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무한한 속성 중 하나가 사유다. 정신은 사유하는 것이고, 이 사유를 통해 우리는 관념 즉 아이디어들을 만들어낸다. 내가 만물들과의 연결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것처럼, 이 연결이 신의 속성이기에 더 많이 연결되고 소통하려고 해야 하는 것처럼 사유도 신의 속성이다. 사유가 신의 속성이라는 것은 사유라는 것 자체가 신이라는 의미다. 사유를 한다는 것은 천지자연의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해가 중천에 있다가 지고 다시 뜨듯이, 달이 차고 기울 듯이, 줄어들면 불어나고 기울어지면 차는 이치 말이다. 이 이치를 완벽하게 터득할수록 신의 속성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치를 터득한다는 것은 하나씩 떼어내서 보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순환하고 운동하면서 연결되어 있는 전체적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니 사유란 고정된 하나의 틀이 아닌 열려있으면서 이어져 있는 흐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무한하게 열려있으니 경계나 편견이 없고, 모든 것이 이어져 있으니 시공의 제약이 없다.
예수님은 이런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기에 절대적 사랑을 실천하셨다. 나와 너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에 타자를 사랑하는 게 자신을 사랑하는 일임을 아셨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았다. 스피노자가 “각자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사람들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할 것이다.”(제 4부, 정리35. 계2) 라고 말하듯이 가장 이기적인 게 가장 이타적인 것이 되는 이유다. 나와 너가 분리된 상태에서는 이기적인 게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이다. 하지만 나와 너가 하나인 상태에서는 이기적인 게 이타적인 것이 된다.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만물은 끊임없는 순환 속에 있으니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아셨다. 그러니 대자연과 하나가 되셨고, 그 법칙 속에서 사셨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신의 아들’이다.
이런 천지자연의 법칙에 대한 이해 속에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란 믿어야 하는 교리가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윤리적인 파동이다. 자연은 매번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즉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다시 태어난다. 우린 날마다 잠들었다 깨어나면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끊임없는 생성 소멸을 통해 생성을 이어간다. 이것이 부활이다. 하지만 이것을 부활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전체 순환의 질서가 아닌 나의 욕망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내가 동안을 원하고, 영혼의 불멸을 믿은 것은 늙는 것도 죽는 것도 싫어서다. 전체적 차원에서 늙음은 또 다른 젊음의 생성이요, 죽음은 다른 것으로의 생성이자 부활이다. 하지만 나는 늙고 죽는 건 단절이자 소멸이라 여겼다. 그러니 늙음과 죽음이 두려웠고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불멸을 믿게 되었다.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는 이유는 성체에 내 욕심을 빌라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시며 일상에서 매 순간 부활의 파동을 이어가라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