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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重火 離 : 기운 해가 걸려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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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9-04 08:20 조회1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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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火 離 : 기운 해가 걸려있을 때

한 인 서(감이당 토요주역스쿨)

주역스쿨 5월 3주차 수업시간에 생애 첫 주역 점을 쳤다. 점을 칠 때는 그 질문이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들었었다. 학인들과의 공동 주제에 대한 질문을 할 것이라 방심하고 있었는데 개인의 관심사에 대한 점을 치기로 결정이 났다. 나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막막했다. 분위기는 진지했고 신중하게 질문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잠시 주저하였지만 곧장 점치기를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한 질문은 “앞으로 주역을 배우며 살아가면 그 이후의 삶은 어떠할까?”이었다. 나 스스로도 정리되지 못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산가지를 경건하게 나누면서 마음을 추슬렀다. 드디어 내가 뽑은 점괘는 “中和 離”였고 변효가 3효 하나 뿐이라 “九三爻”를 얻게 되었다. “九三爻”는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일측지리, 불고부이가, 즉대질지차, 흉)이다. “즉, 기운 해가 걸려있는 것이다. 질그릇을 두드리고 노래하지 않는다면 늙은이의 서글픔이니, 흉하다.” 점괘를 얻고 나니 오히려 머리를 묵직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막연한 질문에 이렇게 자상한 말씀을 주시다니! 과연 우문현답이었다!!!

“日昃之離”는 「상전」에서 ‘해가 기울어졌으니, 그 밝은 빛이 오래갈 수 있겠는가? 현명한 자는 그러한 이치를 알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여 일을 잇게 하고 자신은 물러나 몸을 쉬게 하여 상도(常道)에 마음을 안정시킨다. 처신하는 바가 모두 이치에 순종하니, 어떻게 흉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鼓缶而歌”에서 ‘질그릇을 뜻하는 “缶”란 항상 사용하는 기물로서, 질그릇을 치면서 노래하는 것은 그 상도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사람이 삶을 마칠 때 이치에 통달한 자는 그 상리(常理)를 알아 천명을 즐거워할 뿐이니 상도를 만났으면 모두 즐거워하기를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하듯 한다.’(주역, 정이천, 623-624쪽)고 했다. 나로서는 “九三爻”의 爻辭 만으로도 앞으로 삶의 태도에 대한 기준점을 얻은 듯하다.

나는 지난해 환갑을 보내었으니 이미 노인이다. 즉 효사에서 알려주신 “日昃之離”의 시기에 살고 있다. 나에게 이 시기에 대한 각성의 알림은 매우 의미가 크다. 나는 노년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 관심이 많았다. 살아왔던 시간들은 내가 계획한 대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은 이미 절절히 알게 해 주었다. 인생 선배들의 조언도 들었지만 각자 처한 환경들이 다르므로 별로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과정처럼 마지막 노년의 모습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던 중 “重火 離의”괘의 “三爻”를 얻은 것이다. 즉, “해가 기울었다면 늙음을 받아들이고 상도에 맞는 삶을 살아가되 상도를 얻었으면 질그릇을 두드리면서 노래하듯 소박하게 즐거워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라고. 제대로 알아가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무엇인가를 느낀 것 같았다.

‘常道에 맞는 삶을 찾아가고, 상도를 얻었으면 소박하게 노래하듯 즐겁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상도에 맞는 삶은 공부하며 찾아가면 된다고 하였으니, 공부를 통하여 삶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누리는 소박한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해를 했다. 주역 점을 보고 나서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常道를 얻은 소박한 기쁨”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鼓缶而歌”의 해석이 절실하지만 나의 일상과 연결하여 해법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마침 지지난 주 저녁밥 당번을 하면서 주방 매니저 윤하쌤이 자신이 참여하는 세미나에서 필요하다며 3가지 기쁨에 대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순간 답변을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내가 생각하는 기쁨 3가지! 공감과 연대감에서 오는 기쁨, 인식 확장의 기쁨, 그리고 행위의 몰입에서 오는 기쁨! 이라고 답변했다. 즉흥적인 답변이었지만 다분히 지난해부터 이어져 왔던 지금의 내 고민이 담겨져 있는 대답이었던 것 같다.

지난해 9월, 나는 처음으로 감이당에서 6080 고전학교의 “노년, 우정과 지성의 향연” 강좌를 수강하였다. 총 16주 동안 소크라테스, 장자, 붓다, 왕양명, 붓다, 아인슈타인 등의 생애와 사상, 특히 죽음에 관한 그분들의 태도를 감동적으로 만났다. 어려서 위인전을 읽었을 때 존경심을 느꼈지만 그분들의 위대한 행동과 불굴의 의지에 압도되어 철없던 나는 위인이 되지 않고 평범하게 살기로 다짐했던 기억이 났다. 60이 넘어 다시 만난 지금 비로소 그분들의 삶의 태도가 큰 따뜻함과 깊은 위로, 격려로 다가왔다. 그분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모습을 인간적으로 다시 조명하며 공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주역, 동의보감, 양자역학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생애 처음 강의를 들으며 접속하게 되었다. 참으로 신선한 경험이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와는 또 다른 사유체계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어렴풋이나마 불교의 법문, 동양고전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사실 수준 이상으로 관심과 지식이 있었지만 주역과 동의보감, 양자역학 등은 강의를 통하지 않고 접할 수 없는 분야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오랜 시간 항상 공존하고 있었지만 접근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지성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아득하면서도 가슴 설레게 하는 인식 확장의 가능성도 느끼게 되었다. 또한 낭송 동의보감과 낭송 장자를 수업 시작 전 몇 쪽씩 낭송하면서 자신의 목소리와 책의 내용에 오롯이 집중하면서 낭송의 오묘한 즐거움도 맛보게 되었다. 16주 동안의 강의를 듣고 점점 더 감이당에서의 공부에 의미를 새기며 올해 토요주역스쿨에서 계속 이어가고 싶었던 것 같다.

만일, 앞으로 고전 공부를 통하여 인류의 지성과 공감하고 지적 감수성을 확장시키며, 배우는 과정에서의 집중과 몰입은 일상의 고질적인 잡념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면? 문득 내가 생각하고 있는 기쁨과 앞으로 살아갈 시간의 소박한 기쁨을 접목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통해 상도를 얻고 나서야 만이 소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鼓缶而歌) 常道를 얻지 못하였어도 상도를 찾아가는 공부의 과정에서 소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이런 방향성이라면 공부를 하면서 찾아가는 상도를 얻는 기쁨과 공부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기쁨이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문득 40대 언젠가 나이가 들면, 제목만 듣고 읽지 못했던 고전들을 읽으면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인식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공부를 하며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 했던 기억이 났다. 내 노년의 시간을 보낼 방법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것이 나의 “鼓缶而歌”하는 방법인 듯하다!

오랜 시간 항상 공존하고 있었지만 접근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지성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아득하면서도 가슴 설레게 하는 인식 확장의 가능성도 느끼게 되었다.

요즘 들어 과거를 회상하면 아쉬움과 후회의 과정들이 생각나지만 그것도 잠시이고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한 미련이 없다. 벌써 기억이 희미해지고 애써 기억을 되살려 봐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단지 몇 가지 감정기억이 남아있을 뿐 그조차도 이미 지나갔으니 그뿐이다. 주역 공부를 하며 나는 매주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매주 몇 가지의 문장과 의미를 알게 되면 곧바로 그것을 내 삶에 끌어들여 재해석하고 가볍게 내려놓는다. 무엇인가를 느끼며 이해하고, 물론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차치하고 거대한 모호함의 덩어리로 남겨져 있는 삶의 두려움들을 내 방식대로 부분적으로 해체하여 날려버린다. 내가 이렇게 변해가니 내 주변의 일들도 이전과 다르게 가볍게 다가온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러하다. 이제 주역을 배우며 상도를 찾아가는 첫발은 내디뎠고 스승님들 학인들과 공부하며 소박한 기쁨에 눈을 뜨기 시작한 지금부터야 말로 의연한 자세로 ‘日昃之離’의 시간을 맞이하며 늙어가려 한다. 일상은 지속되고 노년의 서글픔(大耋之嗟)도 자주 느끼게 되겠지만 그 또한 常理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오늘도 감이당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감사히 여기며 또 한 걸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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