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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사>[고미숙의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마지막 회)] 백수는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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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6-04-14 09:42 조회6,7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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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마지막 회)] 백수는 미래다! 

“우정의 윤리, 로고스적 열정이면 충분” 

고미숙 고전평론가
남들보다 폼 나는 일을 해서 더 많은 화폐로 보상받는 것은 무의미… 노동은 생명의 차원에서 다시 규정돼야

▎도서관을 가득 메운 학생들의 공부 열기. 부와 권력,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공부보다 진정한 백수를 지향하는 로고스의 단련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 사진·중앙포토
직업 따로 인생 따로가 아니라 삶을 ‘통째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생의 고수’가 되는 것, 그것이 백수의 길이자 일이다.

드디어 마지막 회다. 몸과 우주, 그리고 정치경제학. 낱말 하나하나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낱말들이 서로 연결되는 순간, 좀 뜨악해진다. 한 번도 서로의 이웃항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유의 강물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몸이 됐건 우주가 됐건, 혹은 정치경제학이 됐건 그 모든 것의 회향처가 나 자신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자기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정말 중요하다. 자기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어느 누구와도 진실해 질 수 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게 온 마음으로 진실할 수 있는가? 모든 비난을 넘어서, 모든 분별을 넘어서, ‘해야 한다’ 혹은 ‘해서는 안 된다’ 따위를 넘어서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가?”(아디야 산티,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하여, 마지막 회의 주제는 나 자신이다. 나의 몸과 나의 우주, 또 나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말해보겠다.

나는 백수다. 박사학위를 가진 중년 백수다. 고전평론가에 인문학자 아니냐, 라고 반문하겠지만 그건 직업군에 속하지도 않거니와 정규직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나의 백수 경력은 연원이 아주 깊다. 1984년, 대학을 졸업했으나 갈 곳이 없었다. 간신히 작은 잡지사에 들어갔지만 월급을 주지 않는 곳이었다. 3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대졸백수로 떠돌다 좀 큰 출판사엘 들어갔다.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종일 교정지만 쳐다보다가 6시가 땡!치면 일어나 퇴근하는, 마치 카프카 소설을 연상시키는 그런 회사였다. 8개월쯤 다니다 역시 때려치우고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결국 정규직 진입에 실패한 셈이다. 전공을 바꾼 탓에 대학원 진학도 만만치 않았다. 한 달 동안 4·19탑 근처에 있는 대학의 도서관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시험준비를 했다. 간신히 통과했지만 입학하자마자 부모님이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한 학기만 다니고 관둘 생각이었는데, 희한하게도 매학기 등록금이 어디선가 굴러왔다. 취업은 그렇게 기를 써도 안되더니만 학업은 그닥 애를 쓰지 않았는데도 박사과정까지 무사히 마쳤다. 천지신명이 도왔다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이제부터 ‘사는 것’이 직업이다”


▎사진·중앙포토
그렇게 나의 학창시절은 끝났다. 남은 길은 오직 하나! 교수가 되어 대학에 다시 진입하는 것. 나름 분투했지만 장벽이 너무 높았다. 어느 순간, “이제 그만두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계속 이렇게 임용에 목을 매다간 심신이 다 파산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다. 공교롭게도 그 즈음 결혼생활을 접었다. 취업과 결혼, 두 사건은 아무 관련성이 없다. 헌데, 40대를 앞두고 두 사건이 동시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소위 ‘출가’를 한 것 같다.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가족과 직업이라는 두 가지 표상에서 탈주했다는 뜻에서다.

갑자기 ‘한소식’ 한 거냐고? 아니다! 그저 욕망의 새로운 출구를 발견했을 뿐이다. 자유롭게 읽고 쓰고 먹고 걷고…. 한마디로 생명 주권에 대한 열망이 솟구친 것이다. 누구든 이런 삶을 원할 것이다. 다만 그 출구를 찾지 못했거나 찾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주변에 나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좀 있었고, 그들 덕분에 ‘수유연구실’이라는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단연코 영적 계시나 실존적 결단 따위는 없었다. 그냥 ‘몸이 가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 이후 지금껏 백수로 살고 있다.

작가로 ‘잘 먹고 잘살지’ 않느냐고 묻고 싶겠지만 그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백수로 살다 보니 그 길이 생긴 것이지 작가가 되기 위해 백수가 된 것도 아니다. 불안과 시기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거기에 더해 왜 나는 번번히 취업에 실패할까? 그 정도로 내가 덜떨어진 걸까? 라는 근원적 회의에 사로잡힌 적도 많았다. 불안과 질투, 운명적 열등감, 이런데 사로잡혀 있으면 일상이 엉망이 된다. 아무리 근사한 이미지나 명분으로 포장해도 소용이 없다. 그럴 땐 일단 그 회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발적 백수가 된다는 건 그런 의미다. 정규직의 치열(아니 치사)한 전선에서 도주한 백수, 그들에겐 이제부터 ‘사는 것’이 직업이다. 직업 따로 인생 따로가 아니라 삶을 ‘통째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생의 고수’가 되는 것, 그것이 백수의 길이자 일이다. 삶은 ‘활동과 관계’로 압축된다. 공부방을 열었으니 두 가지는 충족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갈 곳이 생겼고, 거기에 가면 세미나와 강좌, 식사와 산책, 기타 등등이 가능하다. 삶의 기본리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지금이라면 굳이 이렇게 공동체를 따로 만들 필요도 없다. 마을마다 도서관과 공부방이 넘쳐나고 있으니 거기를 발판으로 네트워크만 하면 된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돈도 돈이지만 그보다 더 심층적인 문제가 있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인생의 비전에 대한 회의가 그것이다.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비록 돈 문제가 해결돼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 그 회의에서 벗어나게 된 건 니체와 연암, 루쉰 같은 수많은 스승 덕분이지만 무엇보다 동양의역학이 결정적이었다.

40대 중반 <동의보감>을 통해 의역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의학은 나의 체질과 질병에 대해 알려주었고, 역학은 내 운명의 지도를 그려주었다. 내 사주에는 식상과 재성이 없고, 비겁과 관성, 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상이 없으니 말과 밥, 자식복을 타고나지 못했고, 재성이 없으니 취업과는 인연이 희박하다. 설령 취업이 된다 해도 오래 견디기 어려운 팔자다.

나의 운명사용설명서

헌데, 이것들이 부재하는 이유는 내 욕망의 벡터가 비겁과 관성, 인성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인성은 공부운이고, 비겁과 관성은 사람들에 대한 욕망이다. 그랬다. 나는 사교성이 없고 몹시 불친절한 캐릭터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부터 늘 친구가 많았다. 어딜 가건 사람들을 모아 어떤 활동을 조직하곤 했다. 그럼에도 운동권에 들어가지 않은 건 타고난 소심함도 있지만 인성, 곧 공부운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도 박사과정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비밀이 드디어 풀린 것이다.

수유연구실을 만들 때 ‘몸이 가는 대로’ 했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때 나를 움직인 건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자발성이었다. ‘관인상생’이라는 팔자를 한마디로 줄이면 ‘지식인공동체’가 된다. 그렇게 나는 내 운명, 아니 내 무의식의 심층을 읽어버렸다! 그 순간 나는 사회적 표상이 부여한 각종 콤플렉스에서 해방되었다. 그렇다! 백수는 나의 운명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떳떳하게 백수생활에 진입했다. 운명을 더 능동적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그에 대한 중간 리포트가 <나의 운명사용설명서>다.

헌데, 2008년 이후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청년백수, 중년백수, 정년백수 등 바야흐로 ‘백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백수에 대한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분적으로 맞지만 대개는 틀렸다. 담론의 배치를 약간만 틀어도 수많은 길이 열릴 텐데, 하는 목소리들이 자꾸 내 안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몸과 우주, 그리고 정치경제학이라는 이 낯선 조합을 탄생시킨 배경이다.

한 매체에 따르면 전국 판사의 1인당 한 해 사건 처리건수는 579건(2013년 기준)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간단하다. 판사도 과로사하는 시대라는 것. 대한민국에서 판사가 되려면 영재에다 모범생이어야 한다. 이런 코스를 밟아 최상의 정규직에 진입했으면 남들보다 ‘잘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헌데, 과로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판사는 공직이라서 그렇다 치고 의사는 또 어떤가. 페이닥터의 고달픔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운이 좋아 병원을 차린 경우도 대개는 경영난에 허덕인다. 한 해 동안 폐업이 가장 많은 직종이 병원이라고 하지 않는가. 증권맨이나 금융인의 상황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내 주변의 상류층은 주로 교수다. 교수가 된 다음에 경제적, 학문적으로 더 여유로워진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더 팍팍해졌을뿐더러 웬일인지 다들 부채에 허덕인다. 이게 진정, 성공의 실체인가? 수많은 경쟁률을 뚫고 거기까지 올라갔으면 남들보다 훨씬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모든 노동은 소외다!


▎찰리 채플린이 감독, 주연한 영화 <모던 타임즈>. 자본제 하의 공장 노동에 삶 전체를 완전히 빼앗긴 서글픈 노동자의 일상을 풍자했다. / 사진·중앙포토
화폐가 무능한 건 그 지점이다. 살아있는 한 누구나 일을 한다. 한 드라마의 대사처럼, 살아 있으면 ‘뭐라도 해야 하는’ 거다. 거기에는 일과 몸, 일과 날, 일과 인생 등이 파동처럼 연결되어 있다. 화폐는 그 연결고리를 싹둑! 잘라버린다. 죽도록 노동에 헌신하게 하고 그 대가로 상품과 쾌락의 황홀경을 선사한다. 해서, 일을 하면 할수록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실상이 이렇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상류층과 하층민의 차이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하여, 들뢰즈/가따리는 말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계급은 오직 하나, 부르주아뿐이라고. 그때 부르주아는 “비길 데 없는 노예상태, 전례 없는 종속”을 설정한다. “더 이상 주인조차 없으며, 지금은 다만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하는 노예들만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밖에서 동물에게 짐을 지울 필요가 없으며, 동물 스스로 짐을 진다. …부르주아는 자기의 향유와 아무 관련도 없는 목적들을 위해 잉여가치를 흡수한다.”(<안티 오이디푸스>)

더 중요한 건 이런 배치 하에서라면 계급을 넘어 어떤 노동도 삶의 진면목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직종이 뭐건 연봉과 연금이 얼마건 간에. ‘잃은 것은 충만함이고, 얻은 것은 화폐뿐’인 직업, 거기에 인생을 올인하는 한, 우리 시대 모든 노동은 소외다!

주지하듯 산업혁명 이후 노동은 분업화, 파편화되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잘 보여주듯, 현대인에게 노동이란 부속품을 만드는 것에 한정된다. 동시에 중세의 도제제도에서와 같은 완제품의 창조라는 정신적 만족이 사라진다. 이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분업을 선택한 건 대량생산을 위해서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은 노동의 소외를 숙명처럼 감수하게 되었다. 이제 노동은 오직 노동시간과 임금의 관계로 환원된다. 일한 만큼 받는 것이 소외의 극복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넌센스다. 거기에는 노동자의 신체성, 그리고 창조적 기쁨에 대한 고려가 생략되었다. 체질이 다르듯이 일에 대한 감각이나 만족감도 다 다르다. 그것을 균질화하여 동일한 부속품을 만들게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소외다.

디지털은 그나마 육체노동의 회로마저 지워버렸다. 터치 아니면 파일 작성이 대부분이다. 육체노동의 고단함에서 해방되었지만, 이제는 거꾸로 육체적 에너지를 발산할 장이 없다는 모순에 직면했다. 과로해서 기진맥진하는 것도 문제지만 기운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저녁을 맞이하는 것도 문제다. 과격한 회식과 쇼핑이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하루 종일 터치만 하면서, 또 서류작성만 하면서 삶을 긍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정보화가 가속화되면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이 소외는 CEO에서 알바생까지 다 겪어야 하는 시대적 숙명이다. 1980년대엔 노동해방의 기준이 노동시간의 단축과 주5일제였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노동자는 자기 삶을 창조적으로 영위하리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임금격차도 문제지만, 일과 신체, 일과 삶의 불일치라는 근원적 소외가 더더욱 심화된 탓이다.

게다가 현대의 상품은 거의 다 시장을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욕망을 과도하게 끌어내야만 한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필요하지 않은데 파는 것을 서비스업이라고 한다.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되면 계속 사람을 속여야 한다. 속이는 정도가 아니라 현혹시켜야 한다. 이것을 감정노동이라고 한다. 감정노동은 착취의 더 심오한 단계에 해당한다. 남을 속이면서, 아니 자신의 영혼을 기만하면서 잘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디지털은 백수를 갈망한다!


▎연암 박지원의 초상. 연암은 평생 백수의 삶을 지향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앞으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면 대부분의 노동은 기계가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럼 이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나? 구경꾼이 되거나 소비자가 되거나! 기계화와 더불어 덮쳐오는 쓰나미가 또 하나 있다. 여러 번 언급했듯이 저출산이 그것이다. ‘인구란 기업에는 시장 그 자체이며, 이익의 원천이다. 인구감소는 시장의 축소를 뜻한다. 인류는 역사상 한 번도 그 같은 사태를 경험하지 못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다음 한 세기 동안 주식회사라는 존재는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될지도 모른다.’(히라카와 카쓰미, <소비를 그만두다> 참조) 주식회사가 사라질 정도면 다른 직업군이야 말해 무엇하랴! 이미 50대 명퇴자들은 차고 넘친다. 이들은 향후 20~30년을 백수로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디지털은 유동한다. 이 유동성은 물질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 또한 사방으로 흘러간다. 일자리 창출이 시대정신이라고 외치지만 이직률은 엄청나다. 이건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이제 하나의 직장, 한 가지 노동에 머무르는 시대는 지났다는 사실이다. 결국 디지털은 직업과 비직업의 경계조차 지워버릴 것이다. 이 말은 백수가 모든 사람의 실존적 상태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디지털로 인해 직업이 해체되는 흐름과 직업의 궤도에서 기꺼이 일탈하고자 하는 흐름. 이 시대적 ‘파도타기’에서 추방과 탈주를 분별해내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디지털은 백수를 갈망한다!’는 것.

1. “나는 감옥 독방에서 노동시간 제로인 나날도 많이 보냈습니다. 창살 밖으로 봄볕을 받은 마당에 파릇파릇 봄 싹들이 돋아나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호미 들고 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장자의 신생(神生)입니다.”(신영복, <담론>)

2.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코뮌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마르크스, <독일이데올로기>)

3. 일본의 중세인 에도시대의 경우, 순수한 에도 토박이는 대부분 일자리를 가지지 않고 있었고, 기혼자조차 생계가 곤란해지면 장작패기 등을 해서 하루 일당을 벌며 지냈다. 게이오 3년에 미야마스 거리에서 세대주의 직업을 조사했는데, 172명 중 69명인 40%가 일용직, 즉 프리타였다. 사무라이들의 근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그럼에도 문화생활은 충분히 누렸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두막집일망정 월세가 목수의 일당 정도이고, 서당 수업료도 일당의 3분의 1 정도였기 때문이다. (요시다 타로, <몰락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참조)

모든 노동이 소외라면, 누구든 이 소외와의 전투를 벌여야 한다. 척도는 간단하다. ‘생명의 존재형식’으로서의 노동이 그것이다. 마르크스가 꿈꾼 노동해방도 이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평생 하나의 직종에 종사하면서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낚시와 목축, 비평과 사냥을 매끄럽게 넘나들 수 있는 유동성! 에도시대의 프리타나 사무라이들이 누렸던 자유도 마찬가지다. 자율성과 능동성, 이것이 노동해방의 전제조건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은 백수뿐이다. 기업가도 정규직도 불가능하다. 복지정책, 분배정의로도 불가능하다.

핵심은 노동에 대한 표상의 전복이다. 죽도록 일해서, 혹은 남들보다 폼 나는 일을 해서 더 많은 화폐로 보상받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과로사 아니면 공황장애, 나아가 인격파탄에 이르는 코스다. 그것이 어찌 해방이고 혁명일 수 있으랴. 고로 이제 노동은 생명의 차원에서 다시 규정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비전과 에도 시대의 프리타를 넘어 장자의 ‘신생’을 구현하는 것, 인류에게 남은 최후의 혁명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주체는 백수다. 고로 백수는 미래다!

처음 교수임용을 포기하고 백수의 길로 들어설 즈음, 나 자신에게 물었다. 왜 교수가 되고 싶은가? 물론 교수라는 직업이 주는 소속감이나 안정감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포말에 불과하다. 핵심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하고 싶어서다. 그것이 나의 ‘신생’이다. 그렇다면 이 활동과 관계가 가능하다면 굳이 교수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그 섬광 같은 깨달음이 나로 하여금 ‘지식인공동체’라는 길 위로 나서게 해주었다. 돈을 비롯하여 기타 다른 문제는 그 다음에 풀어가면 된다. 대개는 거꾸로 생각한다. 일단 지위와 연봉이 해결되어야 삶의 비전을 탐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그런 케이스는 거의 보지 못했다. 돈과 지위가 해결되면 그 다음엔 거기에서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된다. 더 많이! 더 높이!

그게 바로 자본의 포획장치다. ‘삶과 생명’이라는 근원적 척도를 망각하게끔 유도하는. 백수의 계보학 혹은 인류학적 탐사가 필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백수의 원조는 공자다. 공자는 50대 중반 주유천하에 나섰다. 취업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를 채용해주지 않았다. 결국 노년백수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한편, 또 다른 스승인 붓다는 왕자로 태어났으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처지건만 기어코 왕궁을 떠나 탁발하는 수행자가 되었다. 공자가 타의에 의한 백수라면 붓다는 자발적 백수에 해당한다. 노자야 뭐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유불도(儒佛道) ‘삼교회통’의 이치를 연마했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 역시 비슷한 코스를 밟았다. 조선의 경우, 농암 김창협과 성호 이익을 비롯하여 그 후배격인 ‘연암그룹’은 명실상부 ‘백수지성의 향연’이었다.(길진숙, <18세기 백수지성 탐사> 참조) 18세기가 조선의 르네상스가 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들로 인해서다. 서구 지성의 원조인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에피쿠로스 등도 다 마찬가지다.(자세한 내용은 고미숙, <길 위의 인문학>을 참조할 것)

노동, 생명의 존재형식


▎최근 개봉된 영화 <스티브 잡스>. 잡스는 생전에 “창조는 연결”이란 지론을 설파했다. / 사진·중앙포토
그럼 이들은 대체 왜 그런 길을 갔던가? 무능해서? 아니면 시대와 불화해서? 아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수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삶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지금 이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도 우리는 잘나가는 정규직이 아니라 ‘길 위의 현자’들을 멘토로 삼는다. 그거야말로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가 결국은 정규직이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해서 우리 공동체(남산강학원&감이당)의 비전은 백수다. 청년백수를 위한 ‘공자 프로젝트’(‘공부하며 자립하기’의 준말이자 ‘공자-되기’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를 특별히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정규직에 20~30년 있었던 사람도, 회사를 경영하던 사람도 자기 직업에 만족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니 직업을 통해 자기구원 같은 문제를 사유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참 이상한 노릇이다. 인간이 왜 그렇게 소심하게, 마지못해 살아야 하는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수동적 정념은 타인의 본성에 대한 증오, 그리고 자기본성에 대한 증오, 결국 삶 전체에 대한 증오를 초래한다.” 정말 그렇다. 그렇게 살면 결국엔 우울증과 냉소에 빠지고 만다. 그러니 나처럼 살라고, 나 같은 직업을 가지면 인생만사를 통찰할 수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으랴.

하지만, 나는 감이당에 오는 학인들에게 말할 수 있다. 정규직에 집착하지 말고 백수로 살아가라고. 인간에게 그 이상의 선택은 없다고. 왜? 백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니까.

백수의 생존전략? 의역학과 글쓰기


▎경북 칠곡군 금남리 마을에서 열린 인문학 축제. 주민이 주도하는 평생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필자도 고향 강원도 함백에서 ‘마을인문학’을 실험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명명했다. 그 순간 노동자는 혁명의 주체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런 전이가 일어나려면 먼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어야 한다. 그럼 지금 백수가 자유인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역시 읽어야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장자>, 니체와 스피노자, 그리고 들뢰즈/가따리 등등. 조르바는 조국과 신, 혁명의 가치로부터 탈주했고, 자신 이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그가 도달한 두려움과 충동으로부터의 자유는 백수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또 백수는 물질적 욕망을 조율하면서 자신을 돌보는 능력, 곧 자기 배려의 윤리가 필요하다. “평탄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행복이고 분에 넘쳐서 남아돌아가는 생활은 생명을 해치는 짓이다. 그중에서도 재물이 가장 심하다. 지금 부유한 자는 귀로는 종소리, 북소리, 피리소리를 즐기고 입으로는 맛있는 고기와 술을 실컷 먹으며 자기의 정욕을 만족시키면서 한쪽으로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잊고 있지만 이는 어지럽다고 할 만하다.” (장자, ‘도척(盜跖)’) 이런 장자식 양생술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스피노자의 <에티카>, 혹은 들뢰즈/가따리의 <노마디즘>을 연결해보라. 노동과 화폐의 표상으로부터 가뿐히 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텍스트들은 출발에 불과하다. 세상은 넓고 고전의 세계는 무궁하다! 백수가 자유인으로 서기 위해선 이 지성의 매트릭스에 접속해야 한다. 특히 동양의역학은 ‘삶의 기예’를 익히는 데는 최고다. 양생과 수행, 이것이 결합하면 운명의 ‘지도 그리기’가 가능하다. 자기 몸을 스스로 챙길 수 있고, 길흉화복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실용적인 테크닉이 있을까. 또 하나 백수는 길 위의 존재다. 늘 낯선 존재들과 마주쳐야 한다. 이 마주침에 꼭 필요한 건 돈과 스펙이 아니라 인생의 지혜다. 의학과 역학은 질병과 번뇌라는 삶의 보편적 문제를 다룬다. 몸과 우주, 신체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누구와도 벗이 될 수 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백수의 지상과제인 경제적 자립이 그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생산력은 창조와 연결(공유)에 달려 있다. “창조는 연결이다.”(스티브 잡스) 생산수단은 인터넷이다. 하여,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누구나 생산수단을 전유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제 남는 것은 창조자냐 소비자냐의 구별뿐이다! 자본에 매이지 않고도 창조가 가능한 노동으론 글쓰기가 최고다. 글쓰기는 소통과 순환의 최고형식이다. 언어를 질료로 삼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수많은 매체가 범람하지 않는가. 심지어 개인이 언제든 매체를 만들 수도 있다. 게다가 생산수단은 노트북 하나면 충분하다. 수많은 책에 둘러싸일 필요도, 두꺼운 원고지도 필요하지 않다. 노트북 하나면 검색과 생산, 유통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 그런데 왜 대학은 청년들에게 글쓰기를 훈련시키지 않을까? 글쓰기가 지성의 절정이자 자립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왜 가르쳐주지 않을까? 더 심각한 건 이런 교육적 모순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 좌파도 우파도.

또 하나. 글쓰기는 경제활동이면서 수행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창조와 연결이라는 활동의 귀환처는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이다. 글쓰기는 이런 원운동을 생산의 동력으로 삼는다. 다른 활동과 직업은 굉장히 멀리 돌아서 자기에게로 간다.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이미 늦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든 노동이 소외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선 매순간 자신과 직면해야 한다.(물론 그렇지 않은 글쓰기도 있다. 예를 들면, 영화나 드라마 작가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대신 자본에 예속되어야 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믿지도, 원하지도 않는 인간군상을 계속 그려내야 한다면 그 노동은 전적으로 소외다.) 노동과 수행의 일치! 직업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다.

나아가 백수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직업을 만드는 존재여야 한다. 혹은 직업과 직업 사이를 경쾌하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식의 리듬을 탈 수 있는 노동으로 글쓰기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백수의 지평선, 우정과 로고스

길은 가면서 만들어지는 법, 가다 보면 다른 길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중요한 건 계속 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지평선이 필요하다. 지평선은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달려감 자체가 목적이다. 지평선이라는 비전과 달려감이라는 행동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길이다.

사람들이 백수를 두려워하는 건 노후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종 매체에서 고령화와 노인빈곤에 대한 담론이 쉬지 않고 쏟아진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노후대책은 화폐만으론 절대 불가능하다. 반드시 관계망이 있어야 한다. 삶이란 ‘관계와 활동’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라.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사실 정년백수가 더 힘들다. 오랫동안 조직 안에 있다 보면 생각과 신체의 회로가 굳어지게 마련이다. 정년을 할 때쯤이면 이미 가족도 친지도 다 흩어졌다. 이때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좋은 아파트와 연금보험이 있으면 가능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때 가장 두려운 건 고립과 단절이다.

결국 핵심은 ‘마음 둘 곳’이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길, 그것이 곧 우정이고 로고스다. 우정이 사람을 연결하는 끈이라면, 로고스는 마음을 잇는 파동이다. 사람과 마음을 연결하려면 반드시 진리탐구라는 지평선이 필요하다. 함께 먹고 마시고 인생과 우주를 논하는 것, 수많은 현자가 증언했듯이 이것은 노년이 연출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많은 돈이 필요하지도 않다. 소비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혈연과 서열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니 노후가 걱정된다면 지금 당장! 우정의 윤리를 연마하고 로고스적 열정을 이끌어내는 훈련에 돌입하라!

그리고 사람이 움직이면 저절로 공유경제가 살아난다. 공유경제의 핵심은 사유재산을 침탈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와 공적 자산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물질적 부가 흘러갈 수 있는 다채로운 경로를 탐색하는데 있다. 그 메신저는 결국 사람일 수밖에 없다. 사람이 움직이면 돈도 함께 흐른다.

처음 백수였을 때는 돈이 없었다. 방법은 소비를 줄이는 것뿐! 지난 15년간의 실험 끝에 알게 된 사실 하나. 소비에서 해방되면 도심 한가운데서도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것. 더 중요한 건 불안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불안은 가난이 아니라 소비에 대한 집착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2008년 이후 인문학 붐이 일면서 돈이 좀 생겼다. 글쓰기가 자립을 넘어 증여의 기회를 선사한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실험은 두 가지다. 청년백수를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와 ‘투자’ 전문회사. 전자는 청년들에게 ‘국경을 넘어’ 우정과 지성을 연마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고, 후자는 오직 ‘투자만 하고 이윤은 제로’인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현재는 폐광촌이 된 내 고향 강원도 함백에 ‘마을인문학’을 실험하는 중이다. 뭐가 됐건 핵심은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동안 갈고 닦은 인생의 지평선이다. 죽는 순간까지 나를 쉬임 없이 달려가게 하는! 중구난방, 횡설수설의 여정에 동행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연재를 마친다.

고미숙 - 고전평론가.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작은 광산촌에서 자랐다. 고려대학교에서 고전시가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감이당&남산강학원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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