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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궁금하다!] 이야기의 과학, 신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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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12-25 14:43 조회6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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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과학, 신화 (2)

이윤하(남산강학원)

2. 세계를 해석하는 기호

그렇다면 ‘총체’를, 세계 전체를 이해하겠다는 인간의 야심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구체의 과학에는 근대 과학에서 발견할 수 없는 매력이 하나 있다. 구체의 과학이 쓰는 기술, ‘브리콜라주(bricolage)’가 그것이다. 자연상태의 우리 ‘마음’이 브리콜라주의 원리로 운동한다는 것은 지난 글에서 언급했는데, 그 원리가 바로 구체의 과학의 원리와 같고, 그 기술의 지적 결과물이 ‘신화’다.

브리콜라주는 지금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상황마다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그 기술을 쓰는 브리콜뢰르(bricoleur)들은 다재다능한 ‘손재주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엔지니어(근대과학을 하는 기술자들)들과 다르게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그들은 연구해야 할 분야도, 그것에 특화된 연장도 따로 갖고 있지 않다. 주변에 널려있는 모든 것이 연구할 재료고, 연구에 쓸 연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계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다.

katie-rodriguez-NP9kbCXeVK0-unsplash브리콜라주는 지금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상황마다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신화적 사고는 사건과 경험의 포로가 되어 그것들이 의미를 발견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렇게 포로일 뿐만 아니라 해방자이기도 하다. 무의미하게 된 것에 대해 과학은 타협하고 포기했으나 신화적 사고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한길사, p77)

브리콜뢰르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무의미하지 않다매번의 사건매번의 경험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신화적 사고다오늘 밤에 뜬 산 위의 보름달난간에 쌓인 차가운 눈의문스러운 친구의 미소. ‘세계는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지금 내가 감각하는 것이 곧바로 세계 전체로 들어가는 문이다브리콜뢰르는 이 자잘한 것들과 대화하고그것들로 이야기를 만들며 세계를 해석해간다.

그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을 좀 더 들여다보자자잘한 것들을 그냥 늘어놓는다고 신화가 되는 것은 아니고그 감각된 요소들이 기호화 되어야 신화가 만들어진다기호는 지각(precept)된 이미지와 개념(concept)의 중간에 위치한다한 번의 상황에만 달라붙어 있는 지각과 고도로 추상화되어 어디든 넣어 쓸 수 있는 개념’ 사이. ‘기호는 구체적인 것이면서도 현실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신화 속 표범이라는 기호가 만들어지려면 사람들은 실제 표범을 만나고 감각해야 한다그러나 그 다음표범기호는 지각’ 차원에서 떨어져 나와 이야기 속에서 다른 기호들(예를 들어 사람’, ‘야생돼지’)과 관계를 맺는다그 배치 속에서 표범기호는 포식빠름강함등을 지시하는 기호로 기능한다표범을 만날 수 없는 지역에서는 이 자리에 같은 감각을 일으키는 다른 기호, ‘독수리’ 따위를 넣을 수도 있다그러나 어디에 넣어도 같은 것을 의미하는 개념과는 달리 기호는 배치에 따라 지시하는 것이 달라진다표범기호가 야생돼지기호가 아니라거북기호와 이야기를 만들게 되면어리석음을 지시하는 기호로 변주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신화적 사고는 이렇게 현실을 기호화함으로써 이야기의 재료로 만든다그렇다면 이런 신화 만들기가 어떻게 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일이 되는가?

calvin-craig-y8b001e2bs0-unsplash이런 신화 만들기가 어떻게 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일이 되는가?

3. 이해의 과제

과학자나 ‘손재주꾼’이나 항상 메시지를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손재주꾼(브리콜뢰르)’의 경우 어느 정도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내용과 그가 수집한 메시지가 관건이 된다. (중략) 과학자는(엔지니어든 물리학자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리허설하듯 되풀이되지 않았을 때에는 발언하지 않는 과묵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 상대자로부터 나올 만한 다른 메시지를 부지런히 찾고 있다. 이때 개념은 관련되는 집합을 여는 조작매체로, 기호작업은 집합을 재구성하는 조작매체로 나타난다. 그 재구성은 집합을 확대하지도 않으려니와 경신하지도 않으며 그저 그것의 변환군을 획득하는 데 그치고 만다. (같은 책, p74)

인용문에서 ‘과학자’라고 말하고 있는 ‘근대 과학자’ 엔지니어들이나, 브리콜뢰르들이나 모두 세계를 알고자 한다. 우리는 그중 전자의 방법에 익숙하다. 엔지니어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우주에게 질문한 뒤 대답을 요청한다. 우주가 오늘 해준 답과 어제 해준 답이 다르다면, 그는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는 말이 엔지니어가 찾는 메시지다. 그것이 우리가 책에서 배우는 물리법칙들, 공식들(=‘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조 삼아 우주 전체를 해석해내는 것이 엔지니어의 과학이다. 그 과정에서 구조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과학적 대상’에서 탈락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브리콜뢰르의 ‘메시지 탐구’는 묘한 구석이 있다. 엔지니어가 개념을 통해 우주를 ‘열고’ 그 안의 진리를 발견해낸다면, 브리콜뢰르는 우주를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져온 이야기 속의 기호들과, 지금 자리에서 길어 올린 기호들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니까 브리콜뢰르는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주에게 묻지 않고, 변하지 않는 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확대’도 ‘경신’도 없이 우주를 재구성하는 것이 그가 찾는 ‘메시지’다. 신화는 매번 창작한다. 하지만 매번 같은 것, 세계 자체를 창작한다. 여기에서 ‘이해한다’는 것의 우리의 표상이 뒤집어져야 한다.

우리는 ‘과학적’ 이해란 대상을 두고, 그 대상 안에 있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신화는 과학적 이해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이해하기’는 묻고, 답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대화하는 자가 되는 것에 가깝다. 열 번째 추장을 둔 표범부족이 이해하는 우주는, 열한 번째 추장을 둔 표범부족이 이해하는 우주와 다르다. 우주는 같은 우주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면면은 죽음과 탄생, 파괴와 생성으로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 (같은 말이지만) 메시지를 구성하는 자의 자리에 따라 만나게 되는 우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리콜뢰르의 ‘세계 이해하기’는, 다시 말해 세계와 관계 맺는 법에 대한 탐구다. 내가 이 자리에서 우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내가 이 세계에 어떻게 발을 디디며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과 분리되지 않는다. 신화를 만드는 자들에게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내가 살아가는 법은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나게 되는 세상의 면면, 사건의 면면은 생존에 직결된 무척 중요한 순간인 것!

신화는 점점 더 많은(다양한) 타자와 사건을 포함한 논리-이야기가 되고자 한다. 브리콜뢰르는 매순간 세계 전체와 관계를 맺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이야기는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과학적 방법이다. 지금 쏟아져 나오는 영화와 소설, 드라마들을 보면서 우리의 호모 사피엔스적 감각은 그 또한 누군가 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과정이라고 느끼는 것 아닐까? 매번의 이야기는 더 넓은 세계를 품어가고자 애쓰는 호모 사피엔스들의 노력인 것이다. 또 그런 노력을 더 많이 한 이야기를 우리는 ‘재밌다’고 느낀다.

scott-webb-ywuH99ygfec-unsplash매번의 이야기는 더 넓은 세계를 품어가고자 애쓰는 호모 사피엔스들의 노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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