賁(비), 亨(형), 小利有攸往(소리유유왕).
장식으로 꾸미는 것은 형통하니, 나아갈 바가 있는 것이 조금 이롭다.
산화비山火賁의 일차적인 뜻은 ‘수식한다, 장식한다’이다. 우리말로 ‘꾸민다’는 뜻이다. 이 비賁괘사의 설명으로 정이천은 “일을 진행해 나아가서 이로울 수 있는 것은 본래적인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장식으로 꾸미는 도는 그 본래적인 진실을 증가시킬 수는 없고, 단지 거기에 아름다운 문체를 더해줄 수 있을 뿐이다(정이천 주역 p468)”라고 하였고, 도올은 “문명의 명(밝음)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야만 한다. 문명은 그침止의 한계를 가질 때 진실로 밝을 수 있다. 하여튼 비賁괘는 문명에 대한 진단이다(도올 주역강해 p331)”라고 하였다. 괘상( )을 보면 문명, 꾸밈을 상징하는 이離괘의 화려함을, 멈춤을 나타내는 간艮괘가 막아서고 있는 모양이다. 꾸밈에도 멈춤이 있어야 천지를 빛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형식이 지나쳐 내용의 본질을 살리지 못한다면, 마땅히 지나친 형식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우리를 둘러싼 ‘꾸밈’ 즉, 형식, 문명은 우리의 내용-몸과 마음을 살리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꾸밈의 멈춤을 비웃듯,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많은 것으로 치달려 오히려 우리의 삶, 몸과 마음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실 디지털로 신속, 편리하게 일을 처리하고 남은 확보된 시간에 우리는 정작 무엇을 하고 있나.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OTT, 먹방 등 눈, 귀, 입 등 감각만 분주하기 십상이다. 주문한 다음 날 코앞에 놓이는 물건들, 버튼하나로 밥하고 청소하고 세탁하는 집안일, 스마트폰의 가벼운 터치로 많은 것이 해결되는 사회시스템 등, 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일상으로 밀려오는 온갖 화려한 문명은 실제의 나의 삶, 우리의 삶을 생生하고 있는 걸까. ‘편리’의 꾸밈이 최대치로 치닫고 있는 이곳에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높게’를 나타내는 이離괘만 보일 뿐, 간艮괘의 멈춤은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