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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3] 지성을 연마하라, ‘썸씽’이 생기는 그날까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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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3-23 07:58 조회2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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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을 연마하라, ‘썸씽’이 생기는 그날까지 (1)

근 영(글공방 나루)

 澤山咸(택산함)

咸, 亨, 利貞, 取女吉. (함, 형, 리정, 취녀길)

함괘는 형통하니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롭고, 여자에게 장가들면 길하다.

初六, 咸其拇. (초육, 함기무)

초육효, 엄지발가락에서 감응한다.

六二, 咸其腓, 凶, 居吉. (육이, 함기비, 흉, 거길)

육이효, 장딴지에서 감응하면 흉하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길하다.

九三, 咸其股, 執其隨, 往吝. (구삼, 함기고, 집기수, 왕린)

구삼효, 넓적다리에서 감응한다. 지키는 바가 상육을 따름이니 나아가면 부끄럽다.

九四, 貞吉, 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구사, 정길, 회망, 동동왕린, 붕종이사)

구사효,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하여 후회가 없어진다. 초육에게 왕래하기를 끊임없이 하면 친한 벗만이 너의 생각을 따를 것이다.

九五, 咸其脢, 无悔 (구오, 함기매, 무회) 

구오효, 등에서 감응하니 후회가 없으리라.

上六, 咸其輔頰舌 (상육, 함기보협설) 

상육효, 광대뼈와 뺨과 혀에서 감응한다.

‘유교걸’, ‘유교보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노출이 있는 옷을 싫어하고 셔츠 단추는 절대 두 개 이상 풀지 않으며, 이성 앞에서는 낯을 가리고 내외하거나 연애를 하더라도 스킨쉽은 꺼리는 친구. 그러니까 보수적인 마인드를 가진 청년들, 특히 남녀관계에 대해 고지식한 태도를 보이는 젊은 친구들을 희화해서 부르는 말이 유교걸, 유고보이다. 이를 조선의 사대부들이 들으면 뭐라고 했을까?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흐뭇해했을까? 여하튼 MZ세대에게 이 말은 고루한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들을 가볍게 놀려먹을 때 쓰기 딱 좋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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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儒敎), 조선왕조가 500년이란 긴 세월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준 힘. 그 힘은 이제 꼰대스러움과 고지식함, 그리고 고리타분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에게 유학은 딱딱하게 굳은, 생의 활기를 억누르는 학문으로 인식된다.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들을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예(禮)를 앞세워 도덕 원칙으로 삶을 재단하는 사상. 무엇보다 남녀 간의 정을 비천한 것으로 여기고 터부시하는 낡고 갑갑한 전통. 하여 한때는 자유연애가 혁명 그 자체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처럼 유교걸, 유교보이라는 농담도 주고받는 것이리라. 

그런데! 먼저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정작 유학의 뿌리가 되는 공자는 남녀 간의 정을 하찮게 여긴 적이 없었다는 것. 공자는 고대로부터 전해지던 시들을 편집해서 300편짜리 시의 경전, 『시경(詩經)』을 편찬했다. 시란 모름지기 감정의 정수다. 하여 『시경』에는 감정들 중에서도 가장 찐~한 감정, 요컨대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노래들이 많이 담겨있다. 이런 책을 공자는 손수 추렸고, 필독서로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의외이지 않은가. 애틋한 사랑 노래가, 가슴 아픈 이별 노래가 유학의 필수 커리큘럼에 들어있다니! 공자는 『시경』을 한 마디로 이렇게 평한다. “사무사思無邪, 삿된 생각이 없다.” 머리를 굴리지 않는 감정의 울림은 진솔할 수밖에 없고, 하여 삿된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시경』은 이런 마음자리를 전하는 책이었고, 그 속에서 남녀 간의 정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아니 빠져서는 안 되는 마음의 길이었다. 

공자의 이런 시선에는 그가 가장 좋아한 책, 항상 가까이에 두고 읽고 또 읽은 책, 『주역』이 녹아있다. 천지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담은 『주역』은 공자가 가진 우주관의 바탕을 이룬다. 『주역』은 크게 ‘상경’과 ‘하경’으로 나뉜다. 상경이 천지 만물이 생겨나는 보편적 원리를 다루고 있다면, 하경은 그 원리가 어떻게 인간의 삶에서 펼쳐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하경의 시작이 무엇이냐 하면, 남자와 여자의 교감을 상징하는 ‘택산함(澤山)咸)’ 괘인 것이다. 

couple-g6a19d55d7_640그런데! 먼저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정작 유학의 뿌리가 되는 공자는 남녀 간의 정을 하찮게 여긴 적이 없었다는 것.

함(咸)은 느낀다, 감응한다는 ‘감(感)’과 통한다. 그런데 감(感)이 아닌 함(咸)을 쓴 것은 함이라는 글자에 담긴 ‘모두 함께’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느낀다는 것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자, 모두를 함께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괘상으로 들어가 보면, 위에는 기쁨을 상징하는 태괘가 있고 아래에는 멈춤을 상징하는 간괘가 자리한다. 그런데 이 태괘와 간괘를 인간사로 가져오면, 각각 소녀(少女)와 소남(少男)을 의미하게 된다. 해서 택산함은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함께 감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재미나지 않은가. 천지자연의 근원에 남녀의 정이 있다니. 오묘하지 않은가. 인륜의 시작이 남녀의 감응이라니. 이것이 주역이 그리는 자연, 주역이 바라보는 우주다. 

서구의 근대적 사유는 자연의 이치도 인간다움도 합리적 이성 위에서 찾고자 했다. 합리적 이성이란 내 것과 네 것을, 이것과 저것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능력이다. 달리 말해 각자의 몫을 계산하고 그 경계를 나누는 작업이 합리적 이성이 하는 일이다. 해서 감응이나 느낌은 비합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성보다 한 수 아래의 것, 삶의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역은 이른바 비합리적인 것들에 주목한다. 감응이야말로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고, 인간 삶을 굴리는 바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역의 우주는 나와 너의 경계를 명확히 가르는 우주가 아니라, 그 경계를 가로지르며 너와 내가 감응하고 함께하는 우주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주역은 느낌이나 감응을 우주의 원리라 하는 걸까? 어려울 거 없다. 서로가 서로를 느끼고 감응해야 ‘썸씽’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게 썸씽이 있어야 뭔가 낳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요컨대 천지 만물이 창조되는 요체, 거기에는 감응이 있다! 하지만 진정 새로운 것이 창조되려면 비슷한 것들이 만나서는 안 된다. 비슷한 것들은 비슷한 것들만을 낳을 뿐이다. 하여 함괘의 괘사는 말한다. 취녀길(取女吉), 여자를 취하면 길하다. 이는 단지 생물학적인 여성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 그것은 남자의 외부, 남자의 타자성이다. 복제가 아닌 생성, 그것은 서로 다른 것들, 나아가 반대되는 것들이 만나서 이루는 조화다. 양에게는 음이, 남자에게는 여자가 감응과 창조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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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왜 함괘가 소녀인 태괘와 소남인 간괘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라. 감응의 진수가 무엇이겠는가. 뭐니 뭐니 해도 젊은 남녀의 그 찐한 교감이 아니겠는가. 청춘의 에로스, 어떤 계산도 없기에 투박하지만, 그렇기에 진솔하여 삿됨이 없는 정(情). 주역의 우주는 이처럼 정(情)-다움의 자연이고, 에로스의 기쁨으로 움직이는 우주다. “함괘가 말하는 우주는 교감의 우주이며, 느낌의 우주이며, 결혼의 우주이다.……음양의 화합은 생성의 기본이다. 남녀의 발랄한 교감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자연의 에로스(이상을 향한 충동)이다. 남녀의 교감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에 공통되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모든 식물의 열매도 결혼의 산물이요, 쌀도 벼의 꽃이 교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결실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쭉정이가 되고 만다. (도올 김용옥, 『도올 주역 강해』, 통나무, 424쪽)” 

이런 감응의 모습을 함괘는 사람의 몸에 빗대어 설명한다. 겨우 엄지발가락만 감응하는 미약한 초효에서 시작하여 이효의 장딴지, 삼효의 넓적다리를 지나면 감응의 본체가 되는 사효가 나온다. 九四, 貞吉, 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구사, 정길, 회망, 동동왕래, 붕종이사. 구사효,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하여 후회가 없어진다. 초육에게 왕래하기를 끊임없이 하면 친한 벗만이 너의 생각을 따를 것이다. 구사효는 앞의 효들과 달리 몸을 상징하는 표현 없이 곧바로 감응의 도를 말하고 있다. 감응이란 본래 마음[心]의 작용이기에 굳이 이를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마음의 감응은 ‘올바름’을 따라 일어난다. 여기서 올바름이라 도덕적 원칙이라기보다는 감응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함괘의 상전(象傳)은 이를 “허수인(虛受人)” 마음을 비워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이 마음을 텅 비우면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마음이 꽉 차면 받아들일 수가 없다. 마음을 텅 비우는 것은 내가 없는 것이다.(정이천, 《주역》, 심의용 역, 글항아리, 636쪽)” 그렇다. 마음이 비어있어야 마음의 감응이 일어난다! 감응한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나’로 가득차 있으면 어디에 ‘너’가 들어올 자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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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때로 불평을 하곤 한다. 나를 아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없다고. 정말로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괘는 말한다. 설령 그런 소중한 인연이 찾아왔다고 해서 모두가 그 인연을 받아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내 마음에 그것을 받아들일 빈자리가 없다면 그런 기회가 아무리 많이 찾아와도 별 소용이 없을 거라고. 그러니 누군가의 마음을 받고 싶다면, 우선 나로 그득한 마음을 비워내야 한다. 함괘의 괘상에서 소남인 간괘가 자신을 내려놓고 소녀의 아래에 자리해 있듯이. 

사랑이 우리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랑이란 걸 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만난다. 비로소 타자라는 존재와 접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타자들을 만나지 않았느냐고? 천만에! 그건 그저 그런 타인일 뿐이다. 적당히 무시하고 적당히 맞춰주면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미적지근한 관계. 나를 건드리지 않는 딱 그만큼만 함께할 수 있는 관계. 하지만 사랑은 다르다. 사랑을 하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자신을 비우는 훈련을 하게 된다. 상대가 너무 좋아서 기꺼이 나를 내려놓기도 하고, 때로는 한바탕 싸움으로 자신을 내려놓기도 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평상시라면 누가 건드릴까, 혹여 손해 볼까 꼭 붙잡고 있던 자아가 사랑 앞에서는 이렇게 내려놓아 진다니. 사랑을 할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본체도 이 지점이다. 자아라는 좁은 세계를 벗어난 상쾌함,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를 위하여 마음을 쓰고 있음이 주는 즐거움. 사랑은 그렇게 우리를 허수인(虛受人)의 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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