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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학당] 인문사주명리학 '앵콜' 강좌(기초과정) - 10월 14일(토) 개강 [인터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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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7-09-01 13:31 조회5,2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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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학당]에서 사주명리 앵콜 강좌를 엽니다. 지난 8월에 시작한 [도담스쿨] 사주명리 강좌가 마감되어 미처 신청하지 못한 분들과 주말에 열어 달라는 분들을 위해서 도담의 사주명리 강좌를 하나 더 개설합니다. 이 강좌는 [도담스쿨]에서 [도담학당]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 열리는 첫 강좌이기도 합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이 강좌는 초보자를 위한 입문 과정입니다.>



[도담학당]  
인문사주명리학 강좌

저자 직강
운명론을 다시 쓰다. 새로운 책, 새로운 버전
기호론과 정치학으로 푸는 존재의 운명


사주명리는 정해진 운명을 맞추는 신비한 계명이 아닙니다. 운명은 우연과 변수, 환경과 욕망에 의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짧은 계산과 운명론적 예측은 늘 빗나갑니다. 사주명리는 오히려 변화하는 현장에 개입하는 몸과 운명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운명의 예측불가능성을 인정하고 계산되지 않은 새로운 주체를 발견하는 자기 통치의 정치학. 그것은 어떤 점에선 수년간 제가 연구실 등에서 해왔던 사주명리 강좌를 뒤집는 것이며, 명리학을 새롭게 실험하는 것입니다. 그 실험의 과정이 곧 책으로 출간됩니다. 그리고 이 강좌는 그 책을 가지고 여는 첫 번째 만남의 장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여행, 혹은 내 안의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기 위한 계산되지 않은 항해. 이 운명적인 여정에 같이 승선하실 모험가들을 초대합니다.^^ 

1

10/14

규정에서 생성으로 -기호론으로 본 운명의 정치학-

2

10/21

명식 세우기와 음양오행의 세력 분포

3

10/28

욕망의 발생학 천간의 기호론-

4

11/4

현장과 우연 지지의 기호론-

5

11/11

시야를 넓혀라 간지의 응용-

6

11/18

관계의 지형학 육친의 기초-

7

11/25

운명의 통치술 -육친과 간지의 융합-

8

12/2

변수와 운기 합충-

9

12/9

타이밍의 윤리학 대운-

10

12/16

새로운 항해 실전 해석-


강사 : 도담 안도균
장소 : 송파문화원 2층 203호 (2호선 종합운동장역 2번 출구에서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방향)
시간 :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 3시 (2017년 10월 14일 ~ 12월 16일) 
수강 회비 : 25만원(10주)
접수방법 : 문자 (ㅇ1ㅇ-8127-3827) 접수만 받습니다. 수강 회비를 계좌이체 하신 후 문자로 접수합니다. 접수는 입금자순입니다.
계좌 : 기업은행 248 036416 02 015 / 예금주 : 김결
문의 : ㅇ1ㅇ-8127-3827(김결) / ㅇ1ㅇ-51ㅇ8-3237(안도균)
교재 : 안도균,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 북드라망 (9월 12일 출간 예정: 첫날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 신청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시고 일정도 확인해주세요. 강의가 시작되면 환불할 수 없습니다.
※ 사정에 따라 커리큘럼의 내용과 순서가 바뀔 수 있습니다.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인터넷 서점에 실린 인터뷰




1. 최근 사주명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주명리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는데요. 이 책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가 여타의 명리학 책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사주명리를 운명에 개입하는 도구로 쓴다는 점입니다. 대개는 운명을 맞추기 위해서 사주를 봅니다. 그러나 사주명리는 운명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어떤 아우라 혹은 어렴풋한 성향을 짐작할 뿐이죠. 그건 운명이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사주명리학계에서도 대체로 결정된 운명은 없다는 쪽에 동조하긴 합니다. 그렇다면 운명을 정확하게 맞출 수도 없지요. 운명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운명의 결과를 맞출 수 있습니까? 하지만 사주명리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여전히 어떻게 하면 정확하게 맞출까로 향해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방향성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사주로 그의 운명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서사를 사주와 연결하는 겁니다. 태어날 때 시공간의 특성이 그의 몸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데 그 성향을 특정 문자로 표현합니다. 그걸 사주팔자라고 하죠. 그런데 그 문자는 일종의 기호에요. 하늘이 내려준 계시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문자기호일 뿐이죠. 사주의 해석이란 이 기호의 의미를 확장해 가면서 그 사람의 운명에 접근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주를 맞추기 위한 방편으로 쓸 때는 이런 확장성이 억압됩니다. 틀리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능한 의미들 가운데 그 사람에게만 맞는 특정 해석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운명을 규정하고 상대를 그 규정의 틀 안에 가둡니다. 또한 거기에는 어떤 권력관계가 작동합니다. ‘사제권력이랄까요. 사실 운명론에는 어떤 음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건 표면에선 알 수 없는 심연의 흐름들을 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상담가는 그것으로 기를 죽이려 하고, 내담자는 그 특별한 힘에 의탁합니다. 저는 그런 규정과 권력에 저항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해석이 특정한 규정성에서 벗어나 의미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집니다. 또한 사주를 매번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존재를 새롭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규정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킵니다. 이것이 사주명리로 운명에 개입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미래에 개입하는 것인데 이것은 설명이 길어질 수 있어서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이 책에서 자기 운명에 개입하기 위해 사주명리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세요. 운명을 자기가 바꿀 수 있다는 뜻인가요?

 

자기를 새롭게 규정한다면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삶의 태도가 바뀌면 운명이 바뀌겠죠.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바뀔지는 모릅니다. 운명에 개입하다고 하면 흔히 자기의 욕망대로 특정한 결과를 이루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엔 많은 변수가 있어서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욕망이 특정 결과에 집착되어 있으면 삶의 과정은 지옥이 됩니다. 예컨대, 글을 쓰고 싶다와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는 욕망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글을 쓰고 있는 현장을 기쁨으로 채울 수 있지만, 후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결과에 늘 노심초사하고 좌절합니다. 저의 사주명리는 전자의 욕망을 지지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특정 미래를 염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해 미끄러집니다. 그러면서 욕망은 우발적인 변수의 리듬을 타면서 또 다른 욕망을 낳습니다. 1번 질문에서 미처 답하지 못한 두 번째 개입이 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사주의 해석이 새롭게 일어나는 낯선 욕망에 명분을 주고 계산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독려합니다. 이것이 사주로 미래에 개입하는 방법입니다.

욕망이 바뀌면 존재가 바뀝니다. 이때 또 다시 자기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다시 첫 번째 개입으로 존재를 재구성해야 하겠죠. 이런 식으로 사주는 운명에 개입하게 됩니다. 특정한 결과를 얻으려는 기존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망의 흐름에 길을 내어주는 것이죠.

 

3. 자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해석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닫힌 해석을 조심해야 합니다. 존재에 대한 해석은 항상 열려져 있어요. 사주명리는 존재의 운명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방법론 중의 하납니다. 단적인 측면만 보고 운명을 단정해선 안 됩니다. 특히 특정인의 해석에 머무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상담을 받는 것보다는 조금 덜 의존적이긴 하지만, 책을 통해 운명론을 스스로 접하는 경우도 특별해 보이는 해석에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운명론에 관한 대부분의 책들은 저자의 해석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운명론을 스스로 터득한다 해도 결국 저자의 세계관 안에 갇히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주명리는 신비한 계명이나 진리가 아니라 존재의 개별적 서사에 유연하게 적용되는 물렁물렁한 기호입니다. 해석도 존재도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걸 전제해야 하겠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개인의 운명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는 겁니다. , 운명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와 연결된 대중적 욕망이나 내면화된 권력 등에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사주 해석 역시 그런 구조적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양한 공부와 연결시켜야 하겠죠. 특히 인문학적인 지식은 그런 종합적인 해석에 매우 유리하게 응용될 수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를 읽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운명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그건 사주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왔던 습관 때문입니다. 생명은 생생불식하는 변화의 동력을 가지고 있는데, 오래 묵은 습관은 생명력을 약화시킵니다. 습관적인 감정과 사유, 그로 인해 반복되는 갈등과 쾌락의 관계 양식은 번뇌와 질병을 일으킵니다. 그 지루한 굴레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선 자기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단을 할 수 있다면 처방은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문제가 벌어지는 과정을 추적할 때는 그 과정을 개선하고 싶은 어떤 실천의 욕망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실천이 바로 처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가 그런 진단과 처방을 위한 방편이 되길 바랍니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결국 습관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습관을 바꾸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강한 의지를 사용한다 해도 결국 기존의 습관이 의도한 세계 안에서 돌고 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위에서 존재의 재구성이라든지, ‘새로운 욕망에 길을 내는 것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그런 필요에 의해섭니다. 자기의 오래된 습관을 바꾸기 위한 지혜의 통치술로서의 사주명리, 그것이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가 의도하는 운명의 정치학입니다. 그 정치적 주체가 되는 길 위를 꿋꿋이 걸어가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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