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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ㅣ새로운 신을 만나다] 십자가는 광야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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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6-18 21:58 조회5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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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광야에서 시작된다

이 경 아(감이당)

성당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다. 나는 어릴 적에는 십자고상을 보며 예수님이 참 춥고, 고통스러우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는 설교를 들으며 그 희생에 뭔가 응답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의 짐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좋다고 하는 걸 쫓으며 살다 보니 마음이 메말라 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십자고상은 성당에 가면 당연히 있는 조각품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십자가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복음, 9장, 23절) 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나를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는데 나를 버린다는 것은 무엇이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받은 이유

예수님 당시 십자가형은 인간이 만들어낸 형벌 중 죄인에게 주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사지에 못을 박아 말초 신경의 고통은 극에 달하게 하면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벌이다. 그런데 더 잔인한 것은 자신이 못 박혀 죽게 될 형틀을 스스로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점이다. 죽음으로 이끌 형틀을 짊어지고 가면서 형틀의 무게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감내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기에 채찍질까지 받았다. 말이 채찍이지 채찍 끝에 날카로운 것이 달려있어서 살을 파내는 채찍이다. 예수님은 왜 이 끔찍한 형벌을 받아야 했을까? 예수님의 죄는 다른 죄인들과 달리 사적인 욕심이나 이기적 욕망에서 저지른 게 아니었다.

그 당시 민중들은 통치자의 폭압과 과도한 세금, 율법으로 인해 심각한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폭력과 착취로 권력을 유지했고, 귀족 사제들은 통치자에 부역하면서 오히려 민중을 괴롭혔다. 민중들은 과도하게 부여된 세금을 내지 못하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노예나 천민이 되었다. 또한, 율법은 야훼가 이스라엘민족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이 율법은 초창기 그들 사회의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율법이 나오게 된 배경은 사라지고 그것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만 남아있었고, 불순종하면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율법의 관점에선 심지어 장애인은 부정한 사람이었고, 가난은 의롭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율법의 하나인 정결제도는 사람을 차별했고 부정한 사람이 의로워지기 위해선 제사장에게 돈을 주고 정결함을 증명받기까지 해야 했다. 민중들은 정말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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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쉬어야 하는데 병자를 고쳐주었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손과 그릇을 씻고 음식을 먹으라는 정결례를 강요하는 것을 보고 정결례보다는 사람이 먼저임을 주장했다. 또한, 세리나 간음한 여인처럼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고, 시장으로 바뀐 성전에서 행해지는 장사꾼들의 착취와 불법적인 관행을 고치려고 했다. 천국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여기서 가난은 정말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할 수도 있지만, 정신이 가난한 자를 말한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견고한 자아에 붙들려 있지 않으니 이기심과 욕심에서 벗어난 상태인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착취로 인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데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니 이것은 약자들에게 복음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바리사이인과 유다인들에게는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기득권을 파괴하는 강력한 도전이었다. 또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인기는 그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이었다. 부나 권위에 대한 기존의 척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제국의 권력유지에 방해 요소였다. 예수님은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십자가형을 받았다. 

십자가의 또 다른 의미

십자가는 형벌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이 십자가였다. 우리는 보통 남으로 인한 고통은 물론이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고통도 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오직 타자들을 위해 살다가 고통을 겪었고 십자가에 매달렸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절대적 사랑을 체현하려면 가시밭길을 갈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오는 고통인 십자가를 홀로 감내했다. 고통을 다른 누군가에게 옮기지 않고, 자기 혼자 감당하는 것만이, 고통을 퍼뜨리지 않는 길이며, 아주 작은 폭력이라도 재생산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발적인 고통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적대적이지 않은,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짊어지는 고통이자 희생이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십자가 죽음으로 그 고통을 스스로 감내했다. 

shashank-sahay-Quq2cbfqKiw-unsplash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십자가 죽음으로 그 고통을 스스로 감내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약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파하는 십자가를 기꺼이 졌다. 함께 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기득권이나 가치관을 바꾸지 않고,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약자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선을 갖거나, 자신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다 약자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거나 뜻대로 안되면 오히려 약자에게 적대감을 갖기도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온전히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속적 질서이지 사랑의 질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기득권이나 어떠한 편견도 없이 그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민중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예수님에게 기적이나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고, 병자들은 치유만을 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은 기적이나 일회성의 치유로는 폭력적인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각자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사랑의 질서에 참여할 때 고통에서 해방되고, 세상이 바뀌는 건데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처럼 되기를 원한다면 부자가 되더라도 더 가지려고 하기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지배와 피지배의 위치가 바뀌는 것으로는 세상은 달라질 수 없었다. 이것은 기득권이 바뀌는 것일 뿐 새로운 질서는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메시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당장 자신들의 이익을 원할 뿐이었다. 예수님은 약자들 곁에 머물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함께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민중들의 무지에서 오는 욕심과 비난이었다. 예수님은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좌절을 겪었을까? 결국 민중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현실적인 고통에서 구해주지 않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유다 왕국을 세워주지 않자 등을 돌렸다. 

한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받들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이 충족되지 않자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다. 심지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게 당신이 신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을 보냈다. 또 예수님을 풀어주겠냐는 총독의 질문에 오히려 옆에 매달린 도둑을 풀어주라고 했다. 민중들의 이기심은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원했다. 예수님은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욕심에 눈이 먼 민중들의 무지를 이해하며 그들을 탓하지 않고 그들에게 평화를 빌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나는 조금이라도 억울하다 싶으면 해명하려고 하거나 기분이 나쁜데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상대를 원망하지 않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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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쳤다. 신의 아들이 아닌 인간으로서 하는 절규였다. 대상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하늘과 자신에 하는 절규였다. 이것은 절망이었지만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 절망의 바닥까지 이르고 나서 ‘아버지 제 뜻이 아닌 당신 뜻대로 하소서’ 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은 절망의 끝에 원망이나 포기가 아닌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 자신을 완전히 버림으로서 끝까지 모든 고통을 스스로 짊어졌다. 그리고 신과의 합일을 이루었고 마지막 순간에 하늘의 질서가 이 땅에 이루어졌음을아셨다. 예수님은 기적을 이용해서 고통을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인간의 몸으로 끝까지 겪었다. 그랬기에 우리에게 십자가의 울림이 더 크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라면 그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이었다. 인간이 이런 숭고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직접 보여주셨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 신의 아들이다.

광야와 케노시스

예수님이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건 아마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하며 보낸 40일에 있지 않을까? 예수님은 민중들의 고통스런 삶을 뼛속 깊이 겪으며 이들에게 다른 삶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어느 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갔다. 광야란 불모지이자 사막이다. 가족, 율법, 재물, 명예, 먹을 것 등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늘과 나, 빛과 어둠만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하셨다. 기도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면서 보이지 않는 힘과의 교감이다. 예수님은 기도 중에 많은 유혹을 받았다. 배고픔과 목마름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를 중시하는 세상의 질서와 타협하고 싶은 마음, 나를 드러내고 싶고, 무언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지배욕 등등. 어떤 사회에 속해있을 때는 외부적인 조건들이 나를 이렇게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이런 유혹이 있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이런 이기적 욕망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대면했다. 목숨을 건 기도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욕망을 다 굶기는 ‘케노시스’에 이르셨다. 케노시스란 완벽한 자기 비움이다. 예수님은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인정받고자 할수록, 더 많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려 할수록 그것들의 노예가 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욕망들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고, 원할수록 더 목말라지는 것들이었다. 천국은 이것들에 있지 않았다. 이 욕망들에서 벗어날 때 즉 마음에 애착이 없고 자신이 가진 완고함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광야란 아무것도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막힌 것이 없는 사방이 열린 곳이다. 이렇게 보면 광야는 물리적인 장소이지만 마음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묶여있는 것에서 벗어날 때 모든 것과 연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내 욕망이 탐욕에 묶여있는 한 더 많은 것과 연결될 수 없고 탐욕 안에 갇힐 뿐이었다. 탐욕은 탐욕을 부를 뿐이니 이 세상의 폭력은 사라질 수 없다. 폭력이 사라지고 사랑의 질서 즉 하느님 나라가 오려면 이기적 욕망과 탐욕에서 벗어나야 했다.

ben-white-ReEqHw2GyeI-unsplash이곳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하셨다. 기도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면서 보이지 않는 힘과의 교감이다.

예수님은 케노시스를 통해 보이지 않는 힘 즉 궁극의 실재를 체득했다. 궁극의 실재는 기존의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 부족만 알고, 질투하고 화내는, 율법을 강요하는 그런 신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살아가게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힘, 만물을 살리지만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힘이었다. 예수님은 이 힘을 아버지라 불렀다. 우주는 이 힘으로 가득 차 있었고 온 세상을 연결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자기를 완전히 비움으로서 이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었고 그 연결을 체현할 수 있는 길은 ‘절대적 사랑’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내 안의 광야를 만나고 이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수 있을까?

욕망을 대면하라

살다 보면 이게 아닌데 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바쁘다고, 별수 없다고, 아니면 그 느낌을 인정하는 게 두려워서 그냥 덮어버린다. 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내 안의 광야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내 안의 광야를 만난다는 것은 내 안의 이기적인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 욕망이 어떤 것들인지를 알아야 그것들에서 놓여날 수 있고 그만큼 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이란 오직 자기로만 환원되는 이기적인 욕망을 말한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 [코나투스(conatus)]는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제3부 정리6, 7)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자 하는 코나투스가 있다. 코나투스란 인간에게 있는 무한한 생명력이자 근원적인 욕망이다. 자연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낳고 낳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에게도 타자와 접속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무언가를 하게 하는 원초적 생명력이 내재해 있다. 이 코나투스로 인해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데 코나투스의 발현은 각자 다 다르다. 내가 욕망을 어떤 방향으로 쓰느냐에 따라 내 역량을 증가시킬 수도 있고 감소시킬 수도 있다. 이기심과 욕심에 갇혀있다면 당장의 욕심을 채워주기에 좋을 것 같지만 그런 욕심을 채우다 보면 다른 것들과 다양하게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니 집착하게 된다. 집착은 역량의 감소이며, 그것이 무엇이든지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 폭력은 남에게도 해롭지만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되니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다. 나를 위해서 했는데 결국 나를 해치게 되는 아이러니. 

network-g75dfac3dc_640이 코나투스로 인해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내가 이기적 욕망에 갇혀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왜 원하는지는 모르면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르느라 욕망을 어느 방향으로 쓰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대부분 모르는 것을 행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한다. 예수님 당시 민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고, 그것들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등을 돌렸다. 내가 노예가 된 것은 이런 욕망들에 대해 사유한 적이 없고 당연한 것들이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내 욕망에 대해 질문해 본 적이 딱히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자신의 노예가 되라고 하면 화를 낼 텐데 왜 욕망에는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을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깨닫고 공적인 생활을 시작하며 선포하신 말씀도 이기적 욕망에서의 해방이었다. 욕망에서의 해방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욕망은 우리의 본질이고, 어느 방향으로 쓰느냐만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방향을 돌려 나를 비우고 타자를 만난다면 이때 욕망은 폭력이 아닌 사랑이다. 예수님은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완전한 자기비움을 통해 절대적 사랑의 체현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은 무한한 코나투스의 발현이다. 그러니 십자가란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절대적 사랑이자 무한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즉 십자가를 지려면 나를 비우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러려면 내 욕망을 대면해야 한다. 그곳이 광야다. 내가 가진 욕망이 과연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인지? 그것이 나를 비우는 욕망인지? 채우는 욕망인지? 노예로 살 것인지?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십자가의 여정은 자기가 처한 현실마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날마다이다. 날마다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대면하는 것, 그것이 광야이자 십자가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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