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청년들이 창조의 욕망인 성욕을 게임의 레벨을 올리는데 소모한다. 나도 처음에는 게임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 바둑을 배우면서 다른 게임들이 시시해졌다. 보통 게임들과 달리 바둑은 무한한 전략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5000년 이상의 정신 수련 도구였던 바둑을 끝없는 경쟁의 게임으로 변질시켰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오르기 힘든 단계에 막히자 ‘승리를 통한 짧은 쾌감을 위해 과연 수십 년의 노력을 받쳤어야 했나’라는 깊은 허무감이 몰려왔다. 빨리 많이 이겨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몸과 정신이 피폐해졌다. 끝없는 사냥에 지친 노쇠한 사자처럼 존재의 이유가 물음표로 던져졌다. 젊음을 받친 승리와 쾌락의 끝이 공허함이라면, 과연 인류의 스승들은 청년시절 어떻게 정력을 해결했는지 궁금해졌다.
공자는 15세에 학문의 뜻을 두고 평생 정진했고 붓다는 29세에 세속의 욕망을 끊고 지혜를 찾아 출가했으며 예수는 33세로 죽을 때까지 진리와 사랑을 설파했다. 그들 모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왕성한 청년의 에너지로 지성을 창조하고 지혜를 나눔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따라할 수 있다. 바둑을 예로 들어보자. 바둑은 흑백이 땅을 매번 새롭게 나누어 갖는 상생의 놀이다. 내땅=81집 상대땅=90집, 내땅=35집 상대땅=30집 등 바둑판 361칸에서 땅을 나누어 갖는 흑백의 조합은 무한하다. 고수로 갈수록 자신과 타자의 차이는 1~2집으로 줄어들어 더욱 공평하게 땅을 공유한다. 미세한 차이를 겨룸으로 한 수 한 수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다. 이러한 깊은 수읽기는 시시각각 새로운 공간의 패턴을 창조한다. 깊은 경지인 삼매경에 도달하면 한 수를 둘 때마다 흑들과 백돌이 어우러져 섞인 모양이 지극히 조화롭게 변화한다. 시공간의 완벽한 균형과 조화, 이것이 ‘신의 한수’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 때의 기쁨은 경쟁에서 오는 쾌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여유와 평안에서 오는 충만함을 만끽하고 후자는 긴장과 조급함으로 승리의 갈증에 시달린다. 이렇게 너와 나, 이분법적인 경쟁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서로의 지성을 겨루며 공존을 열어갈 수 있다. 이처럼 바둑에서 지성을 창조할 수 있다면 다른 일상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