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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궁금하다!]전체와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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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3-05 17:15 조회4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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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와 커뮤니케이션

이윤하(남산강학원)

살면 살수록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삶에 대한 무지다. 이 무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론적인(?) 무지이기도 하고, 실제적으로 내 몸-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데려가야 할지 확신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일까? 이런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래서 사는(생존하는) 게 좋은 거라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에 이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허무의 자리로 나를 데려가고 만다.

무엇이 나에게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일까, 라는 질문을 열심히 하고, 또 가장 좋은 삶의 양식을 찾고자 공부하던 친구는 오히려 주변에 대한 불만족과 분노만 키웠다고 했다. 세계 평화를 꿈꾸던 친구는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하지 못하는 것 같은 자기가 지긋지긋해 자기 마음의 평화는 지키기 어려워했다. 자신의 ‘잘 해야 한다’는 마음에 지친 친구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긍정하자는 마음과 좀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상태가 안 좋아지면 추상의 세계로 날아가며 무엇이 좋고, 나쁘다고 할 수 있으랴, 나는 뭘 할 수있으랴, 라며 반복성 허무주의를 앓는다. 

이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나는 행복하게 살지 않으련다’는 방식으로 삶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출구도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삶에 무지한 것인가!

허무주의그래서 생각할수록 출구도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삶에 무지한 것인가!
 

1.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우아’한 인류학자(‘인류’학자라면 모두 우아하시기 마련이지만), 그레고리 베이트슨 선생님은 『마음의 생태학』에서 우주를 읽는 다른 방법을 알려주셨다. 이 방법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뉴턴적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먼저 커뮤니케이션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관계되는 존재나 실체는 메시지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 (중략어떤 사건 또는 사물 또는 관계에 대한 지각은 실재하는 것이다그것은 생리학적 메시지다그러나 사건 그 자체나 사물 그 자체는 이 세계에 들어갈 수 없으며따라서 관련이 없으며그런 의미에서 비실재적이다. (그레고리 베이트슨마음의 생태학정신분열증 이론의 최소 요건책세상, p398)

뉴턴의 우주에서 우리는 사물을 실재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이 어떤 시공간에 왜 놓여있는가라는 ‘맥락’은 괄호를 쳐둔다. 그랬을 때 사물의 실체를 더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메시지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의 사물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를 의자라고 생각하는) 나의 관념,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실체적으로 보면 질서가 없는 것처럼만 보이는 영역, 마음과 관계를 다룰 때에 무척 탁월하다.

의자를 의자라고 생각하는하나의 사물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를 의자라고 생각하는) 나의 관념, 메시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보는 세상이 일면 뒤집어진다. 우리는 사물이 있고 그들 간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모든 것은 메시지고 그것이 교환되는 것이 관계다. ‘나’는 실체가 아니라 경험과 지각의 메시지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한 또 하나의 메시지다. 그 말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수많은 잡음들 속에서 출현하는 하나의 의미이고 정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들어줄(읽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2.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은 관계에 대한 것

지난번에 쓴 글 <말과 팔로 대화하기>에서의 핵심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이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포유류는 ‘팔’로 대화를 해왔다. 위에서 말했듯, 메시지의 교환은 곧 ‘관계’다. 포유류들의 대화 역시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너에게 복종한다’, ‘나는 너에게 화가 나지 않았으니 우리는 좋은 사이다’ 등등.

만약 (늑대지도자의 행동을 말로 번역한다면, ‘그런 짓 하지 마라라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은유적 행동으로 번역된다. ‘나는 너희의 어른이다이 어린놈아!’ 특별히 늑대에 관해그리고 일반적으로 언어 이전의 포유동물에 관해 내가 말하려는 것은그들의 대화가 주로 관계의 규칙과 우연성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같은 책고래와 다른 포유동물의 커뮤니케이션 문제, p560)

그러던 중 신기하게도 우리 인간 종이 구두 언어를 통해 뉴턴적 우주에 적합한, ‘사물’을 지칭하기 좋은 언어, ‘말’을 개발해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무엇보다 “관계보다는 다른 어떤 것에 관해 어떻게 하면 구체적일 수 있는지를 발견”(p561)한 것이라고 베이트슨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이 지구에 ‘관계’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종이 태어난 것이다. 어떤 필요에 의해서 ‘말’이 발명되었는지는 일단 차치하고, 우리 ‘말’의 특성(사물들을 정확하게 지칭하고자 하는) 때문에 우리는 ‘말’을 할수록 사물이 실제로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게 된다.

실제로 존재우리 ‘말’의 특성(사물들을 정확하게 지칭하고자 하는) 때문에 우리는 ‘말’을 할수록 사물이 실제로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은 ‘말이 없던 포유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승현형의 댓글에 답을 해봅시다) 우리가 친구에게 ‘아까 점심 때 비가 왔어’라는 메시지를 들었다고 해보자. 우리는 이 아주 간단한 말도 ‘점심 때 비가 왔다’는 정보로만 들을 수가 없다. 의식은 점심 때 비가 왔구나, 하겠지만 우리 안의 포유류는 그 말을 통해 친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점심 때 비가 왔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할 말이 없는 사이인가보군.’ 등등.

어쨌든 커뮤니케이션 세계에서 실재하는 것은 ‘관계’뿐이다. ‘말’ 뿐만 아니라 모든 몸짓, 소리, 냄새, 기운, 온도 등등이 누군가에게 붙잡혀 해석되길 기다리는 메시지들이다. 아니 그것들은 ‘메시지’가 되기 때문에 실재한다. 우리 자신 또한 계속 관계 맺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은 오늘 할 일이며, 목표며, 효율이며, 하는 것들에 관심이 많은 것 같겠지만 우리의 마음은 늘 ‘관계’에 관심이 많다.

3. 나는 하나의 패턴, 더 큰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

커뮤니케이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단순한 ‘인과론’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당구공 a가 45도의 각도로 공b를 쳤다, 는 식의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 세계는 당구공a와 당구공b로 닫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놓인 ‘맥락’, 또 그 맥락이 놓인 맥락, 그 맥락이 놓인 맥락이 놓인 맥락을 버려둘 수 없다. 하나의 맥락은 더 큰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맥락’의 계층구조는 우리가 커뮤니케이션하고 학습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우리가 대화할 때, 자연스럽게 그 대화가 놓이는 나와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 관계가 놓인 관계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의 사건은 특정한 원인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이러저러한 제한에 걸려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 중 하나가 발현되는 것이다(이를 베이트슨 선생님은 ‘사이버네틱스’적 설명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제한이 많이 걸려있을수록 중복된 결과가 도출될 수 있고, 이것이 세계의 안정성이고 ‘패턴’이다. 즉 시스템을 이루는 일원들 간의 관계 형식이다.

관계형식그리고 제한이 많이 걸려있을수록 중복된 결과가 도출될 수 있고, 이것이 세계의 안정성이고 ‘패턴’이다. 즉 시스템을 이루는 일원들 간의 관계 형식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나’, 인간 개인은 하나의 패턴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다. 나-개인은 “체온, 혈액의 화학, 성장과 발생기간 동안의 기관의 길이와 크기와 모양, 그리고 기타 모든 신체적 특성들”(p651)을 보존한다. 이러한 개인 ‘사회’라는 더 큰 시스템 속에 있고, 사회는 생태계(자연적 생물환경)라는 하나의 더 큰 시스템 속에 있다. 시스템 속에서는 시스템의 일원들이 의존하고 경쟁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나는 생태계라는 맥락 속의 사회라는 맥락에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고, 기관들과 세포들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맥락으로 존재한다.

괴벨스는 방대한 통신 시스템을 가진 독일에서 여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우리 자신의 홍보 담당자들도 아마 비슷한 착각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하지만 사실 지배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선전에 대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말해줄 첩자들을 항상 두고 있어야 한다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민감한 위치에 있다따라서 그는 단순한 일방적 통제를 할 수 없다우리는 단순한 일방적 통제가 가능한 그런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삶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같은 책의식적 목적 대 자연, p667)

베이트슨 선생님을 이렇게 저렇게 따라가보며 생각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세상-실체를 통제할 수 있는 주체로 보지만, 실제로는 맥락들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메시지, 더 큰 시스템의 부분일 뿐이다. 그것을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 형식들을 파괴하고, 따라서 우리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일방적’으로 통제 가능한 시스템(실체)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요소와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스템 바깥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괴벨스처럼 자기가 통제하려는 시스템에 의해 우리 자신도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해 너무 큰 통제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마치 우리 삶이 우리 것인 양 말이다. 하지만 ‘나’ 하나도 수많은 것들의 상호작용이며, 더 큰 맥락들 속에서, 타자들에 의해서 의미를 부여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스템의 부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큰 시스템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 감각을 배워야한다. 지금의 ‘나’는 전체 시스템과 나를 이루는 회로(패턴)가 함께 도출한 결론이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자신을 비난하지도, 자신을 제외한 시스템의 나머지를 비난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나’에게 좋은 것, ‘나’에게 나쁜 것은 시스템과 따로 존재할 수도 없으며, ‘내’가 잘한다는 것은 시스템 바깥에 있지 않다.

안과 밖‘나’에게 나쁜 것은 시스템과 따로 존재할 수도 없으며, ‘내’가 잘한다는 것은 시스템 바깥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 부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큰 시스템의 움직임을 감각하고, 더 큰 패턴들과 같이 패턴화를 이루는 방향이 남는다. 그것이 21세기 인간에게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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