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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궁금하다!] 종적 피진pidgin, 경계를 지키면서 가로지르기(2)-그것과 당신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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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8-03 13:01 조회5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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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적 피진pidgin, 경계를 지키면서 가로지르기(2)-그것과 당신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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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하 (남산강학원)

2. 자기self와 혼맹soul blindness

다시 말해 이 자기들의 생태학에서 모든 자기들은 자기로 살아남기 위해 이 우주에 서식하는 혼이 있는 다른 자기들의 혼-질soul-stuff을 인식해야 한다. 이 자기들의 생태학에서 혼을 가진 다른 자기들을 알아볼 수 없고 또 그것들과 관계할 수 없는 무능력에 이르는 혼의 상실, 자기들을 쇠약하게 만드는 이 혼의 상실의 다양한 형식을 기술하기 위해 나는 혼맹soul blindness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이 용어는 카벨(Cavell 2008)에게서 가져온 것으로, 카벨은 이것을 누군가가 타인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204쪽)

자기는 상호주관적인 존재다. 그래서 자기가 다른 자기의 혼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 그는 다른 자기와 동등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고, 자기의 세계-그물망으로부터 소외된다. 이를 에두아르도 콘은 혼의 상실, ‘혼맹’이라고 부른다. 스탠리 카벨(Stanley Louis Cavell)에게서 ‘타인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는’ 상황을 나타냈던 이 용어는 콘에게 와서 ‘자기’의 문제로 넓혀진다.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부류의 너머beyond에서 다른 자기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숲에서의 혼맹이다.

  예를 들어 아빌라 사냥꾼이 혼맹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사냥의 혼을 잃은 사냥꾼은 잡아야 할 다른 동물들을 하나의 자기로 인지할 수 없다. 다른 동물들을 자기로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은 숲속에서 동물들을 식별해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덤불 옆에서 과일을 먹고 있는 페커리 돼지를 그냥 지나치게 될 수도 있고, 개미들이 몰려다니는 걸 보면서도 개미집의 위치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할 수 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사물로 인식하면 살아있는 타자와 맺어야 하는 포식의 관계를 성립할 수 없다.

 

1.jpg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부류의 너머beyond에서 다른 자기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숲에서의 혼맹이다.

  동물들도 혼맹에 빠진 사냥꾼은 포식자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다가와 공격하기도 한다. 혼맹에 빠진 자기는 혼이 박힌 다른 자기에게 사물처럼 인지되어 이용될 위험이 있다. 내가 사냥할 동물도 안 보이지만, 나를 사냥할 포식자도 안 보이기 때문에 잡아먹히기도 쉬워진다. 그러니 다른 자기들을 보지 못하면서 숲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주로 호모 사피엔스끼리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어떤가? 혼맹은 우리에게 익숙한 상태다. 1차적으로 ‘자기 부류 너머’, 호모 사피엔스 종 너머를 인지하고 살기 어렵고, 2차적으로 같은 종인 다른 인간들의 존재도 까먹기 일쑤다. 그럼에도 제법 목숨을 이어가며 살고 있으니, 루나족에게 지금 우리의 도시는 혼 빠진 인간들을 모아놓은 요상한 숲으로 보일 것이다.

  도시의 인간들이 자주 앓는 병 중 하나인 우울증은 혼맹 상태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 혼자 고립된 자기는 더 이상 자기를 행위 주체자로 인지할 수 없을뿐더러,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을 자주 느낀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아니라 세계 속에 같이 사는 다른 자기들의 마음과 동기, 생각 등을 잠정적으로 추측하고 그 추측에 밀려가며 자신의 동선을 결정한다. 그래서 눈을 감고 세계로부터 고립된 인간은 홀로 모든 것을 (눈치 보지 않고)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자기가 어떤 곳에 누구와 살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흐릿한 느낌 속에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조차 잃는다. 

3. 개에게 명령하기

혼맹은 숲에서는 먹힐 위험을, 도시에서는 우울증의 위험을 내포한다. 따라서 자기는 존속을 위해 혼맹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자기에게 존재하는 또 다른 위협은 자기를 잃어버릴 가능성이다. 혼이 자기 너머로 넘어가버려 돌아올 수 없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곤란한 일인 것이다. 잃지 말아야 할 ‘자기’란 역시, 또 무엇일까?

  루나족은 여러 동물들 중 개와 특별히 가깝게 지낸다. 루나족은 사냥에 도움이 되도록 개들을 길들이고, 인간적으로 처신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루나족의 개들은 나태해서는 안되고, 인간을 무는 등의 난폭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고, 짝짓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으면 안 된다. 개는 루나족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이-되어야 하지만, 개 쪽에서만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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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인간보다 숲에 더 가까이 있는 종이다. 개는 본능적을 사냥하고 육식을 하는, 재규어의 속성을 가진 종이기도 하다. 루나족은 개를 통해 숲에서의 사냥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따라서 개는 하나의 ‘자기’이고, 루나족은 다른 사냥감들의 의도와 목적, 관점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만큼 개의 그것들도 읽어내려고 노력한다. 루나족은 개를 인간 쪽으로 끌어들이는 만큼, 개 쪽으로 다가간다. 아니, 개를 교육시킬 때도 루나족은 개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루나족은 개처럼 세상을 보고, 개처럼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개의 관점을 읽는 인간은 (어느 정도는) 개가 ‘된’다.

  그러나 루나족은 아예 개가 되고자 하지는 않는다. 개의 관점은 읽어내야 하지만 개여서는 안 된다. 페커리 돼지의 동선은 읽어내야 하지만 돼지의 동선을 따라다니며 살아서는 안 된다. 재규어가 되어 재규어에게 시선을 되돌려주어야 하지만, 다른 인간을 물어뜯어서는 안 된다. 혼맹에 빠지면 안 되지만, 인간 존재이기를 그만둬서도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경계를 지키면서도 경계를 가로지르는 ‘의사소통의 양식’이 필요해진다. 다른 자기와의 관계는 위험하고 따라서 조심스러워야 하고, 예의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개와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개를 의식 있는 인간적 주체로 대해야 한다.(가령 ‘너’로서, 심지어는 ‘당신’으로서). 그렇지만 개들은 그와 동시에 응답하지 못하는 대상(‘그것’)으로 다뤄져야 한다. 이것이 아마도 벤투라가 푼테로에게 우회적으로 말을 걸기 위해 개과동물 명령법을 사용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과정 중에 푼테로가 주둥이를 벌리지 못하도록 결박한 이유의 일부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에 개가 응답한다면 사람들은 개과동물의 주체성에 진입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특권적 지위를 잃게 될 것이다. 실상 개를 땅에 묶는 것은 개의 동물적 신체를 부인함으로써 개에게 인간적 주체성이 창발되도록 하는 것이다. (같은 책,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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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개와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개를 의식 있는 인간적 주체로 대해야 한다.(가령 ‘너’로서, 심지어는 ‘당신’으로서).

인간은 개가 짖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지만 개처럼 짖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개에게 (특유의) 인간 언어로 말을 건다. 하지만 개가 대답할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루나족은 이러한 제한 위에서 개와 대화하기 위해 ‘개과동물 명령법’이라는 의사소통 양식을 만들어냈다. 이 양식 속에서 개와 루나족은 대화하기 위해 종간 경계를 뭉개면서도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는 않는다. 콘은 이렇게 종적 경계를 허물면서도 지키고자 하는 언어체계를 “종을 횡단하는 피진pidgin”이라고 부른다.

  루나족이 쓰는 피진, 개과동물 명령법에 (콘 선생님을 통해) 살짝 입문해보자. 일단 개에게 피진으로 말을 걸기 위해서는 약물을 먹여야 한다. 왜냐, 여기에는 위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가 짖는 소리만 들어도 개의 생각과 꿈까지 알아차릴 수 있지만, 개는 인간의 말을 그냥 알아들을 수는 없다. 개는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고, 인간은 개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계’ 형식은 숲속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관계 양식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숲의 주인인 ‘영적 주재자’보다 낮은 위계에 있다. 영적 주재자는 인간의 말을 다 알아듣지만(그래서 기도가 가능하다), 인간이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약물을 섭취해 환각상태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을 담당하는 자들이 바로 샤먼이다.

  다시 돌아와서, 개에게 약물을 먹이는 것과 같이 개의 네 발과 입을 묶는 것도 중요한 절차다. 발을 묶는 것은 그가 도망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용문에서처럼 개의 신체를 부정하는 양식이다. 개에게 운용할 수 있는 동물적 신체를 빼앗고, 인간적 주체로 듣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반대로 개의 입을 묶는 것은 인간의 말에 개가 대답함으로써 인간을 개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갈 위험을 방지한다.

  콘이 『숲은 생각한다』에 쓰고 있는 개과동물 명령법은 이렇게 발화된다. “작은 설치동물을 쫓아가 / 그것은 닭을 물지 않을 거야 / 어서 쫓아가 (후략)” 우리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있음에도 기묘한 지점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루나족이 개에게 ‘그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당사자인 개에게 말하고 있음에도 ‘그것’이라는 주어를 통해 루나족은 직접적인 대화를 방지한다. 반면 ‘물지 않을 거야’라는 동사는 (루나족이 쓰는 케추아어에서) 3인칭 동사에 쓰이지 않는 2인칭 동사다. 따라서 루나족은 개에게 명령하기 위해 개를 ‘당신’으로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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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개에게 ‘말을 걸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이미 위험하다. 루나족은 개가 알아듣게 하기 위해 개의 관점을 경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개에게 ‘안 된다’는 부정형의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부정’은 인간의 상징적 영역에서는 간단히 전달할 수 있지만, 비인간적 의사소통의 영역에서는 전달이 어렵다. ‘아니다’, ‘안 돼’를 상징 기호 없이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때 루나족은 개의 관점으로 들어가 부정형 명령을 인덱스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쓴다. 인덱스적 기호의 시작점을 재현하면서도 이어지는 사건은 격발시키지 않는 것이다. 만약 개가 자꾸 닭을 물어죽여서 말썽이라면, 닭을 개 앞에 갖다놓아 사건의 시작점을 재현하고 이어질 사건인 ‘물기’는 불가능하도록 닭을 치우는 것이다. 이렇게 닭이라는 기호와 문다는 기호의 인덱스적 결합을 끊어놓는다(동시에 상징 기호-피진을 통해서는 “그것은 닭을 물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약에서 깨어난 개는 이제 닭을 물지 않을 것이다. 아, 소위 ‘개 소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4. 당신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것으로 대할 것인가?

다른 존재의 말을 알아듣고, 다른 존재에게 말을 거는 것은 이렇게나 어렵다! 동시에 그것은 가능하다. 다른 존재를 ‘자기’로 여길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관점을 경유할 수 있다면. 하지만 여기에는 ‘위계’라는 문턱이 있다. 더 높은 위계를 가진 자의 말을 알아 듣기 위해서는 약물이나 환각, 꿈이라는 매개가 필요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의 위험도 있다. 더 낮은 위계의 존재들과 소통하는 것은 좀 더 쉽다. 하지만 ‘그것’을 나와 동등하게 여기는 것은 내 위치를 상실할 위험을 포함한다.

너무나 다르고 보통은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다양한 부류의 자기들 간의 상호작용에 수반되는 이 위험천만하고 일시적이며 매우 허약한 의사소통의 시도─한마디로 정치─를 우리는 주시해야만 한다. 이러한 시도는 권력이라는 논점과 불가분하게 결부되어 있다. 개에게 말을 걸 때 ‘당신’이라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에 개는 때로 묶여 있어야 한다. “모든 ‘그것’은 저마다 다른 ‘그것’과 맞닿아 있다.” 아빌라 사람들이 그들의 우주에 서식하는 수많은 부류의 다른 존재들과 “관계에 들어서 있기” 위해 고군분투하듯이,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내재하는 ‘그것’과 ‘당신’간의 이 긴장을 잘 풀어가는 것은 끊이지 않는 문제이다. (같은 책, 259쪽)

종적 피진은 “한마디로 정치”다. 무엇보다 “일시적”인, 그렇기 때문에 매번 행해지는 자기들 간 합치의 “시도”다. 나는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과 하나의 자기를 이룬다. 자기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이 “위험천만”한 시도를 우리는 하나의 자기로서 매일같이 해야 한다. 당신을 ‘그것’으로 대할 때에 나는 그와 맞닿아 있는 ‘그것’이 되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면 ‘당신’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것’으로 대할 것인가? 역시 한쪽을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그것’과 ‘당신’을 일시적으로 택하고, ‘그것’과 ‘당신’ 사이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 이것이 종들 간의 의사소통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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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 ‘당신’을 일시적으로 택하고, ‘그것’과 ‘당신’ 사이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 이것이 종들 간의 의사소통 양식이다.

  ‘우리’는 자기라는 동일한 존재 형식을 공유하지만 주변항들과의 관계를 통해 서로 다른 종으로 경계지어진다. 여기에서 관계란, 숲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포식관계다. 즉 누구를 먹고, 누구의 먹이가 되는가가 숲에서 그의 자리를 위계 속에 마련한다. 우리가 다른 것을 먹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 다른 위계의 배치를 갖는다면(일단 포식의 위계는 일직선이 아니고, 얽히고설킨 그물이라고 생각하자),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다. 도시의 호모 사피엔스는 나를 결정짓는 것이 내가 무엇을 먹는지, 무엇에 먹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잘 감각하지 못한다. ‘갈 길 가세요, 전 제 갈 길 갈 테니까’라고 말할 때조차 그것을 듣는 사람을 상정하고 있음을 모른다. 

  도시의 사피엔스는 너무 많은 ‘그것’들 속에 파묻혀 산다. 나를 세계의 전부이자 중심으로 두는 사피엔스는 나를 제외한 세계의 모든 것을 사물로 대한다. 그는 자기가 사라질까봐 두려운가? 사피엔스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길이 없다. 사물에게는 말을 걸 일이 없으니 하나의 사피엔스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점점 좁아진다. 거창하게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의 생명력 넘치는 자기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 못함을 깊이 걱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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