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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클래식] 마음이 이치다 – 심행합일(心行合一), 바보야, 문제는 앎이 아니라니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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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11-30 22:11 조회8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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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이치다 – 심행합일(心行合一), 바보야, 문제는 앎이 아니라니깐!(4)

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 슬기로운 유배 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3-3. 마음이 이치다 - 심행합일(心行合一), 바보야, 문제는 앎이 아니라니깐!

 
문리스(남산강학원)

3-3-4. 마음, 그냥 아는 것 : 마음이란 무엇...인가?

주본사가 물었다 : 사람에게는 텅비고 영명함[虛靈]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양지가 있습니다. 풀, 나무, 기와, 돌 같은 것도 양지가 있습니까?

선생께서 대답하셨다 : 사람의 양지가 바로 풀, 나무, 기와, 돌의 양지이다. 만약 풀, 나무, 기와, 돌에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풀, 나무, 기와, 돌이 될 수 없다. 어찌 풀, 나무, 기와, 돌만이 그러하겠는가? 천지도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역시 천지가 될 수 없다. 생각컨대 천지 만물은 사람과 원래 일체이며, 그것이 발하는 가장 정밀한 통로가 바로 사람 마음의 한 점 영명[靈明]이다. 바람과 비, 이슬과 우뢰, 일월성신과 금수초목, 산천토석은 사람과 원래 일체이다. 그러므로 오곡과 금수의 종류가 모두 사람을 기를 수 있고, 약과 침의 종류가 모두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단지 이 하나의 기운을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 있다.(<전습록> 274조목)

단도직입. 마음이란 무엇인가.

양명학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라면 아마 ‘마음이란 대체 무엇이냐’는 것일 겁니다. 맥락 같은 거 무시하고 어찌됐건 <전습록>에서 직접 언급된 양명의 실제 워딩으로만 말해 본다면 마음은 이 몸[身]을 주재[宰]하는 측면에서 가리킨 것,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몸은 마음[心]을 형체의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것이 마음으로 설명됩니다. 생각[意]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앎[知]이란 마음이 영명(靈明)한 상태이며, 사물[物] 혹은 세계란 이 마음이 닿은 것입니다. 결국 다 마음입니다. 이제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가요? 더 아리송해졌다구요?^^ 처음에는 좀 낯설게 느껴지지만 마음에 관한 이러한 설명은 마음을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아니 초자아니 하는 말보다는 훨씬 더!

일단, 마음은 ‘무엇’이 아닙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엇’이 아니고 실체가 아니라고 해서 이런 말들이 마음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방금 전에 (양명의 말을 좇아) 말해본 것처럼 마음은 이것저것으로 분명히 있습니다. 요컨대 마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환각도 아닙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일단은 이렇게 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무엇’이 아니지만 모든 것이다.

aziz-acharki-2fgnVgsm5uM-unsplash마음은 '무엇'이 아니지만 모든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실 모든 것이 마음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지각하는 등등의 모든 것 가운데 마음 아닌 것은 없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간단한 얘기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예컨대 나를 아껴주는(혹은 미워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냥 느껴지나요? 맞습니다. 그런 건 그냥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그냥’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이’라는 뜻이 아니라 몸짓, 눈짓, 말씨 등등의 하나하나에서 모두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마음은 ‘무엇’이 아니지만, 우리가 마음을 알아본다는 것은 어떤 무엇(들)으로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무엇이 아니지만 모든 것, 이라는 식의 말은 희언(戲言)이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나에게 소중한 친구의 우정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냥, 아는 겁니다. 알지 못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마음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마음을 몸과 분리된 무엇, 다시 말해 마음을 가슴 속 어딘가에 있다거나 혹은 머리(뇌)의 작용 쯤으로 여기는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심/신(心/身) 이원적 태도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 속 어딘가에 있는 무엇인 것도 아닙니다. 마음은 드러나는 어떤 작용 그 자체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이를테면 마음으로 일으키는 생각 같은 것도 사실은 생각이라는 작용이 이미 마음이 움직인 흔적인 것입니다.

hannes-wolf--BVumYz08bE-unsplash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마음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면 당연하게도 누군가 그 마음을 알아차리게됩니다. 말을 해야 마음을 아는 게 아닙니다. 아마 지금도 누군가는 입밖에 내지 않고 표정 관리를 잘 하면 마음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마음을 숨기려는 그 마음은 어떻게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운(?)이 좋아서 평생토록 자기 마음을 숨기면서 살아낸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의 일생은 평생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그 일생은 무엇을 위한 일생인 것일까요? 또 한편으로 마음을 숨길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은…… 어떤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얘기가 좀 곁가지로 흐른 감이 없지 않네요. 각설하고!!

앞에서 인용한 274조목으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사람 외에 풀, 나무, 기와, 돌 등에도 양지가 있느냐는 한 제자의 질문에 양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의 양지가 바로 풀, 나무, 기와, 돌의 양지다.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풀, 나무, 기와, 돌이 될 수 없다!’ 이 말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천지 역시도 사람의 양지가 아니면 천지가 천지일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양지가 아니면 천지는 천지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천지(=세계)란 결국 이 마음[양지]일 뿐입니다. 마음 밖에 세계가 없다는 말의 다른 버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나는 이 세계는 결국 이 마음의 세계입니다. 나의 이 마음이 곧 세계이고, 세계가 곧 이 마음인 것입니다.

tree-g993805119_640'사람의 양지가 바로 풀, 나무, 기와, 돌의 양지다.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풀, 나무, 기와, 돌이 될 수 없다!'

p s. 곁가지로 흐른 김에 조금 엉뚱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마무리지을까 합니다. 양명의 ‘심즉리(마음이 이치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도 원리상 결국 이 말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결국 돌고돌아 이것 저것 다 통한다는 얘길 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진리라면 여기에서만 진리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칠게 이런 엉뚱한 이야길 꺼내는 이유는 사실 양명학과 동학의 상통 지점 같은 걸 이야기해보기 위함입니다. 얼마전에 고(故) 김종철 선생님의 에세이집을 읽다가 동학 얘기 하시는 대목이 흥미진진했기 때문이고 어떤 느낌이 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학 농민운동 혹은 동학 농민전쟁 당시 인구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이 실제 농민군으로 실제 참여했다는 걸 저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만큼 동학에 관해 무지했습니다. 당시 농민의 1/3이라니 정말 엄청나고, 전율과 경외감이 절로 생겨나는 규모가 아닙니까? 그런데 저에게는 그 사실보다 더 흥미로웠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학이 ‘사상적으로 굉장히 무장이 잘 된 민중반란’이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척왜양(斥倭洋), 보국안민(輔國安民), 유무상자(有無相資) 등을 핵심 구호로 내세운 동학농민전쟁은 세계사적으로 특기할만한, 사상적으로 잘 무장된 민중투쟁이었다는 것. 최대한 살상을 하지 않으려 했고, 농민군의 기율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격적으로 동학을 공부해서 다른 기회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하튼 그렇다 치고, 질문은 이제부터입니다. 동학군의 그 많은 농민군들을 어떻게 그렇게 높은 사상적 무장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김종철 선생님은 그 이유를 오랜 시간 유교 국가로서 축적된 인식의 전제들 때문이라고 보시는데, 저는 이 지적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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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대목에 제가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는 동학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적 의미 같은 걸 살짝 괄호쳐보면 주자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동학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다르게 이해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더 재미없는 얘길 해보자면, 사상적으로 송나라[남송] 때의 주자학이나 명나라 때의 양명학은 큰 틀에서 ‘리학(理學)’입니다. 더 세분화해보자면 주자학의 성(性)이나 양명학의 심(心)이나 모두 결국은 성인됨을 추구하는 길잡이 혹은 주축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인 셈입니다.

그런데 양명학은 주자학적 배경 없이는 등장할 수 없는 학문이지만, 주자학은 양명학이 아니면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주자학이 양명학의 토양이라면, 양명학은 주자학의 필연[미래]입니다. 그런데 주자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양명학은 굉장히 오랜시간 철저하게 외면되고 배척되었습니다. 저는 조선 주자학의 필연으로서의 양명학이 동학으로 구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양명학과 동학이 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학의 문제 의식은 양명학의 문제 의식과 분명히 공유되는 지점이 있고 출현 이후의 운동성 면에서도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양명학을 이어받은 태주학파의 왕심재가 철저한 민중지향성의 길로 나아간 것과 조선에서 동학이 사대부의 유학이었던 주자학을 넘어 민중 규합의 구심점이 되었던 배경에는 양쪽 모두 주자학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양명과 수운. 아직 심증뿐이지만 의외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 같은 기대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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