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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ㅣ새로운 신을 만나다] 사랑, 공통개념을 확장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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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11-24 17:42 조회4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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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공통개념을 확장하는 기쁨

이 경 아(감이당)

사랑이 뭐길래?

예전에 114에 전화를 걸면 첫 응대가 “사랑합니다, 고객님”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사랑한다는 말에 서로 민망해했던 기억이 있다. 종교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드라마 속 사랑 이야기에 한 번쯤 그런 사랑을 꿈꾸기도 한다. 이처럼 가장 고귀하면서도 흔한 말이 ‘사랑’이다. 사랑이 삶과 뗄 수 없는 거라는 건 알겠는데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일상적으로 사용해서 그런지 특별한 느낌이 없다. 그러다 보니 당위로만 느껴지고 사랑이 뭔지 오히려 더 고민을 안 하게 되고 알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대체 사랑이란 게 뭘까?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걸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기는 하는 걸까?

  나는 누군가에게 딱히 마음을 열고 사랑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나만의 시비분별에 따라 경쟁 관계로 보거나, 계산에 따라서 움직였을 뿐이다. 그 이면에는 내가 더 앞서고 싶기도 했고, 나를 다 내보이는 게 두렵고, 누군가를 사랑해서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웠다. 내 안에 딱히 대단한 게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상대와 소통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일방통행을 했고, 감정도 당위로 눌렀다. 그러다 보니 남의 감정도 잘 이해를 못 했다. 이런 습관은 속으로는 계산인데 겉으로는 절제의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내 문제를 아는 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연애도 그랬다. 나를 보호하고, 계산하느라 누군가에게 깊이 빠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나와는 전혀 다른 세심하고 헌신적인 상대를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가족에 헌신적인 사람이다. 처음엔 이런 헌신이 좋았고 신기했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하느라 바빠지자 남편은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고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동안 가족에 헌신해왔다. 하지만 이제 나이도 들고, 회사 일도 힘든 상황에서, 내가 새로운 삶을 찾아 즐겁게 공부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즐겁게 지내는 게 왜 불편한 걸까? 사랑한다면 상대가 즐겁기를 바라야 하는 게 아닌가? 남편과 나는 이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남편은 내가 자기랑 있을 때보다, 공부할 때 더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질투가 났다고, 나를 독점하고 싶은데 공부에 뺏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공부해서 가족들과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느끼고는 있기에 이런 소유와 질투심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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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잔머리를 굴리는 방식이나, 남편의 헌신과 소유욕, 이 둘 다 일방통행이지 교감은 아니다. 우리는 그토록 사랑을 원하면서 결국은 왜 이런 식의 사랑을 하는 걸까? 이런 사랑의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소유에서 공통개념으로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일 뿐이며, 또한 증오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에 지나지 않는다…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사물을 현실에 소유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반면…(3부, 정리 13, 주석)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인데, 대상을 원인으로 해서 내 안에 생기는 기쁨이다. 기쁨의 원인이 대상에 있다 보니 ‘인간의 본성상 기쁨을 유지하고, 슬픔은 피하려고 하기’에 대상을 소유함으로서 기쁨을 유지하려고 한다. 대상은 고정되어있는 게 아니라 변할 수밖에 없는데도 대상에게서 기쁨을 찾으니 대상에 집착하게 되고, 왜소해진다. 이로 인해 기쁨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슬픔에 빠지게 된다. 남편도 그랬다. 나를 사랑의 원인이라 여겼기에 소유하고 구속하려고 했다. 우리 둘 모두 시절인연이 바뀌었는데 그 이치를 알지 못하니 내가 변했다고 서운해했다. 이것은 남편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원인으로 해서 기쁨을 얻을 때 즉 수동적인 사랑이 겪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럼 사랑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물론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 역량 즉 기쁨이 커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첫걸음은 ‘공통개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공통개념이란 타자와 나 사이에 있는 공통적인 부분을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공통적이며, 부분의 속에도 전체의 속에도 똑같이 존재하는 것은 타당하게 파악될 수밖에 없다.(에티카 제2부, 정리 38) 신체가 다른 물체들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은 보다 많은 것을 타당하게 지각하는데 더욱 유능하다.(에티카 제2부 정리 39, 계)

우리는 타자에 대해 자신의 신체의 변용만을 아는 부분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부분적인 인식으로 인해 자신의 변용에만 머물며, 감정의 원인을 대상에서 찾는다. 이로 인해 갈등과 폭력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능력의 감소이자 슬픔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변용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로에게 공통적인 것을 안다면 타당한 인식이다. 타당한 인식은 능력의 증가이기에 기쁨이다. 그러니 기쁨의 증가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타당한 인식을 하는 것이며 이것은 신체적 공통성을 형성하는 것과 같이 간다. 신체적 공통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타자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공통성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통성은 관계 안에서 신체적 변용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지 혼자 책을 읽는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러니 수동적인 사랑에서 벗어나려면 타자와 신체적으로 더 많은 공통성을 형성해야 하고 그럴수록 기쁨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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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와 남편이 가진 공통성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 공통관념을 형성할 수 있을까?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일치와 불일치점을 찾는 과정이 공통성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우리의 갈등의 원인에는 남편도 나도 원인으로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른 것과 연결 속에 존재하기에 대상 너머의 다른 것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갈등의 원인을 봐야 한다. 여기서 불일치를 발견하더라도 우린 그 사이에 불일치라는 공통성을 형성할 수 있다.

  나와 남편은 가정을 유지하고 싶고, 서로 친구처럼 잘 지내고 싶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의 갈등에는 각자가 가진 불편함이라는 공통성도 있다. 이 불편함에는 가족에 대한 생각의 불일치라는 공통성이 있다. 남편은 사랑을 소유라고 여겼기에 가족은 늘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리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거느려야 하니 자신이 헌신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통해 가족은 소유가 아니라 각자가 더 넓은 관계 속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베이스캠프’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내 생각이 바뀐 것을 남편과 충분히 공유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내가 마음 편히 공부하는 데는 남편의 배려가 있었는데 이것을 당연시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나는 내 신체의 변용만을 전부라고 여겼기에 나에게는 갈등의 원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화를 하다 보니 이런 불일치 외에도 우리의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에는 가부장적인 사회의 영향과 스위트홈에 대한 망상, 자본주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화폐화하기에 대상이나 감정처럼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우리가 느끼는 우울이나 불안은 이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소유욕에서 온다. 우린 모두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는 공통성도 알게 되었다.

  나와 남편은 갈등의 원인을 알게 되면서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 늘어났다. 둘의 신체의 변용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신체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더 많이 갖게 됨으로서 앎이 확장되었고 그만큼 서로의 능력이 증가했다. 남편은 그동안 사랑이라고 착각해온 자신의 소유욕을 보고 나니 좀 가벼워졌다. 갈등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런 가벼움은 남편에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기쁨으로 나타났다. 이 기쁨은 남편으로 하여금 고전을 읽고, 자신의 삶에 대해 질문하고, 가족만이 아니라 물질의 소유에 대해서도 생각을 바꾸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나 또한 내 속도가 교감이 아니라 일방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공부하며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나 이해 안 되는 것들을 남편과 더 나누려고 한다. 이것은 공부의 동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surface-S_YOuAUMm2o-unsplash이제는 공부하며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나 이해 안 되는 것들을 남편과 더 나누려고 한다. 이것은 공부의 동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랑이 복음인 이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동안 이 말씀도 내가 가진 사랑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소유나 당위로서의 희생으로 받아들였다. 남편이 가족에게 헌신하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가족을 소유하려고 했다면, 나는 이웃에게 베풀고 희생함으로서 내가 더 나은 존재라는 약간의 우월감을 소유하려고 한 것 같다. 나의 나눔에는 전능한 신이 저 위에서 사랑을 베풀듯이 나도 위에서 아래로 베푼다는 시혜와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희생에 대한 대가를 신으로부터 받으려는 계산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말씀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예수님 시대는 로마제국의 압제로 인해 굶주림과 폭력이 일상화된 상태였다. 예수님은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사랑을 설파했다. 예수님이 말한 사랑은 누군가에 대해 수동적 감정으로서의 애정이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좁은 자신만의 변용에 머무르지 말고 타자에게 다가가 공통성을 형성하고 더 나아가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도움을 주라는 의미인 듯하다. 일방적인 도움이 아닌 공통성을 기반으로 할 때 서로의 완전성 즉 기쁨이 증가하게 된다. 이런 기쁨을 일상에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예수님 말한 사랑인 것 같다. 예수님은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실천법을 알려주신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의인들이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마실 것을 드렸고, 나그네 되신 주님을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입을 것을 드렸으며, 돌봐드리고 감옥에 찾아갔냐고? 되묻는다. 그러자 예수님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35~40절)

maja-petric-vGQ49l9I4EE-unsplash사랑이란 이 공통성을 바탕으로 상대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고 상대에게 필요한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랑은 순환이지 교환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나는 사랑을 일대일의 교환이라 여겼다. 다시 말하면 대상이 나에게 기쁨을 줬다고 여겼기에 내가 받은 것을 꼭 그 대상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일대일의 관계가 아닌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자신에게 한 거라고, 교환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신다. 알고 보면 나는 이미 수많은 타자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 말없이 주기만 하는 태양과 심은 것을 절로 나게 하는 땅이 그러하고, 식탁 위에 올라오는 일용할 양식 등등이 그러하다. 나는 이미 타자들에게 받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나도 이 사랑을 일대일의 관계를 넘어서 세상을 향해 순환시켜야 하는 건 당연하다. 이것은 내가 이미 타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렵고 힘든 자 외에 나그네와도 공통성을 형성하라고 하신다. 이 당시 나그네는 어느 공동체에 속해 있는지 모르기에 살인이나 폭력을 저질러도 제재를 받지 않는 적대적 존재였다.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존재까지 공통성을 확장하는 것.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아들, 딸이라는 점과 슬픔이 아닌 기쁨을 원한다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란 이 공통성을 바탕으로 상대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고 상대에게 필요한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에게 물을, 나그네에게는 따뜻하게 대함으로서 그들의 고통과 번뇌를 덜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으로 인해 서로의 기쁨이 증가하고 기쁨 속에서 우리는 공존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이야말로 복음이다.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폭력으로 얼룩진 슬픔에서 벗어나 서로 기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을 확장시켜 타자와 나와 예수를 분리하지 않는 것, 즉 외부가 없는 것이 예수님이 말한 절대적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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