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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궁금하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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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6-21 20:46 조회7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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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혼자가 아니야

이윤하(남산강학원)

생명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존재 조건이지만 동시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중 인간은 시대마다 별별 문제들을 다채롭게 데리고 살아왔는데, 현대의 인간들은 특히 ‘정신적인 문제’ 어쩌구 하는 것을 달고 사는 중이다. 뭐 언제든 문제는 생겼다 사라지고, 죽음은 도처에 있었으나 우리가 밥 먹듯이 말하는 ‘정신적인 문제’에서 문제가 된다고 하는 정신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 문제는 왜 제법 잘 먹고 잘 사는 우리에게 항시 찾아와 있는 것일까?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라는 책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생각한다’는 것의 주어를 숲으로 삼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숲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슨 말인가 싶지만, 현대 인간의 정신적 문제들은 어쩌면 대부분 숲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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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폭주하는 사고, 공황

인간은 외로운 종이다. 살아있었다면 가까운 친척이 되었을 다른 호모종들은 모두 멸종했고, 다른 생물종들은 우리 인간과 대화할 정도로 지능이 높지 않(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지능’을 가진 생명체를 찾기 위해 우주로 신호를 쏘아대는 것 아닌가. 이 너른 우주에서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 말을 들어줄 존재가 정녕 우리 서로뿐인 것인가!

이런 우주적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안도해도 좋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우주적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며, 이전에 우리는 오랜 시간동안 많은 친구들과, 콘의 용어로 하면 많은 ‘자기self’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고립을 자처할 생각이 없다면, 다시금 이 관계들을 회복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도달할 지점을 먼저 던져놓고 시작해보겠다. 우리가 콘과 함께 도달해야 하는 곳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숲이 생각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이 숲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인간이 숲은 생각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숲이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사실을 이해하는 것.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나와 또 다른 인간들, 인간들과 동물들, 생물들과 물질들 등등 비교 속에서 차이를 탐색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같다고 환원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을지, 그 연결과 증폭에 주목해볼 것이다. 콘과 함께 인간 너머의 일반적general 인류학을 탐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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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정을 콘이 직접 겪은 공황과 재접지regrounding 이야기에서 시작하겠다. 콘이 아마존 필드워크를 위해 버스를 타고 루나족의 마을, 아빌라(에콰도르의 한 지역)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폭우 때문에 산사태가 일어나 콘이 탄 버스는 도로 중간에 갇혀버렸고, 간간이 위에서 떨어지는 바위를 맞기도 했다. 콘은 빠져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지만 같은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주민들뿐 아니라 심지어 여행자들조차!) 샌드위치를 만들어먹고 수다를 떠는 등 이 위험해 보이는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오직 콘 혼자서만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what-if(~라면 어쩌지?)’를 상상하기 시작한 콘은 주변 상황에서 벗어나 생각과 함께 멀리 내달렸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 간의 세계 인식의 불일치는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떼어놓았다. 뒤쳐진 나와 함께 있는 것은 미래의 위험에 대한 걱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생각만을 맴돌았던 나 자신의 사고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 더 우려되는 일이 일어났다. 나의 사고가 주변 사람들과 어긋나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항상 믿어 왔던 것, 즉 나 자신의 신체와의 유대감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88쪽)

산이 더 내려앉아 우리 위를 덮치면 어떡하지? 등등의 물밀 듯이 밀려오는 걱정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지 않고, 또 실제 벌어지는 상황과 연결되지 않을 때, 사고는 신체와의 연결성을 끊어버리며 홀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이때 사고는 다른 어떤 것과의 연결 없이도 존재하는 듯 보인다. 몇 시간 뒤 산사태가 잠잠해지고 무사히 산길을 빠져나왔음에도 콘의 사고는 폭주를 멈추지 못했다. 다른 이들과 감각이 공유되지 않는 경험은 곧 콘 자신이 이 세계에 제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맞는가 하는 의심으로까지 이어졌다. 신체와 세계로부터 유리되는 사고, 이것이 우리가 공황이라고 부르는 상태다.

2. 재접지를 위한 기호학

다음 날 아침에도 콘의 사고는 여전히 ‘what-if’의 세계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침착한 척, 사촌과 함께 미사우아이Misahuallí 강둑을 산책하기로 했다. 걷다가 멀리 있는 덤불 속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풍금조를 발견한 콘은 가지고 있던 쌍안경으로 새를 가까이 당겨 바라보았다. 쌍안경을 통해 풍금조의 검은 부리가 보이던 순간 콘은 정신이 돌아옴을 느낀다. 이를 콘은 ‘재접지’라고 쓰고 있다. 사고가 다시 신체에 안착하고, 세계 속으로 위치하는 운동.

말 그대로 ‘집 나간’ 정신은 어떻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가?(지금 생각하니 정신에 ‘집’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언어습관도 흥미롭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콘이 기호학자 찰스 퍼스(Charles S. Peirce)와 테렌스 디콘(Terrence W. Deacon)에게 배워온 기호와 세계의 연관성과 창발성을 들여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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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시끄러운 곳이다. 활기 넘치는animate 곳이고,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걸고 듣고 대답하고 있는 곳이다. 『숲은 생각한다』의 용어로는 기호작용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기호란 무엇인가, 세계를 표현하는 무엇이다. 기호를 실체적인 것으로 정의하기란 무척 어려운데, 세계를 표현하는 양식이면서(즉 세계를 재-현전하는 무엇), 동시에 세계 속에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세계 앞에서 생겨나지만, 세계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기호는 누군가 해석해주기 이전에는 기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호를 해석하는 해석자 또한 기호작용의 효과로 발생한다. 숲은 생각하고(세계는 사고(思考)이고), 숲의 해석자들-자기들은 그 생각의 효과로 생겨난다. 기호는 자기와 자기를 매개하고, 자기와 세계를 매개하고, 또 다른 기호와 기호를 매개하는 ‘사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공황상태를 특징짓는 ‘what-if’적 사고방식 또한 하나의 기호작용이다. 콘과 퍼스는 이 기호작용을 상징적 표상양식(이하 상징symbol)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쓰는 ‘언어’가 속하는 곳이 여기다. 인간을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로 밀어넣을 수 있는 ‘~하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이 가능한 것은 이 기호양식의 특징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아까도 말했듯, 우리만 언어를 쓰고 우리만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기호양식은 전체 숲의 기호 활동 위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고, 또 숲의 사고에서 벗어나있지 않다.

숲의 한 장면으로 들어가보자. 나뭇가지와 비슷하게 생긴 대벌레, 꽃잎과 비슷하게 생긴 벌레, 세계를 기호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이런 닮음의 방식이다. 이를 아이콘icon적 표상양식이라고 부르자. 인간이 쓰는 언어에서는 ‘풍덩’ 같이 하나의 장면(이를테면 묵직한 돌이 연못에 빠지는 장면)을 그대로 떠오르게 하는 닮음의 말이 여기에 속한다. 사고와 물질이 나란히 놓여있는, 대상과 기호가 맞붙어 있는 여기가 기호 작용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다. ‘풍덩’이라는 말은 돌이 물에 빠지는 장면을 재현시키고, 상대가 다음 기호작용을 일으키기를 기다린다.

drop-g30baa5239_640사고와 물질이 나란히 놓여있는, 대상과 기호가 맞붙어 있는 여기가 기호 작용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다. ‘풍덩’이라는 말은 돌이 물에 빠지는 장면을 재현시키고, 상대가 다음 기호작용을 일으키기를 기다린다.

다음 장면은 루나족이 원숭이 한 마리를 사냥하는 장면이다. 나무 위로 도망쳐 숨은 원숭이를 총으로 쏘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옆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거나, 원숭이가 올라간 나무를 흔드는 방법 등이 있다. 이는 원숭이에게 ‘움직이라’는 하나의 기호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옆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나 아래에서부터 흔들리는 나무는 아이콘적으로 원숭이에게 과거의 위험상황을 재현시킨다(흔들리는 나무=나무를 타고 올라오는 포식자). 여기에서 기호 양식이 한 번의 창발emergent을 일으키게 되는데, 지금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나 흔들리는 나무가 미래에 올 위험을 ‘지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콘적 닮음 이상의 기호작용이고, 이를 인덱스index적 기호양식이라고 부른다. 닮음의 증폭이 인덱스를 창발시키는 것이다.

원숭이는 기호의 지시를 받아들여 옆 나무로 건너가기로 한다. 흔들리는 나무를 미래의 위험으로 해석하고 다음 행동을 격발시킨 것이다. ‘움직이는 원숭이’ 역시 다시 하나의 기호가 되어, 이를테면 옆에 앉아있던 풍금조 또한 날아오르게 만든다. 하나의 흔들리는 나무 혹은 쓰러지는 나무(쿵!)는 이런 식으로 숲 전체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인덱스가 될 수 있다. 자, 이제 루나족은 옆 나무로 건너가며 자기의 모습을 노출시키는 원숭이를 총으로 쏠 기회를 얻게 된다.

눈치 챘겠지만 인덱스가 아이콘의 연합 위에서 창발하듯, 우리 언어인 상징은 인덱스의 연합 위에서 창발한다.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기호가 인덱스라면, 상징은 기호와 기호간의 관계를 통해 대상을 지칭한다. ‘원숭이’라는 단어가 원숭이를 지칭하기 위해서는 다른 수많은 기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개미핥기, 멧돼지, 사람이라는 기호들이 있어야 원숭이라는 기호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상징의 기호망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위에서 비교적 지속적이고 고정되어 있고, 이 맥락에 접속하지 못하면 상징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른 나라 말을 못 알아듣고, 사전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고 해도 원어민들이 공유하는 느낌을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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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상징적 기호작용이 인덱스적 기호작용 위에서 창발한다는 것이다. 어떤 기호가 대상을 지시하는 인덱스적 관계가 선행해야, 기호끼리 서로의 의미를 제한하는 상직적 관계가 가능해진다. 또 인덱스적 기호작용은 세계 전체와 닮아있는 아이콘적 기호작용 위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언어-기호작용은 더 근본적인 기호작용의 바탕 위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호작용은 숲의 기호작용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니, 우리의 기호작용은 숲의 기호작용의 일부다.

상징적 기호작용이 가능한 것도 숲이 그러한 기호작용의 발생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숲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퍼스의 용어로는 세계의 “삼차성thirdness”이 상징적 기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쓰러지는 나무처럼 사건을 일으키고, 기호를 격발시키는 사건적 요소가 “이차성secondness”이라면(여기에서는 인덱스적 기호작용이 가능해진다), 삼차성은 숲의 규칙성, 경향, 습관을 말한다. 엔트로피의 증가라던가, 눈송이의 격자모양 같은 것이다. 세계에 이미 규칙성이 있기 때문에, 상징적 기호의 규약성도 가능해진다.

3. 더 큰 전체로의 착지, “우리”가 되고자하는 자기

이제 콘의 공황 이야기로 돌아가자. 콘의 공황상태는 타자와 세계를 공유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상징적 기호작용은 기호와 기호간의 관계가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 없이도 기호작용을 이어갈 수 있다. 이 과정이 길어질수록 공황과 불안에 가까워진다. 대상과의 관계를 잃어가는 상징적 기호작용은 모나드적으로 고립되며, 자신이 출현한 더 근본적인 바탕을 상실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풍금조의 부리는 콘에게 어떤 작용을 일으킨 것인가?

(루시오가 말하고 있는명령형의 !”는 일라리오의 시선이 나뭇가지를 가로지르는 원숭이의 움직임을 따라가도록 그 방향을 가리키는 인덱스로서 기능한다이와 같이 그것은 나무에 숨은 원숭이와 마주하도록 일라리오와 루시오를 정렬시킨다게다가 명령형의 리드미컬한 반복은 나뭇가지를 따라 움직이는 원숭이의 이동 속도를 아이콘적으로 포착한다일라리오 또한 공유할 수 있는 이 이미지를 통해 루시오는 부친이 실제로 원숭이를 볼 수 있는지와 상관없이상처 입은 원숭이가 우거진 수풀 속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같은 책, 113)

일라리오와 아들 루시오가 원숭이를 사냥하는 장면으로 잠깐 다녀왔다. “봐!”라는 기호작용은 일라리오와 루시오가 원숭이와 마주할 수 있는 아이콘적이고 인덱스적인 정렬alignment을 일으킨다. 루시오는 원숭이의 움직임을 아이콘적으로 포착하면서 원숭이와 마주하며, 인덱스적으로 일라리오에게 전달하면서 일라리오와 원숭이를 보고 있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풍금조가 콘에게 일으킨 것 또한 세계와의 아이콘적, 인덱스적 정렬이다. 세계와 정렬된 사고는 더 큰 전체 속에서 자기를 느낌으로써 고립되어가던 기호작용을 세계 속으로 재접지시킨다. 상징적 기호작용은 아이콘적, 인덱스적 기호작용과의 관계 위에서만 창발하며, 따라서 모든 기호작용은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공황은 이 연결이 희미해질 때(하지만 완전히 끊어질 수는 없다)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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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실재는 다른 실재하는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만 감각될 수 있다. 다른 자기가 나를 하나의 기호로 해석해줄 때에만 나는 실재하며, 내가 감각한 경험을 다른 자기와 공유할 수 있을 때에 나는 세계 안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세계를 아이콘적으로 포착하고, 이를 인덱스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나는 하나의 ‘자기’로 발생한다. 살아있는 기호, 살아있는 정신은 늘 다른 기호들 사이에 있으며, 더 큰 실재성으로, 창발하는 “우리”로 존재하기를 욕망한다. 공황과 우울증 및 여러 인간 정신의 문제는 살아있는 기호로 존재하고자 하는, 길 잃은 ‘자기’의, 근원적인 “우리”의 고통을 말해준다.

정신은 더 많은 것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정신을 발생시키는 기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매개하고, 격발시키고, 해석하고, 변화하는 것 말이다. 어딘가 익숙한 말 아닌가? 그렇다, 이것이 생명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생명은 기호작용 그 자체이고, 기호작용을 멈추는 순간 생명으로 존재하기도 멈춘다. 인간 생명은 정신적 차원에서든 물질적 차원에서든 더 많은 것들과 대화해야 한다. 그것이 그 인간을 살게 한다. 더 많다는 것은 많은 수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말은 역시 아닌 것 같다. 더 다양한 기호를 해석할 수 있을수록, 더 많은 것들의 지시를 이해할 수 있을수록, 더 큰 전체 속에서 실재성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많은 것들이 나를 상징의 세계에 고립되지 않게 이 세계에 붙잡아두며 내가 어떻게 존재해야하는지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새를 사랑하는 친구와 두꺼비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친구, 상품으로 온 망고의 씨앗을 틔우는 친구, 물까치와 비둘기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친구, 가로등 아래의 나무를 걱정하는 친구, 막 자라고 있는 아이를 가진 친구가 있다. 이들-기호는 좀 더 생명력 넘치는 기호가 아닐까?

family-g60b1da186_640이들-기호는 좀 더 생명력 넘치는 기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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