중구속을 초래한다. 그러니 어깨에 힘을 뺄 것. 어떤 경우에도 유머를 잃지 말 것. 허리케인이건 금융위기건 혹은 그 어떤 모순이건, 자신이 맞서 싸우는 대상이 아무리 힘겹고 역겹더라도, “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슬퍼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푸코의 조언(<안티 오이디푸스> 서문)을 환기할 것. 진정 삶을 바꾸는 건 비장한 포즈가 아니라 ‘욕망과 현실’의 유연한 연결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생명원리를 토대로, 두 발로 선 다음, 유연하게 유쾌하게 흘러가야 한다. 이것이 ‘부드러운 몰락’의 기예다. 개미와 매미가 겨울을 함께 날 수 있는, 차이와 감응의 경제학도 그때 비로소 가능하다. 자, 윤리적 워밍업은 여기까지. 이제 현대인의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주관하는 초월적 기호인 화폐와 대적할 때가 되었다. 화폐란 무엇인가? 화폐의 잠재력은 무엇인가? 화폐는 과연 영성과 조우할 수 있는가? 등등. 다음호에서.
 
출처: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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