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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사>[통신원 리포트] 쓰레기는 소비의 성지(聖地)를 움직이는 동력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6-05-04 09:43
조회 : 1,749  

[통신원 리포트] 쓰레기는 소비의 성지(聖地)를 움직이는 동력 

“뉴욕의 화신이나, 지속은 불가능하다” 

글·사진 김해완 뉴욕 통신원 godhks1210@gmail.com

더 많이, 더 빨리, 더 다양하게, 더 무자비게 쓰레기를 만드는 공동체…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가느냐를 생각할 때

▎뉴욕에서 제일 유명한 백화점 메이시스(Macy’s). 그러나 ‘백화점’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안쪽으로 들어가면 온갖 옷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보지 않았어도 가본 것처럼 느껴지는 곳들이 있다. 뉴욕이 대표적이다. 얼마나 많은 영화, 드라마, 뉴스가 이 아름다운 도시를 담았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깔끔한 영상 편집에 속았던가? 한번 맨 몸으로 맨해튼을 걸어보라. 뉴욕은 참 더럽다. 생각보다 더럽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더럽다. ‘모던 도시’에 대한 매끈한 표상들은 엽기적인 현장 앞에서 하나씩 와해된다. 맥도날드 바로 앞 골목길에 한 무더기 쌓인 쓰레기 봉지.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채 구정물을 튀기고 가는 버스. 노숙자들이 정기모임을 갖는 악취나는 공공도서관. 거기에 지하철 승강장과 선로에서 뛰어오는 쥐까지…. 5년 전에 내가 살았던 서울 남산의 해방촌 달동네가 이것보다 훨씬 깨끗했다!

아, 그렇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뉴욕의 명성이 날조된 것은 아니니까. 드라마 <섹스 인 더 시티>의 배경처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뉴욕은 분명 존재한다. 관광코스, 데이트 코스, 뮤지컬 코스, 쇼핑 코스, 수많은 이벤트와 유흥거리가 맨해튼 거리마다 준비되어 있다. 이곳처럼 눈과 귀가 호강하는 장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뉴욕은 이렇게 사람들을 다시 혼란스럽게 한다. 이게 진짜 뉴욕 아닌가? 아까는 내 눈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인가?

쓰레기의, 쓰레기에 의한, 쓰레기를 위한


▎뉴욕의 쓰레기통. 재활용을 꼭 하라고 쓰레기통 표면에 문구가 찍혀 있다. 효과는? 장담할 수 없다.
사치와 오염. 이 양극단이 공존하는 시공간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뉴욕은 이 양극을 모순 없이 봉합시키는 놀라운 몸체를 가지고 있다. 이름하여, 쓰레기다. 쓰레기라고 얕보지 말지어다. 이 도시의 위대함은 쓰레기의 ‘위대함’ 없이는 불가능했다.

백화점에서부터 그 기록을 더듬어보자. 뉴욕은 두말할 것 없이 쇼핑의 도시다. 하지만 이는 뉴욕인들이 옷을 잘 입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옷 재고가 많아서다. 뉴욕 쇼핑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센츄리 21(Century 21) 같은 아울렛에 가면 된다. 명품 브랜드 옷이 90% 세일 가격으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기적을 볼 수 있다. 이 풍경은 강력한 쾌락을 약속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선택의 자유는 무한해지리라!

이 약속을 실제로 이행하는 것은 쓰레기다. 쓰레기는 ‘세일’이라는 개념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재고들은 세일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순환된다.(이것이 뉴욕이 연중 내내 세일 시즌인 까닭이다) 일단 옷이 정품으로 출시되면, 이 옷을 넘겨받을 아울렛 백화점들이 차례대로 대기한다. 아울렛을 거치면 거칠수록 옷의 가격은 절하되고, 마침내 그 가치가 0이 될 때 쓰레기장에 도착한다. 이 순환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로 빠르다. 디젤 브랜드에서 일하는 한국 디자이너는 “신상품이 쓰레기가 되기에는 약 6개월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짧다. 옷은 아울렛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미 쓰레기 취급을 받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무 옷이나 낚아채고, 입어보고, 제대로 걸어놓지도 않은 채 바닥에 떨어뜨린다. 똑같은 상품이건만, 그 위에 붙은 90% 세일이라는 빨간 딱지가 이 물건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허락하는 듯하다. 이 무자비함이 뉴욕을 ‘쇼핑의 천국’으로 만든다. 상품은 잠재적인 쓰레기여야만 한다. 그래야 언제든 신상품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다.

뉴욕의 일상생활을 책임지는 것도 쓰레기다. ‘뉴요커’라고 하면 이른 아침에 베이글을 입에 물고 커피 한 잔 손에 든 채 걸어가는 샐러리맨이 떠오른다. 이 모습이 쿨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이들은 바빠서 아침도 못 먹고 다니는 불쌍한 영혼들이다. 이 도시에서 늘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다. 하지만 쓰레기가 시간의 결핍을 채워주리라. 뉴욕은 일회용품과 포장음식의 천국이다. 또, 어디서나 쓰레기만큼은 아낌없이(?) 베풀어진다. 커피 한 컵마다 끼워지는 슬립 두 겹, 포장 초밥 하나에 딸려오는 간장 봉지 다섯 개, 맥도날드 세트 한 개에 제공되는 30겹의 냅킨, 계란 한 팩을 담기 위해 사용되는 비닐봉지 세 겹…. 이 쓰레기를 재활용할 시간은? 당연히 없다. 비재활용품과 재활용품만 간단히 구분하거나 그마저도 지키지 않는다. 심지어 음식물 쓰레기도 따로 분류하지 않고 일반 쓰레기에 묻어버린다.

쓰레기가 체현하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나 천박한 소비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뉴욕의 속도다. 최신 경향이 늘 처음 시작되는 도시, 이것이 뉴욕이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모던의 최첨단’으로 불리는 비결이다. 이 도시는 쉼 없이 운동한다. 번쩍거리는 타임스퀘어의 광고판, 24시간 운행하는 지하철, 사계절 신상품 시즌, 과포화상태인 자본과 정보, 노동력. 뉴욕이 특별한 것은 좋은 물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물자를 갈아치우는 주기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때문이다.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다 보면 결국은 그 주기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된다. 그저 변화만이 ‘무한히’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쉼 없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단연 쓰레기다. 쓰레기는 한낱 찌꺼기들의 집합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뉴욕의 속도는 물자들이 쉼 없이 ‘쓰레기’라는 특수한 물질적 상태로 추락함으로써 생겨난다. 뉴욕에서 80%의 물건이 (미국의 평균 수치다) 딱 한 번만 쓰이고 버려진다고 할 때, 이 잉여는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뉴욕의 명성을 증명한다. 이 땅의 성스러움은 상품이 쓰레기로 추락하는 속도에 비례한다. 쓰레기는 뉴욕 이념의 화신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다양하게, 더 무자비하게!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뉴욕과 쓰레기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수록 뉴욕시 환경부의 괴로움은 커져만 간다. 800만 뉴욕인이 하루 평균 생산해내는 1만 2000t의 쓰레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세상에는 ‘휴지통 폴더’가 없다


▎1. 메이시스 백화점의 우아한 자태 뒤에는 지칠 줄 모르는 소비 광풍과 엄청난 양의 쓰레기의 악순환이 도사린다. / 2. 뉴욕은 사시사철 세일 중이다. 공휴일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혹은 그냥 이유 없이 세일을 한다. 이러니 90% 세일을 봐도 그닥 놀랍지 않다.뉴욕 길거리에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 너무 흔한 풍경이라 사람들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친다. 여름이 되면 악취가 풍겨서 조금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뉴욕이 전통적으로 택한 방식은 단순했다. 뉴욕이 ‘아닌’ 곳에 버리는 것이다. 17세기, 대서양의 이 구석진 섬에 유럽인들이 정착한 이후로 가장 먼저 애용되었던 장소는 바다였다. 하지만 바다라고 용량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바다 쓰레기 매립은 1880년에 법적으로 금지된다. 뉴욕시는 쓰레기 무단 투기(?)를 계속했지만, 이웃 동네 뉴저지가 도저히 못 살겠다며 아우성을 치자 1934년에야 결국 바다를 포기한다.

뉴욕이 그 다음 눈을 돌린 것은 도시의 외곽이었다. 맨해튼 바로 아래에 있는 섬 스테이튼 아일랜드가 주요 타깃이 되었다. 이 섬에 세워진 쓰레기 처리장은 그 이름도 살벌한 ‘프레시 킬(Fresh Kill)’이었다. 프레시 킬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인공 구조물로 신기록까지 세웠다고 한다. 뉴욕 퀸즈 코로나에도 산업 폐기물 석탄재 하치장이 세워졌다. 공장에서 타다 남은 석탄재가 산처럼 쌓여, 바람이 불면 눈과 코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날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뉴욕시는 팽창했고 인구는 늘어갔다. 쓰레기장은 하나씩 문을 닫아야 했다. 프레시 킬마저 2005년에 영구 폐지되었다.

급기야 뉴욕시는 과격한 결단을 내린다. 모든 쓰레기를 타 주(州)로 수출하기로 한 것이다. 필라델피아, 뉴저지, 버지니아, 오하이오, 캔터키, 그리고 (뉴욕시를 뺀 나머지) 뉴욕주가 새로운 희생양이 되었다. 현재 뉴욕은 쓰레기 처리를 위하여 매년 3억 달러를 지출한다.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이다. 이 하치장의 용량마저 초과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300년 간 뉴욕시는 쓰레기에 대해 단 한 번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점점 더 멀리 눈앞에서 치우는 것 말고는.

컴퓨터에는 휴지통 폴더가 있다. 컴퓨터 용량이 꽉 찼을 때 이 폴더를 열어보라. 지금까지 바탕화면에서 치워버렸던 파일들이 휴지통 속에 보관되어 있다. 명목상 삭제된 파일들이지만 실제 용량은 소멸되지 않은 것이다. 용량을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구 삭제 버튼을 누르면 된다. 마법이 벌어진다. 휴지통은 텅 비워지고, 용량은 확 늘어난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우리의 휴지통에는 ‘영구 삭제’ 같은 초현실적인 기능이 장착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직시해야만 하는 진실이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치운 쓰레기는 저절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어딘가에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현실 속 ‘휴지통 폴더’는 지구 용량의 대부분을 잡아먹고 있다. <쓰레기학(Garbology)>의 저자 에드워드 흄즈는 미국인 한 명이 평생 만들어내는 쓰레기의 평균 양이 102톤이라고 분석했다. 한 인간의 몸보다 1000배는 더 많은 질량이다. 달리 말하면, 집도 절도 없는 인간이라도 이미 자기 몸의 천 배나 되는 땅을 차지한 채 살고 있는 셈이다. 지구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부당한 불법 점거(!)가 없다. 고로, 진실은 명백하다. 지구가 용량 무제한 슈퍼 컴퓨터가 아니다. 뉴욕과 쓰레기의 더러운 연애는 끝날 수밖에 없다. 그 끝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빠르고, 더 드라마틱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충격적이게도 별 호소력이 없다. 많은 사람이 시큰둥하게 되묻는다. 도시 개발과 환경 보호는 원래 상충하는 딜레마 아닌가? 쓰레기란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 아니겠는가? 미안하지만, 아니다. 뉴욕은 쓰레기 운송비용을 지불했던 것이지, 쓰레기 자체 때문에 정말로 잃어야 했던 것은 없었다. (대가는 항상 쓰레기를 버리는 땅에 전가되었다) 뉴욕에게 다른 대안이 원천봉쇄 되었던 것도 아니다. 뉴욕은 바보가 아니다. 이 위대한 도시는 왜 지난 300년 동안 쓰레기를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원시적인 방법밖에는 찾지 못했을까? 쓰레기를 에너지 발전에 이용하자는 의견은 왜 무시당했을까? 답은 하나다. 쓰레기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기 때문이다. 뉴욕을 뉴욕으로 만드는 힘, 그 경이로운 풍요와 변화는 ‘쓰레기’라는 물질 상태가 팽창하는 속도에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고로, 쓰레기 문제에 딜레마란 없다. 뉴욕은 쓰레기를 원한다.

모던 도시, 가장 더러운 유토피아


▎뉴욕 길거리에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 너무 흔한 풍경이라 사람들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친다. 여름이 되면 악취가 풍겨서 조금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이 욕망이야말로 모든 사태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쓰레기에 매장될 인류의 미래가 아니다. 쓰레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우리의 현재다. 에드워드 흄즈는 온갖 쓰레기를 자기 집에 긁어 모으다가 파묻혀버린 저장강박증 환자 사례를 들면서, 이 모습이 오늘날 사회에서 ‘완벽하고 끔찍하게도 정상 상태’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뉴욕의 이야기는 모든 모던 도시의 이야기다. 서울, 런던, 베이징, 파리, 방콕, 홍콩, 그 외 수많은 도시가 쓰레기와의 열애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강박증적인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인식된다. 이 무감각은 무지가 아니다. 오히려 완고한 신념이다. 뉴욕에 도착한 관광객이나 환경 문제에 관심 없는 정치인이나, 똑같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근대화된 문명은 깨끗하고, 전근대적 환경은 더럽다! 아무리 많은 쓰레기가 산출되더라도 ‘위생’을 위한 것이라면 정당하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허상이다. 일단 위생의 역사는 전혀 위대하지 않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서구 도시는 오물과 악취로 악명 높았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보면 19세기 초 파리 풍경이 보인다. 이 풍경은 제목 그대로 ‘미저러블’하다. 혁명군들은 파리 하수구를 돌아다니고, 아이들이 거리의 동상 밑에서 신문지를 덮고 노숙을 한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를 보면 근대화를 통과하고 있는 19세기 뉴욕도 보인다.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뉴욕의 길거리는 오염되었다. “뉴욕에서는 10만 명이 슬럼가의 지하실에서 생활했고, 1만 2000명의 여성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사창가에서 몸을 팔았으며, 길거리에 60㎝ 높이로 쌓인 쓰레기더미에는 쥐가 득실거렸다.” (이후, 416쪽) 이 모든 오염은 근대화가 만들어낸 부의 산물이었다. 즉, 위생의 필요성은 근대로부터 시작되었다. 게다가 위생은 근본적인 해결법도 아니었다. 오물을 거리에서 ‘골라내고’ 옆 동네로 ‘치워버리는’ 방법일 뿐이다.

반면, 모든 문명이 쓰레기에 의존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에 감탄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연암은 18세기에 조선 사절단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문명의 수준에 깜짝 놀란다. 그런데 그를 감탄시킨 것은 재활용 기술이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물건까지도 버리지 않고 삶으로 다시 순환시켰다. 기와 조각이 깨져도 버리지 않고 담을 쌓는데 활용하고, 말이 싼 똥도 빠짐없이 모아서 거름으로 썼다. 한마디로, 쓰레기가 없었다!

“중국의 제일 장관은 저 기와 조각에 있고, 저 똥덩어리에 있다. 대체로 깨진 기와 조각은 천하에 쓸모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민가에서 담을 쌓을 때 어깨 높이 위쪽으로는 깨진 기와 조각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물결무늬를 만들거나, 혹은 네 조각을 모아 쇠사슬 모양을 만들거나, 또는 네 조각을 등지게 하여 노나라 엽전 모양처럼 만든다. (…) 똥오줌은 아주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거름으로 쓸 때는 금덩어리라도 되는 양 아까워한다. 한 덩어리도 길바닥에 흘리지 않을뿐더러, 말똥을 모으기 위해 삼태기를 받쳐 들고 말 꼬리를 따라다니기도 한다.”(그린비, 234쪽)

연암의 문장은 신선할 뿐만 아니라 아주 날카롭다. 우리는 도시 문명을 평가할 때 물질만 보고 쉽게 속단한다. 더 크고, 더 많고, 더 빠른 물질을 가질수록 대단한 문명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연암은 도시를 정적인 무대 장치가 아니라 동적인 장(場)으로 본다. 한마디로, 문명은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의 문제다. 연암은 우리로 하여금 묻게 한다. 생활은 어떻게 지속가능한가? 물건들은 어떤 동선을 그리는가? 그 동선에는 어떤 철학이 있는가?

이 관점에서 모던 도시를 재평가해보자. 답은 간단하다. 더럽다. 이보다 더 더러울 수 없다. 삶이 순환하는 동선을 그리지 못한다면 위생은 아무 소용없다. 순환 없는 삶은 모든 관계를 기본적으로 ‘일회용’으로 바꾼다. 근대 도시에서 삶은 순환하는 원형(圓形)이 아니라 일직선으로 움직여왔다. 전 세계가 몇 백 년 동안 쫓아온 ‘모던’이라는 문명은 속도전이었다. 누가 더 빨리 신기술, 신정보, 신상품을 차지하느냐의 싸움이었다. 물론, 이 낭비 일색은 강렬한 쾌락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길거리 철학자 에릭 호퍼는 이 쾌락만큼 야만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다. “도시는 위대한 정신운동의 본부로서 인간을 물질의 폭정에서 해방시켰지만, 인간은 바로 이 도시에서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자연과의 싸움에서는 지고 말았다.”(<시작과 변화에 관하여>, 52쪽) 문제는 풍요 자체가 아니다. 이 풍요 속에서 허우적대며 전혀 ‘문명다운’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문제다.

쓰레기의 일부가 되어 도시를 부유하는 느낌


▎패션 디자이너 와타나베 나오 씨. 대학 시절에 패션뿐만 아니라 조각도 전공해서 손으로 만드는 것은 거의 다 할 수 있다고 한다. 와타나베 씨가 앉아 있는 해먹은 못 쓰는 청바지와 청남방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
쓰레기가 체현하는 것은 정신의 몰락이다. 근대는 깨끗하고, 전근대는 더럽다?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근대 문명에서는 생태학도 도시학도 모두 ‘쓰레기학’이 되었다. 몇백 년 후, 역사가들은 오늘날을 돌이키며 말할 것이다. 이 시대 문명이 가장 거대하게 탄생시킨 것이 쓰레기였으니, 이 시대는 ‘쓰레기 세기(Garbage Age)’라 명명되어야 마땅하리라.

쓰레기 세기에서는 삶도 ‘쓰레기’가 되어간다. 도시의 리듬은 삶의 리듬이 되고, 도시의 가치관은 개개인의 무의식에 스며든다. 내 존재가 하염없이 작아져서 몇 만 톤의 쓰레기의 일부가 되어 도시를 부유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 쓰레기 존재론은 실제로 담론에 등장했다. “나는 쓰레기다!” 이 슬로건은 2011년 월가 점거 시위에서 사용되었다. 쓰레기는 월가 시위에서 아주 중요한 테마였다. 시위자들은 쓰레기 봉지를 옷처럼 뒤집어쓰고 쓰레기통 뚜껑을 모자처럼 머리에 얹었다. 그러자 뉴욕시 경찰은 시위대의 공원 점거를 “불법 쓰레기 투기”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쓰레기를 둘러싼 팽팽한 대치!

월가 시위대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이 야만의 도시에서 내 인생마저 ‘낭비되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뉴욕이 만인에게 요구하는 규칙이 있다. 여기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만드는 방법은? 쉼 없이 일하는 것이다. 이 무자비한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시간을 팔아서 돈을 사야 한다. 역설적인 것은, 돈을 벌면 벌수록 ‘없는 시간’을 다시 사야 한다는 점이다. 쓰레기는 여기서 숙명적으로 등장한다.

일회용이란 그냥 값싸고 저질인 물건이 아니다. 이것은 상품으로 물화(物化)된 토막 난 시간이다. 일회용품을 통해 사람들은 잠깐 숨 돌릴 시간을 확보한다. 그렇게 보면 쇼핑 역시 일회용품이다. 취미 생활을 누릴 시간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즐거움을 계절별로 상품화한 것이다. 이처럼, 뉴욕에 산다는 것은 톱니바퀴처럼 꽉 맞물린 시간의 매매 과정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팔려간 내 시간은 뉴욕의 24시간 운동을 위해 수혈된다. 이로써, 쓰레기는 아주 구체적으로 삶을 옭아맨다.

뉴욕시 경찰은 쓰레기 이데올로기를 내세웠다. 이 이데올로기는 위생과 비위생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고, ‘비위생적인 쓰레기’를 소거시키는 것을 정당화한다. 뉴욕시 경찰이 ‘안전한 시민’과 추방되어야 할 ‘불순분자’를 구별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위대는 쓰레기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한다. 시위대는 공원에서 아주 청결한 공동체를 이뤄냈다. 이동식 화장실을 설치하고, 태양열 발전기로 전기를 끌어다 쓰고, (뉴욕에서는 참 찾아보기 힘든) 분리수거를 실천했다. 이런 삶은 정말 불가능한 걸까? 왜 사회는 항상 쓰레기를 버리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할까? 이 야만적인 문명을 지속시키는 월가의 자본주의야말로 썩은 게 아닐까? 이 문제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 한 시위자는 스스로를 ‘진짜 청소부(A Real Cleaner)’라고 명명했다.

문명은 배터리가 아니다. 마음대로 갈아 끼울 수 없다. 이 쓰레기 세기는 우리가 평생 살아가야 할 환경이다. 그렇다면 정말 고민해야 할 것은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아니라 쓰레기와 어떻게 함께 살아가느냐다. 뉴욕에는 이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진짜 청소부’들이 꽤 있다. 브루클린에 가면 훌륭한 중고 옷 가게가 많고, 할렘 쓰레기 하치장에는 쓰레기로 만든 예술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도 있다.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외친다. “나는 쓰레기다!” 쓰레기가 나이고 내가 쓰레기니,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 이것이 돌파구를 만든다.

일본인 와타나베 나오(29)도 이 대열에 합류한 사람이다. 그는 현재 뉴욕 퀸즈 엘허스트 지역에서 옷을 수선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수선공이 아니다. 프로 디자이너다. 그에게 부탁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새 옷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면 옷감을 떼어다 지어주고, 안 입는 옷은 원하는 스타일로 고쳐주고, 못 쓰는 옷으로는 가방을 비롯한 여러 소품을 뚝딱 만들어낸다.

선택의 자유, 자유의 카르마

와타나베 씨는 원래 일본에서 패션을 공부했다. 대학 교수가 그의 작업이 아주 창의적이라며 뉴욕에 가라고 추천했다고 한다. “그때는 성공하고 싶었다. 뉴욕에 오면 내 디자인을 가지고 멋진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돌린 사건이 있었다. 백화점에 갔는데, 사람들이 옷을 마구잡이로 입어보며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곧 멸망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물건을 대하는 끔찍한 태도를 보니 일할 맛이 안 났다.” 그는 각 물건에는 의미가 있고, 이 의미를 지속시켜야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플라스틱 물병을 재활용해서 옷을 만드는 판타고니아(Pantagonia) 같은 브랜드를 사랑하고, 블랙 프라이데이처럼 무분별한 판촉 세일 행사에 반대하는 이유다. 그의 장기 계획은 재활용 커뮤니티를 여는 것이다. 거기서 자기 물건은 자기가 고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주겠단다. 먼 훗날의 이야기다. 그러나 뉴욕시의 그 어떤 쓰레기 정책보다도 눈부시다.

이것이 진짜 자유로운 선택이다. 불교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많을수록 업을 쌓을 가능성도 커진다고 한다. 즉,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이 육식을 탐하는 것은 업을 쌓는 일이라는 것이다. 선택하는 자는 항상 전체를 살피고 ‘제대로’ 선택할 의무가 있다. 뉴욕이 잃어버린 것은 이런 비전이다. 뉴욕은 이곳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무한하다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돈만 있으면 뭐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선택한 삶을 책임지지는 않는다. 저당 잡힌 나의 시간, 쓰레기에 파묻힌 나의 방, 의미를 잃어버린 나의 물건들은 고스란히 현실이 된다. 고로, 상품과 쓰레기 사이에서 선택하는 건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와타나베 씨처럼 그 밖으로 벗어나 ‘다른’ 선택을 할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선택의 자유다.

쓰레기의 시대, 뉴욕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똑똑해져야 한다. 아니, 그 어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커뮤니티를 쓰레기의 성지(聖地)에서 쓰레기의 생-지(生-地)로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 동네 옷 수선공과 안면을 트는 일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김해완 - 고등학교 재학 중 학교를 나와 공부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서 생활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가방끈은 짧지만 공부복은 많다. 2년 전에는 예상치 못하게 ‘세계의 수도’ 뉴욕 한복판에 떨어졌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배움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는 중이다. 쓴 책으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그린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북드라망),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작은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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