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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山火賁(산화비) – 지나친 편리함을 사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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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8-29 09:10 조회1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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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火賁(산화비) – 지나친 편리함을 사유함

김 영 자(감이당 토요주역)

방바닥을 손걸레로 닦은 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허리를 접어 엎드린 채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오른손으로 반복해서 밀고 당기는 작업이 점차 엄두가 안 나기도 했지만 한 편 ‘뭘 닦냐’ 였다. 그러다 자동 손걸레가 있는 청소기로 바꾼 후엔 ‘암 닦아야지’로 마음이 돌변했다. 청소기 헤드를 물걸레로 바꾼 뒤 바닥에 대고 버튼만 누르면 끝. 세상 편했다. 그런데 얼마 전 무슨 바람인지 몇 년 만에 아날로그 밀대를 잡았다. 묵혔던 걸레를 빨아서 밀대에 단단하게 고정한 뒤 방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몇 분이나 지났나 얼굴이 붉으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발바닥은 뜨근뜨근 심장도 팔딱팔딱 뛰어올랐다. 마루에서 시작하여 이 방 저 방으로 헉헉거리며 돌아다니는 사이 열이 몸 전체로 차올랐다.

수동과 능동의 차이인가. 버튼을 누르고 한 손으로 돌렸을 때와는 다르게 밀대로 밀자니 온몸을 사용하여 힘껏 밀어야 했다. 땀이 나고, 허리도 아프고,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발에도 자극이 밀려오니, 몸 곳곳의 감각들이 생생하게 하나씩 뿅뿅 열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벌개진 얼굴로 구석구석 열심히 밀고 있는 자신이 낯설고도 신기했다.

멈출 수 있어라

(), (), 小利有攸往(소리유유왕).

장식으로 꾸미는 것은 형통하니나아갈 바가 있는 것이 조금 이롭다.

산화비山火賁의 일차적인 뜻은 ‘수식한다, 장식한다’이다. 우리말로 ‘꾸민다’는 뜻이다. 이 비賁괘사의 설명으로 정이천은 “일을 진행해 나아가서 이로울 수 있는 것은 본래적인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장식으로 꾸미는 도는 그 본래적인 진실을 증가시킬 수는 없고, 단지 거기에 아름다운 문체를 더해줄 수 있을 뿐이다(정이천 주역 p468)”라고 하였고, 도올은 “문명의 명(밝음)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어야만 한다. 문명은 그침止의 한계를 가질 때 진실로 밝을 수 있다. 하여튼 비賁괘는 문명에 대한 진단이다(도올 주역강해 p331)”라고 하였다. 괘상( )을 보면 문명, 꾸밈을 상징하는 이離괘의 화려함을, 멈춤을 나타내는 간艮괘가 막아서고 있는 모양이다. 꾸밈에도 멈춤이 있어야 천지를 빛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형식이 지나쳐 내용의 본질을 살리지 못한다면, 마땅히 지나친 형식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우리를 둘러싼 ‘꾸밈’ 즉, 형식, 문명은 우리의 내용-몸과 마음을 살리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꾸밈의 멈춤을 비웃듯,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많은 것으로 치달려 오히려 우리의 삶, 몸과 마음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실 디지털로 신속, 편리하게 일을 처리하고 남은 확보된 시간에 우리는 정작 무엇을 하고 있나.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OTT, 먹방 등 눈, 귀, 입 등 감각만 분주하기 십상이다. 주문한 다음 날 코앞에 놓이는 물건들, 버튼하나로 밥하고 청소하고 세탁하는 집안일, 스마트폰의 가벼운 터치로 많은 것이 해결되는 사회시스템 등, 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일상으로 밀려오는 온갖 화려한 문명은 실제의 나의 삶, 우리의 삶을 생生하고 있는 걸까. ‘편리’의 꾸밈이 최대치로 치닫고 있는 이곳에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높게’를 나타내는 이離괘만 보일 뿐, 간艮괘의 멈춤은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편리’의 꾸밈이 최대치로 치닫고 있는 이곳에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높게’를 나타내는 이離괘만 보일 뿐, 간艮괘의 멈춤은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수레를 버려라

3보 이상 자동차로 움직인 지 거의 30년이다. 일을 그만둘 때는 차를 없애고 두 발로 움직여 환경도 생각하고, 몸도 건강해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좀처럼 자동차의 편리함과 빠름이 포기되지 않았다. 빨리 뭔가를 처리해야 할 일도, 딱히 가야 할 곳이 없는데도, 자동차가 주는 신속, 편리함에 몸과 마음이 이미 깊게 묶여져 있는지 좀처럼 결단을 내리질 못했다.

 

初九(초구), 賁其趾(비기지), 舍車而徒(사거이도)

초구는 발을 꾸미니수레를 버리고 걷는다.

 

초구효는 강양한 자질이다. 수레를 버리려면 유약해서는 안 됨을 말한다. 강한 마음으로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정이천은 “군자는 의리에 비추어 마땅하지 않다면 값비싼 수레일지라도 버리고 차라리 걸어간다”(정이천 주역 p475)라고 하였다. 필요치 않는데 습관처럼 뭔가를 고집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의리에 비추어 마땅하지않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값비싼 수레는 아마 지나친 꾸밈, 장식일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값비싼 수레는 자동차이다. 그런데 수레를 버리려면 강양한 마음으로 결단을 내리라고 한다. 그러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강양한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올라가는데(離괘) 큰 산이 가로막는다(艮괘)면 멈출 수밖에 없다.

비賁괘에서 초구효는 육사효와 올바른 호응관계다. 六四(육사), 賁如皤如(비여파여), 白馬翰如(백마한여), 匪寇(비구), 婚媾(혼구)(꾸미는 것이 희며, 흰말이 나는 듯하니, 도적이 아니면 청혼한다) 육사효는 뻗어가려는 리離괘에서 멈춤艮의 괘로 딱 바뀌는 시점의 효사로, ‘희며, 흰말’은 본질, 바탕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초구효의 결단을 내리게 하는 육사효의 멈춤의 무기는 ‘흰-바탕’ 이다. 여기서의 ‘흰-바탕’이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지나친 장식을 벗어난, 자신에게 맞는 꾸밈’이지 않을까.

생각하라

나에게 수레(자동차)를 버리기로 이끈 꾸밈의 과잉을 멈추게 하는 ‘흰말-본질,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닌 ‘소小’박한 체험 – 밀대로 밀었을 때의 내 몸과 마음의 움직임, 운전대를 버리고 두 발로 걸을 때의 나의 몸과 마음으로 퍼져가는 생동감-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더 들어가 보면 ‘흰말’에는 무엇보다 인문 공부가 있었다. 정이천은 “문명文明하여 적절한 데에 멈추는 것은 인문人文이다”(주역 정이천 p467)라고 하였다. 나 역시 차를 버리게 한 가장 큰 ‘흰-바탕’은 지난해부터 익히고 있는 ‘인문’이지 않았을까. ‘머리는 둥글어 하늘을 본받고, 발은 모가 나 땅을 본받았으며’로 시작되는 몸과 우주 그리고 마음을 연결하는 『동의보감』의 사유체계, 모든 것은 변화하고 서로가 상호의존하며 살리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주역』을 배우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타인이나 사물과 어떤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이 중첩되어, 나의 ‘바탕’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내 삶의 형식이 세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각성과 함께 자가용을 포기하는 작은 결단이라도 비로소 가능해진 게 아니었을까. 또한 밀대로 밀었을 때의 내 몸에 퍼지는 감각과 두 발로 걸었을 때의 감각을 ‘고생’으로 받아들였던 이전과는 다르게 ‘풍요로움’으로 변환되는 부분도 공부와 연결되어 있으리라.

따라서 ‘그러니 옛날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인문人文이 있으니 크고, 빠르고, 편리한 것에 지나치게 흡수 되어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사유와 함께, 이제는 ‘화려함’에 무차별적으로 함몰되어 가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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