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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사>뉴요커가 바라본 미국 대선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6-04-04 09:24
조회 : 1,722  

[통신원 리포트] 뉴요커가 바라본 미국 대선 

“그 어떤 대통령도 내 인생 바꿀 수 없다” 

글·사진 김해완 뉴욕 통신원 godhks1210@gmail.com

힐러리는 역겨울 정도로 계산적인 ‘준비된 대통령’… 트럼프 인기는 미국이 과거로부터 진보하지 못했다는 진실 보여줘
뉴요커는 미국 대선의 숨막히는 각본에 분노한다. 그 분노를 무관심으로 표출한다. 트럼프를 두둔하며 “마지막에 남는 건 정치가 아니라 휴머니티”라고 말하는 뉴요커도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정치를 불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누가 당선되든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보겠다는 의지다. 무심한 듯 침착한 듯 전체를 응시하는 뉴요커의 정치관이 무섭다.


▎미국의 문화적, 경제적 수도라 할 도시 뉴욕. 과연 뉴욕의 민심은 어느 대선 후보를 향해 있을까?
슈퍼 화요일이 지나갔다. 세계 최강국의 최고 지도자를 뽑는 대단한 행사가 드디어 막을 올렸다. 매일 아침마다 뉴욕 신문 1면에는 트럼프, 크루즈, 힐러리, 샌더스의 얼굴이 번갈아 등장한다. 어느 나라의 조간신문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긴장감은 11월까지 다달이 이어진다. 2월에는 아이오와 정당 대회와 뉴햄프셔 예비 경선, 3월에는 슈퍼 화요일(Super Tuesday), 4월, 5월, 6월까지 대기하고 있는 예비선거….

그런데 이상하다. 시끄럽게 떠드는 언론과 달리, 뉴욕 안에서는 사람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잠잠하다. 아직 뉴욕 주의 예비선거가 치러지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대통령 예비선거에는 유권자가 없는 것일까? 의문을 풀기 위해 지난 한 달 동안 열다섯 명에 이르는 뉴욕 사람을 짧게 인터뷰했다. 영어 교사, 대학생, 식당 아줌마, 주부, 박물관 큐레이터, 길거리의 아무개 행인까지 다양한 사람과 만나보았다. 모두 미국 시민권을 소지한 유권자였다. 그러나 이들도 인터뷰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미국을 떠날 거라는 식으로 농담하고,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마치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지의 여부가 ‘오늘 아침에도 뉴욕 지하철이 말썽을 부릴까’의 여부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대선 버라이어티쇼와 양당 정치의 위기


▎귀여운 모습의 샌더스 인형을 끌어안고 즐거워하는 여성 지지자들. 대선 후보들을 알리는 참신한 선전물을 많이 볼 수 있다.
원래 미국이라는 나라는 정치에 무관심하다고들 한다. 평균 투표율이 50%안팎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을 당선시킨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64.1%였다. 전체 판에 따라서 사람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게다가, 여기는 세계의 수도 뉴욕이다. 감히 말하건대 뉴욕은 미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도시다. 온갖 인종과 민족이 뒤섞인 미국의 용광로, 극빈층과 극부층이 적나라하게 공존하는 미국의 민낯이다. 이런 곳에서 일상을 보내다 보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차별 관계에 자연스레 민감해진다. 또, 뉴욕에서는 자기 의견을 강직하게 주장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토박이 뉴요커’란 (대다수의 미국인과는 달리) 세상일에 깨어 있는 사람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자기 나라 대통령 선거에는 이토록 무심하다니!

한 번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무실 상사에게 이렇게 대선에 무관심해도 되는 거냐고 질책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냐. 어쨌든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쇼니까.”

상사의 농담에는 뼈가 있다. 미 언론이 ‘대선’을 조명하는 방식은 오락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1년짜리 TV 버라이어티 쇼처럼 말이다. 이 오락성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사람들이 시선을 쉽게 돌려버리는 이유다. 쇼는 관객과 무대 사이의 거리를 늘 전제로 한다. 쇼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관객은 늘 ‘관객’으로 대상화된다.

지금까지 이 대선 ‘TV 쇼’가 보여준 것은 토론도, 공약도, 정치 철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양당에 찾아온 위기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바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민주당 후보 버니 샌더스다. 이 두 후보는 탈선의 아이콘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에 각각 소속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당의 정통적인 노선에서 크게 엇나가 있다. 일단 트럼프의 기본 캐릭터는 정치인이 아니라 기업인이다. 90년대부터 공화당과 민주당 양쪽 모두에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번에는 대선 후보로 나서면서 각종 인종 차별적인 ‘막말’로 파장을 일으키는 중이다. 샌더스는 또 어떤가. 그는 30년 이상 무소속 정당의 길을 걸어왔던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월가 자본을 만인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99%를 위한 사회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한 명은 미국에서 여전히 인종차별주의를 말하고, 다른 한 명은 미국에서 감히 사회주의를 내세운다.

그런데 이 돌출된 인물들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둘의 반시대적인(?) 노선은 지난해 후반부터 급격한 조명을 받았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아메리카를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문구가 박힌 모자를 쓰고 출몰했고, 대기업의 후원을 일체 거부한 샌더스 캠페인에는 소규모 기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난감해진 쪽은 민주당과 공화당이다. 양당 정치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이다. 그런데 참으로 ‘양당적이지 않은’ 후보들이 활개를 치고 있으니, 이러다가 당 정체성을 통째로 잃어버리게 생겼다. 이 상황에서 당을 사수하기 위해 총대를 잡은 후보가 바로 공화당의 테드 크루즈,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다. 특히 민주당의 힐러리 사랑은 아주 노골적이다. 지금까지 민주당원들은 샌더스에게 적지 않은 선언 대의원(Pledged Delegate)을 안겨주었다. 그러자 당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슈퍼 대의원(Super Delegate)들, 즉 민주당 국회의원과 간부들은 힐러리에게 ‘몰표’를 주려고 대기 중이다. 현재 486명의 민주당 의원 중에서 단 25명만이 샌더스를 지지하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대선 드라마는 양당의 ‘적자(嫡子) 대 서자(庶子)’의 대결구도다. 지난 슈퍼 화요일 이후, 트럼프는 크루즈에게서 1위 자리를 지켜내고 있고 샌더스는 힐러리에게 크게 뒤졌다. 이제 언론은 ‘트럼프 대 힐러리’ 대세론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트럼프만은 안 된다”


▎미드 타운의 5번가 명품숍 거리에 위치한 트럼프 타워는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다. 뉴욕시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지만 트럼프가 대선에 출마한 뒤 더욱 유명세를 탔다.
뉴요커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 역전의 드라마 주인공들이 모두 뉴욕 출신이다. 한 명은 부동산 집안에서 태어난 금수저 출신으로, 현재 맨해튼의 노른자 땅에 트럼프 타워(Trump Tower)를 소유한 백만장자다. 또 다른 한 명은 넉넉지 않은 브루클린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에 진학한 자수성가형 엘리트다.

‘트럼프만은 절대로 안 된다.’ 이것이 뉴욕 사람들 대다수가 공통으로 보이는 의견이다. 뉴욕에 사는 이민자들이 부유한 백인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다. 뉴욕 인구 4분의 1이 스페인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남미계 이민자가 많은데, 거기에 대고 “멕시코와의 국경 장벽을 10피트 더 올리자”는 말을 했으니 결과야 뻔하다. 이슬람 커뮤니티 역시 “이슬람 사람들은 입국 금지시켜야 한다”는 발언에 분개하면서 트럼프를 보이콧하는 다양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게다가 뉴욕은 교육열이 뜨거운 도시다. 많은 사람이 유치원 수준의 어휘로 남을 비방하는 트럼프의 무식함을 참을 수 없어 한다. 자연사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L은 트럼프의 무식한 표정(?)을 매일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 자체가 고문이기 때문에 그가 결코 당선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뉴욕 공화당 지지자들조차 이 뉴욕 출신 금수저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버팔로 뉴스(The Buffalo News)는 3월 7일에 트럼프 지지율이 뉴욕시에서 크루즈보다 20% 앞서고 있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발표했다. 트럼프는 뉴욕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존재감이 약한 것은 단지 공화당 지지자가 뉴욕시 전체 인구의 8분의 1밖에 되지 않고, 또 인종차별주의를 지양하는 뉴욕의 특수성 때문이다.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샌더스를 향한 뜨거운 지지다. 뉴욕시 내에서 힐러리와 샌더스의 지지율을 직접 비교한 자료는 현재 없다. 뉴욕주의 경향에 따라 힐러리 지지자가 더 많을 것으로 추측만 되고 있다. (버팔로 뉴스에 따르면 뉴욕 주의 55%가 힐러리를, 34%가 샌더스를 지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샌더스를 향한 마음은 힐러리보다 훨씬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국가가 등록금을 부담해야 하며 최저 임금은 15달러여야 한다는 샌더스의 주장이 생활고에 허덕이는 뉴욕 청년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얻은 것이다. 지난달 샌더스 지지자의 행진은 브로드웨이를 따라 두 번이나 진행됐다.

이런 마음이 표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 중 다수가 샌더스와 트럼프가 대통령 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그는 더 이상 쇼를 하지 못하고 공화당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샌더스가 대통령이 되면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다가 양당의 협조를 받지 못해 고립될 것이다, 기타 등등. 힐러리만 이런 우려에서 제외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그녀가 대통령 맞춤형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힐러리는 제도에 완벽히 적응한, 개성 없는 인간형인 것이다. 식당 아줌마 C는 말했다. “나는 힐러리에게 투표할 것이다. 그녀는 대통령이 되면 잘할 것이다. 역겨울 정도로 계산적이기 때문이다.” 이건 칭찬일까 욕일까? 샌더스와 트럼프가 싸우는 사이에 최종 승자는 그녀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숫자 아래 가려진 대표적인 반응이 있다. 바로 뉴욕 유권자들의 무반응이다. 정치는 일상을 배제시킨다. 혹은, 일상이 일부러 정치를 배제시킨다. 사람들의 잡담과 잡담 사이에는 선거에 대한 ‘내키지 않는’ 표정이 숨어 있다. 이런 무반응을 정치 일반에 대한 무관심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무반응은 반응을 아직 안 한 수동적 상태일 뿐만 아니라, 일부러 반응하지 않기로 결심한 의사표현이기도 하다.

진부한 예비선거, ‘무반응’ 고착화


▎2월 27일, 유니온 스퀘어(Union Square)에서 열린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의 행진. 추운 날씨인데도 브로드웨이를 따라 젊은 사람들이 행렬이 길어졌다.
쇼 뒤에 가려진 진짜 현실은 이렇다. 지지율이 어떻든 간에 전체 대선 판에는 별 영향을 못 준다. 선거 제도가 개개인이 던지는 ‘한 표’의 영향력을 조직적으로 차단한다.

일단 많은 자가 예비선거 때 투표도 하지 못한다.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원으로 등록하면 그만 아니냐고 대꾸할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당원 활동을 병행할 만큼 생활에 여유가 없을 수도 있고, 양당의 정당 활동이 너무 진부하여 반응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뉴욕은 다양성의 도시다. 환경 문제나 성적 소수자 문제, 인종 차별 문제처럼 특수한 주제에서부터 정치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이 왜 없겠는가? 문제는 양당 말고는 투표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 가족당(Working Family Party)을 지지한다는 글쓰기 강사 S는 자기 당이 단 한 석도 국회에서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거마다 민주당을 찍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민주당은 너무나 망가졌다. 그건 민주당 지지자도 동의할 것이다.” 양당제도가 뿌리 박혀 있는 미국에서는 조지 워싱턴이 처음이자 마지막 제3정당 출신 대통령이라고 불린다. 제3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손발이 묶인다. 후보를 선출하지 못할 약소 정당을 지지하느라, 거대 정당의 후보를 선택할 기회를 잃는다.

본선에서 적용될 승자독식 제도 역시 의욕을 꺾는다. 승자 독식 제도란 어떤 주에서 1%라도 지지율이 높은 당이 그 주의 선거인단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다. 가령, 텍사스 주 인구의 49%가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고 51%가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다면, 그 1%의 차이 때문에 텍사스 선거인단은 무조건 공화당 후보를 찍어줘야 한다. 참 화끈한 배팅(?) 방식 아닌가. 과반이 아니라고 해서 49%의 표심을 한순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들다니, ‘민주주의’라는 이념으로 이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비판은 뉴욕처럼 정치색이 뚜렷한 경우에 특히 유효하다. 가령, 뉴욕시립대 학생 M은 힐러리를 몹시 싫어한다. 힐러리가 민주당 후보로 당선된다면 그는 차라리 트럼프를 찍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이 시점에 힐러리는 샌더스보다 3분의 1가량 더 많은 선언 대의원을 모았다. 그러니 M이 정말로 트럼프를 찍는 순간 그의 표는 대선판에서 순식간에 ‘소거될’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가 늘 과반을 넘는 뉴욕주는 항상 민주당 후보에게 할당된 표를 모두 넘겨주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뉴욕에 산다. 민주당을 지지한다. (혹은 민주당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당의 후보를 뽑는데 결정권을 행사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누가 후보로 뽑히든 뉴욕 주의 선거인단은 결국 민주당이 가져가게 될 것이다. 비유하자면, 선거라는 쇼에서 내가 참여하게 될 씬의 시나리오가 이미 짜여 있는 셈이다. 내가 투표를 하든 안 하든, 결말은 변치 않는다. 그렇다면 선거를 왜 하고, 정치에 왜 반응하나?

J는 뉴욕에 거주한 지 30년째인 영어 교사다. 그는 대선 때마다 투표를 했다. 그러나 그 세월은 시민으로서 행한 일종의 상징적 행위였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내 표가 가치 없게 느껴진다. 내가 텍사스까지 굳이 가서 민주당을 찍지 않는 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모델이라 칭송받는 미국의 국민이, 그것도 세계에서 제일 대단하다는 도시에 사는 뉴욕인이, 자신의 표가 무려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선거가 권태로운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다. 즉, 선택할만한 후보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다. 정치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고 고민이 깊어져도, 정작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언제나 “엄마가 좋아, 아니면 아빠가 좋아?” 수준의 양자택일이라는 게 문제다.

침묵하는 것은 뉴욕이 아니라 ‘표’다


▎트럼프 타워에서 일하는 한 멕시코 청년이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찍은 사진 작품. 멕시코 국기를 배경으로 “범죄자가 아니다, 마약거래상이 아니다, 강간범이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제도에 속한 이상, 표는 사람의 마음을 담아내지 못한다. 선거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신성한 의식(儀式)으로 대접받아왔다. 하지만 상징성이 아니라 실용성을 따져보자. 그 어떤 대의명분도 제도가 되는 순간 생생한 현장에서 괴리된다. 시스템은 결국 시스템 자체를 반영하게 된다. 선거 제도라고 예외는 아니다. 특히 요즘 같은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무조건 양으로 승부하려는 선거는 좀 촌스러운 소통법이다. 1인 당 1표라는 공식은 개개인의 입장을 균질화시킨다. 지지율은 애초에 ‘지지하느냐 아니냐’, ‘우파냐 좌파냐’라는 대답을 강요함으로써만 예측되는 숫자다. 숫자야 정확하게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 양극 사이에 버라이어티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의 감정, 욕망, 이익계산은 모두 증발할 것이다. 입력되는 동영상은 풀 HD 해상도의 고퀄리티인데 정작 출력되는 화면은 80년대 텔레비전 흑백 화면인 셈이다. 표와 마음 사이의 거리는 뉴욕의 낡은 아파트에서 백악관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고로 선거는 본래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 행사다. 권태를 감소시키려면 선거의 제도적 한계를 깨트리려 노력해야 한다. 다양한 욕망과 제안을 공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표에 표현의 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반대로 ‘누가 당선되느냐’에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권태는 더 심해진다. 이것이 쇼가 감추고 있는 폭력성이다. 예비선거라는 쇼는 각각의 후보를 화려하게 조명하면서 1년 내내 명령한다. ‘이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라,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런 상황에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짖는다면? 통할 리가 없다. 분위기만 썰렁해진다. 세상일에 깨어있는 ‘토박이 뉴욕인’들은 알고 있다. 뉴욕이 침묵하는 게 아니다. 뉴욕에 할당된 표가 침묵을 종용하는 것이다.

이 침묵을 이해하면 양당의 위기 드라마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도대체 왜 샌더스와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서 가장 ‘핫한’ 검색어가 되었을까? 트럼프와 샌더스의 정치 노선은 생각보다 새롭지 않다. 이들의 정체는 양당의 매너리즘을 역이용해 자기 존재감을 확보하는, 이른바 ‘돌출 정치’라고 봐야 한다.

트럼프는 논리가 없는 사람이다. 공식 인터뷰에서도 늘 질문에 대답을 못한 채 횡설수설한다. 이 어설픔을 감추기 위해 그가 활용하는 무기는 두 가지, 공포와 쇼맨십이다. 그는 사람들의 공포를 말초적으로 자극한다. 불법이민자 멕시코인, 테러리스트 중동인, 미국 국방비에 기생하는 한국인, 혹은 무엇이라도 ‘미국’을 공격하는 실체 없는 적을 계속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파시스트적인 언행을 오락이라는 형식으로 용서받으려 한다. 그의 저질스러운 언행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모두 계산된 것이다.

반대로, 샌더스는 정치 논리가 너무 일관되어서 시야가 좁다는 느낌을 준다. 그가 주장하는 ‘혁명’은 경제 분야에만 집중적으로 쏠려 있다. 1%를 위한 자본주의를 멈추고 부를 공평하게 분배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샌더스가 어느 이슈든 경제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일단 부를 공평하게 분배하면 나머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처럼 들린다. 샌더스의 처방전이 계급, 인종, 젠더, 이민, 이 모든 카테고리가 복잡하게 얽힌 미국 사회의 병폐를 정말로 치유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약간 덜 진부하다는’ 이유만으로 격하게 환영받고 있다. 샌더스와 트럼프의 캐릭터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상대 당이 아니라!) 자기 당과 대치할 때다. 이 문제아들로 인해서 판에 박힌 듯 똑같았던 좌파-우파 선거 레이스가 중앙선을 넘나들며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다. 사람들은 바로 여기서 쾌감을 느낀다. 어느 쪽 차선이 더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쪽 차선도 레이서의 운전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낡았다는 것, 그 매너리즘이 문제다. 샌더스와 트럼프 신드롬은 선거를 향한 권태가 반작용한 결과다.

샌더스와 트럼프가 인기 있는 진짜 이유

반작용은 진실을 폭로하는데 좋은 방법이지만,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좋은 예다. 그는 미국 사회가 인종차별에 대해 지금까지 합의해온 기준을 모조리 무시하며, 미국 정부가 사회적 위기 때마다 그래왔듯이 소수 인종을 희생양 삼으려 한다. 즉, 트럼프의 인기는 미국이 과거로부터 진보하지 못했다는 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트럼프 자체가 투명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샌더스의 존재감은 모든 미국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샌더스가 말하는 경제론이 전부 옳은 건 아니다. 결국, 이 둘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은 단순한 ‘지지’가 아니다. 침묵 당해온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하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선거의 진부함을 고발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트럼프가 샌더스보다 선거 게임에서 더 잘해내고 있다. 이는 미국 사회의 한계이리라.)

이것이 선거 드라마 뒤에 깔린 배경이다. 적자와 서자의 극적인 대결 아래에 수많은 사람의 피로와 권태와 목마름이 바다처럼 출렁이고 있다. 미국인들은 두 후보가 변수가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 열광하는 자신들이 바로 최대 변수라는 것을 점점 인식하고 있다. 이 인식이 깔려있을 때야 비로소 예비선거가 그저 진부한 쇼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인터뷰하면서 모두에게 물어보았던 질문이 있다. 어떤 후보자가 당선되면 자기 인생 중 무엇이 가장 크게 바뀔 것 같으냐고 말이다. 대답은 너무나 인상 깊었다. 모두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뉴욕의 자립성을 보았다.

여기서 살면 하루하루가 정치다. 뉴욕의 거리 곳곳마다 수많은 욕망이 들끓고 부딪히고, 결국 사고가 터진다. 이곳에서는 좋든 싫든 타인과 부딪히면서 나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나는 동양인이며, 영어를 모국어로 쓰며, 여성이고, 시민권이 없다. 이런 조건이 마찰을 일으킬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의 대변인이 되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뉴욕에 사는 모두가 이런 치열한 일상을 보낸다. 그렇다면 어느 대통령이 당선돼도 삶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대답은, 정치를 무조건 불신한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 당선되든 내가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보겠다는 의지다. 뉴욕은 선거 앞에 침묵이 아니라 질긴 생명력으로 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생명력은 창의적인 정치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뉴욕 사람은 심리상담가 P였다. P는 누구보다 야심만만한 정치 노선을 실천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역겨운 인종차별주의자야. 하지만 모든 정치인은 어차피 인종차별주의자거든. 내가 이번 선거에서 할 수 있는 정치적인 행동은, 트럼프 같은 정치인도 한 명의 인간으로 인정해주는 거야. 어차피 다들 죽으면 다 흙으로 갈 인간들이니까. (벌써 69세니까 살 날도 얼마 안 남았지?) 그런 게 휴머니티야. 마지막에 남는 건 정치가 아니라 휴머니티라고.” 이런 휴머니티와 신선함이 실제 정치판에서 보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까? 글쎄, 한 번 보자. 2016년이 끝날 때까지. 가십거리를 쫓는 TV쇼가 아니라, 무심한 듯 침착한 듯 전체를 응시하는 뉴욕의 시선을 따라가보자.

김해완 - 고등학교 재학 중 학교를 나와 공부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서 생활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가방끈은 짧지만 공부복은 많다. 2년 전에는 예상치 못하게 ‘세계의 수도’ 뉴욕 한복판에 떨어졌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배움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는 중이다. 쓴 책으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그린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북드라망),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작은길, 출간 예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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