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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永貞하라 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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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9-13 09:28 조회1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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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貞하라 吉할 것이다

곽 신 애(감이당 토요주역스쿨)

수업에서 주역점을 쳤다. 질문은 이랬다. ‘신규법인 설립을 앞둔 지금, 이때의 의미와 제가 가져야 할 태도를 알고 싶습니다’. 질문의 배경은 이렇다. 나는 지난 10여 년간 지금 회사에서 소수 인원의 영화부문을 맡아 각자 대표로 일해왔다. 별다른 불만이나 불편은 없었다. 은퇴나 퇴사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어도 괜찮겠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투자배급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면서 인원과 업무가 크게 확대되었다. 다시 제작에 전념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차에 제작부문을 별도 회사로 분리하는 안, 즉 내가 신규법인을 설립하고 우리 회사가 투자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동의했고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신설법인은 원컨 원치 않건 ‘곽신애 제작사’라는 정체성을 띠게 되니 이제 더는 회사 이름 뒤로 숨을 수 없게 된다. 단독 대표로서 경영책임도 맡아야 한다. 이런 변화와 부담을 감당하며 잘해나갈 수 있을지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어 주역에 도움을 청한 것이다.

 

산화비 괘의 구삼효를 얻었다. 꾸밈과 장식의 때? 아직 공부 전이었던 그때엔 동문서답처럼 느껴졌는데 공부해가면서 그 의미가 문명이라는 개념처럼 내용(본질)을 드러내는 온갖 형식, 양식, 시스템, 스타일, 법도, 예의 등을 뜻함을 알게 되었고, 어색하지 않은 답으로 느껴졌다. 괘사는 賁亨小利有攸往(비형소리유유왕). ‘꾸밈은 형통하니 나아갈 바가 있는 것이 조금 이롭다’이다.

진실한 바탕이 있어 장식으로 꾸민다면 형통할 수가 있다장식으로 꾸미는 방식은 바탕에 광채를 더할 수 있을 뿐이므로일을 진행해 나아가는 데에는 작은 이로움일 수밖에 없다. (정이천주역, 467책세상)

 

회사설립을 ‘장식으로 꾸미는 일’로 규정해주는 것 같았다. 진실한 바탕이 있으면 형통할 수 있다는데, 회사의 바탕은 사람과 일이 아닐까 싶다. 나를 포함한 멤버들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진실하면 형통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기획 중인 작품들과 업무가 있으니 ‘나아갈 바’도 있는 셈이다. 회사 설립 자체로 이로워지는 정도는 조금일 것이라는데, 이견이 있을 리 없다.

이를 바탕 삼고 구삼효를 살펴보았다. 구삼효는 꾸미는 행위 주체인 리괘(빛, 불, 문명)의 맨 위 효이다. 양위에 양효가 와서 에너지가 넘친다. 정한데 중은 아니다. 위아래가 음효들이라 활발한 꾸밈이 이뤄진다. 정응을 이루진 못했다. 효사는 賁如濡如永貞吉(비여유여영정길). ‘꾸미는 것이 윤택하다. 오래도록 유지하고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다’고 한다. 상태로서 賁如濡如, 吉할 수 있는 조건으로 永貞을 제시하고 있다.

賁如(비여)는 수식이 성대한 모습이다濡如(유여)는 자체에 내재하는 아름다움 때문에 윤기가 흐르는 모습이다구삼은 수식/장식의 성대함 속에 있다그러나 수식/장식은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수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아름다움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역의 하느님은 구삼에게 말한다. “영원히 보편적인 주제를 향해 점을 쳐라.(永貞)” 그래야 한 결과를 얻으리라. (김용옥,도올주역강해, 335통나무)

‘비여유여’는 꾸밈이 본질을 넘칠락 말락하는 상태라는 뜻도 된다. 본질에 비해 회사라는 형식이 과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형식을 갖추는데 쓰는 에너지는 가급적 간소화해야겠구나 싶었다. 회사 설립이라는 사건보다는 본연의 일를 잘하는 데에 집중하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나와 우리에게 붙어 있는 ‘천만, 칸느, 오스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자(사)로서 가질 수 있는 거의 끝판왕 급의 장식이다. 하지만 과거를 빛낸 장식일 뿐, 본질은 감독과 아티스트들을 만나고 서포트하여 좋은 작품을 만들어 관객과 소통을 이루는 일이며 그럴 수 있는 실력이다.

 

매 작품마다 원점에서 시작해 예측불허의 조건과 난관을 돌파해야 하는 일의 특성상 항상 천지의 도움이 필요하다 느끼기에 구삼효 끝에 吉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솔직히 무척 반가웠다. 자, 그런데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인 永貞을 정이천은 ‘오래도록 유지하고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라 했고, 도올은 ‘영원히 보편적인 주제를 향해 점을 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해석하건, 변하지 않을 본질적인 것을 오래도록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이다. ‘永’에 집중해 구체적으로 적용해보면, 현재의 트랜드나 단기 이익을 좇기보다 작품의 가치와 완성도 같은 본질적인 것을 중심에 둬라. 세월이 지나도 그 가치를 잃지 않을 작품을 만드는 회사를 추구하라. 회사를 장기 비전으로 설립하고 경영하라 등의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았다. ‘貞’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작품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작품적 지향의 올바름이 떠올랐다. 또한, 일의 방식에 있어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상처 주지 않는, 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을 마련하는 등의 올바름을 단단히 갖추자. 그러면 길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기도 해서, 그러면 길할 것이라는 말이 까다로운 단서라기보다 든든한 격려처럼 느껴졌다. 우리 회사는 영화계가 처한 어려움을 통과해야 하고 해보지 않았던 드라마 제작도 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특히 최근에 드라마 제작을 위한 업계 탐색 과정에서 永貞하지 않은 문화를 꽤나 접했다. 술이나 골프 접대, 뒷돈 로비가 필요하다거나 작품에 자극적인 설정을 극대화시키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럴 재주도 의사도 없는데 그래야만 일이 돌아가는 건가 싶어 마음이 괴롭기도 했었다. 반면, 본질에 집중하여 지속적으로 올바른 태도로 해나가는 것은 힘들지언정 괴롭지는 않은 길이다. 기꺼이 그럴 수 있다. 그러겠다.

반면, 본질에 집중하여 지속적으로 올바른 태도로 해나가는 것은 힘들지언정 괴롭지는 않은 길이다.

새로운 회사의 시작을 앞두고 내 지금을 물어서 ‘장식’의 괘, 구삼효를 받았다. ‘장식’에 대한 공부는 결국 ‘본질’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내가 회사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 그 일의 본질은 작품을 만드는 일이다. 그 작품의 본질이자 궁극은 작품에 담는 생각과 마음이다. 우리 회사를 통해 만들어질 작품의 생각과 마음이 영정한 것이 될 수 있도록, 그 장식에 해당되는 업무 또한 영정하도록, 그렇게 회사를 꾸려가보고자 한다. ‘그러면 吉할 것이다’라니, 안정감을 주는 든든한 축사가 아닐 수 없다. ‘永貞吉’을 좌우명처럼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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