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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ㅣ새로운 신을 만나다] 깨어있다는 것은, 내 안에 빛을 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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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3-11 15:34 조회8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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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다는 것은, 내 안에 빛을 들이는 것

이경아(감이당)

 

항공사 승무원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한 번은 뉴욕행 비행이었는데 한 단체가 탔었다. 가족들로 구성된 종교단체였는데 특이하게도 ‘늘 깨어있으라’라는 글귀가 적힌 카드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이분들은 14시간 뉴욕을 가는 내내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식사 서비스가 끝나고 기내에 불을 끄고 손님들이 잠든 시간이 휴식 시간이다. 그 시간에 뒷정리도 하고 다음 서비스도 준비한다. 그래서 손님들이 빨리 잠들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단체는 밤 비행인데도 정말 잠을 자지 않았다. 요구하는 게 많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손님들이 잠을 안 자고 깨어있으면 그만큼 신경이 더 쓰이고 힘이 든다. 이 단체는 밤인데도 왜 잠을 안 자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분들 가슴에 붙어있는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늘 깨어있으라’ 혹시 저 깨어있으라는 말 때문일까? 나는 동료랑 이런 이야기를 하며 웃은 적이 있다. 깨어있다는 게 뭘까? 그 뜻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하고 넘어갔다.

내가 깨어있지 못하는 이유

내가 미사 때 자주 들었던 말씀 중 하나도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깨어있다는 게 뭘까? 이 글을 쓰면서 카톨릭 교리서를 읽게 되었다. 성당에 열심히 다닐 때는 관심도 없던 교리서를 오히려 요즘 읽다니 뭔가 앞뒤가 바뀐 것 같다. 카톨릭 교리서에 따르면 깨어있다는 것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는 것’과, 세상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방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내 마음을 지키고,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다. 삶에는 유혹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유혹이 없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 유혹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빠지지 않을 때 깨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marina-vitale-t809JJ6r9KA-unsplash다시 말하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내 마음을 지키고,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다.

그럼 나에게는 어떤 유혹이 있는가? 나는 매 순간 여러 유혹 속에 있지만, 특히 식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피곤할 때 과식하는 습관이 나를 괴롭힌다. 이 습관은 오랜 기간 비행을 하면서 생겼다. 비행을 마치고 외국에 도착하면 피곤하니 동료들과 회식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고, 호텔에 돌아와서는 바로 잤다. 시차로 인해 잠이 안 올 때면 먹었고, 그러면 졸리니 그 덕에 잠을 잤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식한 방법이었다. 그때 생긴 피곤할 때 과식하는 습관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이 식탐과 마음을 지키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나는 신앙생활과 식탐은 별개라고 생각했기에 과식이 깨어있지 못하게 하는 거라는 생각은 해보질 않았다. 내가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고기나 밀가루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나에게 식탐은 별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식탐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걸림돌이었다.

일단 과식을 하면 소화하느라 열이 다 위로 몰리고 그래서 더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눕고 싶고, 누우면 졸립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이 혼미하다. 정신이 혼미하니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집중하기가 힘들다. 눈앞의 편안함을 추구하고 싶을 뿐 현실을 직시하기가 힘들고 내 습관대로 생각하면서 망상이 이어진다. 이럴 때 세상에서 좋다고 말하는 것들을 소유하고 집착하는 충동에 쉽게 빠진다. 이 충동을 쫓아가다 보면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종교마다 금식 기간이 있고, 미사 1시간 전에는 공복을 해야 하는 이유다. 배가 불러서는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상관관계는 모르고 미사 가기 전에 밥을 든든히 먹었고 그래서 미사 시간에 잘 졸았다.

카톨릭에서는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3가지 단계가 있다. 정화, 조명, 일치의 단계다. 먼저 유혹이 무엇인지를 알고 고요히 자신을 성찰하는 정화의 단계다. 어떤 욕심이 생겼는지 또는 감각을 즐겁게 하려다 그 기쁨이 지나쳐서 대상에 집착하게 된 상태를 보는 것이다. 조명은 세례를 받아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빛으로 자신이 성찰한 것을 다시 비춰보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다. 내가 성찰한다고 하더라도 어둠 속에서 한다면 명확하게 볼 수 없고 흐릿할 뿐이다. 그러니 내 안에 빛을 들여서 마음을 비추어야 한다. 빛을 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비춰보는 것일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과의 일치 상태로 갈 수 있다. 나는 세례를 받아 빛을 내 안에 들였음에도 빛의 의미를 모른 채 여러 유혹에 빠지며, 심지어 유혹인 줄도 모르는 채로 살아왔다. 나와 내가 만난 종교단체 둘 다 깨어있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 단체는 아마도 깨어있다는 것을 잠을 안 자고 깨어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럼 어떻게 해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aaron-burden-4uX_r8OhJ_o-unsplash빛을 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비춰보는 것일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과의 일치 상태로 갈 수 있다.

필연성을 인식하라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이다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일정한 연장의 양태이다그리고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2정리13)

스피노자에 따르면 관념의 출발점은 신체다. 우리가 관념을 형성하는 것은 내 신체의 변용만을 대상으로 할 뿐이기에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세계를 만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신체를 가지고 있기에 외부세계를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없고 오해와 왜곡 속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가 느끼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고 세계의 부분이라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표상’ 또는 ‘상상’이라고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의 조건이자 ‘타당하지 못한 관념’이다. 우리는 표상으로 인해 사물에 대해 감정이 생기고, 그 감정으로 대상을 보게 된다. 감정으로 대상을 본다는 것은 내 사심과 이기심으로 대상을 만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모든 것이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제일로 명심하고 따라서 불쾌하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온갖 것과 부도덕하고혐오스럽고부정하고비열하게 보이는 온갖 것은 자신이 사물 자체를 혼란스럽고단편적이고어지러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생긴다는 것을 유념한다이런 이유로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며 참된 인식에 장애가 되는 것들즉 미움분노질투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4정리73. 증명)

스피노자적 관점에서 보면 깨어있기 위해서는 정신의 힘을 키워야 한다. 정신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정신력이 강해서 무언가를 참고 견딘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신체의 왜곡에서 생기는 이분법과 감정으로 대상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 사심과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채 대상을 볼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럴 때 사물의 필연성을 인식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선’이고, ‘인식을 방해하는 것이 악’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선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감정이 신체의 왜곡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힘이 빠진다. 악이란 대상을 내 관념과 감정으로 만나는 것이고, 이럴 때 우리는 어둠에 빠져 헤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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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필연성이란 무엇일까? 필연성은 빛이다. 빛이 있으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아침에 뜨는 해를 보라. 그 빛으로 인해 어둠이 걷히고 모든 것이 드러난다. 필연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빛을 내 안에 들이는 것이다. 빛을 내 안에 들임으로서 어떤 충동이나 감정에 휩쓸려가지 않게 된다. 이것이 ‘깨어있는 것’이다. 또한, 빛은 질량이 없으니 모든 것을 다 통과하고, 두루 다 비춘다. 그러니 빛은 이미 내 안에 있다. 단지 내 욕망과 감정으로 인해서 빛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스피노자는 정신의 최고의 선은 신의 인식이며정신의 최고의 덕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4정리 28) 라고 말한다. 내 안에 있는 빛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덕이다. 이런 능력 또한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 예수님이 그 증거다.

유혹을 관찰하라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며 기도하시는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유혹을 안 받으실 줄 알았는데 유혹을 받으시다니. 이렇게 보면 유혹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단식 중이던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육적인 유혹,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이 세상을 주겠노라는 권력의 유혹,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 공중에서 멈추는 기적을 보여주라는 명예의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받은 유혹은 의식주에 관련된 것에서 권력과 명예로 점점 확장된다.

우리는 어떤가? 나는 이런 정도의 유혹을 받고 있지 않으니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는,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님의 유혹을 보면 입고, 먹고, 거주하는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더 부드럽고 좋은 옷을 입고 싶고, 입에 맞는 달고 맛있는 음식을 찾는 것이나 과식, 더 큰 아파트에 대한 유혹…이 뿐인가?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 내가 더 잘나고 싶은 마음, 듣기 좋은 소리를 듣고 싶은 것,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모든 것들이 유혹이다. 사소한 거라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런 유혹은 방치하면 계속 더 큰 유혹으로, 더 큰 욕심으로 향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결코 사소한 것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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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런 모멸에 가까운 유혹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성령의 빛으로 가득 차셨기에 사물의 필연성을 자각하셨고, 이런 유혹을 따라가는 것은 시험에 드는 것임을 더 나아가 어둠에 굴복하는 것임을 아셨다. 예수님은 돌은 빵이 될 수 없으며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님을, 높은 데서 몸을 던지면 당연히 떨어지는 것임을, 이 세상은 어떠한 권력자라도 소유할 수 없음을 인식하셨다. 예수님은 이 체험을 통해 우리는 누구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세상의 필연성을 자각한다면 어떠한 세속적인 욕망에 유혹되지 않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다.

또한, 우리는 신체를 통해서 관념을 형성할 수밖에 없으므로 필연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신체적 조건과 함께 간다고 말씀하신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복음, 26, 41신체적으로 느끼는 감각적 즐거움과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깨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체의 왜곡으로 일어나는 유혹에 끌려가지 않도록 왜곡을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라고 말씀하신다. 깨어있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신체적 조건을 바꾸고 내 안에 빛을 들여 세상의 필연성을 자각하라. 그런 만큼 우린 감정과 충동에서 벗어나 깨어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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