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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맹자를 만나다] 소유가 아닌 공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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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12-13 10:41 조회5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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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가 아닌 공감으로
문빈(남산강학원)

전쟁과 살육이 끊이질 않던 전국시대, 백성들은 그 속에서 고통과 상처를 신음하고 있었다. 그 당시 양나라의 왕, 양혜왕은 백성들을 위하는 정책을 펼친다. 흉년이 들면 백성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떠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서는 다른 지역의 곡식을 그 지역으로 옮겨 주는 것이다.

주변 어떤 나라도 양혜왕과 같은 정책을 펼치는 곳은 없었다. 그렇기에 양혜왕은 맹자에게 자신 있게 말한다. “과인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할 뿐입니다.” 이러한 양혜왕에게도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자신이 온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마음을 쓰는데 이웃 나라의 백성이 줄어들거나, 자기 나라의 백성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양혜왕은 맹자에게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묻는다.

맹자는 어떤 답을 주었을까. 맹자는 양혜왕을 칭찬하기는커녕 당신이 하는 정치는 다른 나라의 정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몰아붙인다. ‘오십보백보’라는 것이다. 분명히 양혜왕은 흉년에 괴로워하는 백성을 위해 마음을 썼고, 다른 이웃 나라들은 그런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맹자는 왜 양혜왕에게 ‘오십보백보’라고 말하는 걸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해 말씀드리겠습니다둥둥 북이 울리면 나아가 병기날을 부딪다가 패색이 짙어져 방패를 버리고 무기를 땅에 끌면서 도망가는데어떤 사람은 백 보를 도망간 후에 멈추고 어떤 사람은 오십 보를 도망간 후에 멈추었습니다이 경우 오십 보를 도망간 사람이 백 보를 도망간 사람을 보고서 비겁하다고 비웃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옳지 않습니다단지 백 보가 아닐 뿐 도망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맹자』 양혜왕 상편 1-3 / 박경환 옮김 홍익 출판사 / p36)

맹자는 오십 보를 도망간 사람이 백 보를 도망간 사람을 비겁하다고 비웃을 수 없다고 한다. 두 사람이 도망간 ‘거리’는 다를지 몰라도, 본질적으로 전쟁 중에 겁을 내서 도망갔다는 점은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금 도망갔다고 해도, 아무리 멀리 도망갔다고 해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둘은 같은 것이다.

nathan-mcbride-9QjbejABFn8-unsplash아무리 조금 도망갔다고 해도, 아무리 멀리 도망갔다고 해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둘은 같은 것이다.

맹자는 이 비유를 통해 양혜왕을 통렬히 비판한다. 흉년이 왔을 때 백성을 많이 구제하든, 적게 구제하든 그 ‘차이’를 따지는 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맹자는 양혜왕에게 좀 더 사태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길 요구한다. 흉년은 대체 왜 발생했겠는가? 흉년이 발생한 원인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가뭄 때문인가? 아니면 홍수? 산사태? 기후 변화?

맹자는 흉년이 발생하는 원인은 바로 양혜왕 당신의 정치에 있다고 말한다. 농번기든 아니든, 때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청장년을 징용하여, 전쟁터로 내보내고. 그로 인해 마을에는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집집마다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고. 또 원칙 없는 사냥과 벌목으로 땅을 황무지로 만드는 그런 잔인한 정치. 그러한 정치는 백성들의 삶을 위태롭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정치를 하게 되는가? 전국시대에 전쟁은 멈출 수 없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 나라의 왕들은 전쟁 승리를 통해 자신들이 ‘최후의 왕’으로 남기를 원했다. 국가의 힘을 강력하게 만들어, 천하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던 시기였다. 양혜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좋아”했으며, 자신의 나라가 최고로 강성해지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영토가, 더 많은 인구가, 더 강한 군사력이,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면 어딘가에서 그만큼을 빼앗아 와야 한다.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빼앗고, 성을 빼앗고, 백성들을 빼앗고, 심지어 그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 자신과 함께 사는 백성들의 삶까지 희생시켜야 했다. 이렇듯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움직임은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운동한다. 부를 얻으려면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갈 부를 빼앗아야 가능하고, 우리 몸을 유지하려면 다른 생명(음식)을 빼앗아야 가능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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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양혜왕이 천하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를 욕망하는 이상 아무리 백성을 위한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 보아도 그 욕망 위에서 있다면 ‘오십보백보’일 뿐이다. 여기서는 백성들을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맹자는 어떤 방향으로 욕망을 틀어야 한다고 보는 걸까?

맹자는 왕을 한 나라를 소유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보지 않는다. 맹자에게 왕은 “백성의 부모”이다. 부모는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다. 자식을 길러내고 살아가게 하며 결국에는 한 인간으로 당당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이처럼 왕은 백성들을 한 ‘인간’으로 보며, 그들을 ‘기르고’ ‘살리고’ ‘존재하도록’하는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백성만을 위하는 것은 아니다. 너와 나에게 모두 좋은 삶, 공공의 삶을 고민하고 또 구성하며 실천하는 것이 바로 왕의 역할이다.

공공의 삶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은 소유가 아닌 공감이다. 맹자가 양혜왕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내세운 정책도 백성들이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냄에 유감없게 하는 것”이다. 맹자는 모든 존재가 살아가는 데 “유감”없기를 바랐다. 자신의 삶이 유감없기를 바라는 만큼, 다른 존재의 삶도 유감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는 자신의 삶이 즐겁기를 바라는 만큼 다른 존재의 삶도 즐겁기를 바랐다. 우리는 나와 연결된, 함께하는 존재가 즐거울 때 더욱 즐거움을 느끼고. 함께하는 존재가 충만함을 느낄 때 덩달아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혼자 집 안에서 즐거움을 느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다. 이렇게 공감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 그것은 우리를 살아있도록 한다.

공감의 네트워크를 구성해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풍년에는 양식을 저장해둘 줄도 알아야 하고, 흉년에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나누어 주기도 해야 하고, 수확철에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물고기 사냥을 할 때는 촘촘한 그물망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벌목은 적절한 때에 적당히 해야 한다. 공공의 삶에는 원칙과 기준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체 시공간의 흐름과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끊임없는 전쟁통에 괴로워하는 백성들을 구원하는 길은 오직 이 방향뿐이다. 그렇기에 맹자는 어떤 왕을 만나든 오직 이 길을 말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오직 이 길을 걸어갔다.

sebastian-leon-prado-dBiIcdxMWfE-unsplash맹자에게 왕은 “백성의 부모”이다. 부모는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다. 자식을 길러내고 살아가게 하며 결국에는 한 인간으로 당당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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