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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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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9-19 06:09 조회1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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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따뜻하게!

이 향 원(온라인 감이당 대중지성)

정화 스님은 우리 삶의 근본이 유식성(唯識性)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이라고 한다. 유식이란 이 세계엔 오직 앎(識)이 변화하는, 그 흐름만 있다는 것이다. 그 앎의 흐름을 지켜보고 알아차리면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일까. 아집(我執)으로 인해 거칠고 차갑게, 이기적으로 살아온 나는 유식을 공부하면서 내내 이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이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유식성, 이것을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을까.

9남매의 장녀였지만 희생과 봉사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던 나다. 이런 나는 가난한 환경을 벗어나고자 결혼을 택했지만, 그 결혼 생활은 나의 어떤 욕구도 채워주지 못했다. 불만스러운 그 환경으로부터 또 다시 도망을 쳤다. 딸 아이가 15살 때 집을 나와 이혼한 것이다. 딸을 두고 나오면서 잠시 자유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나의 죄책감은 예고된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금전적으로 딸을 도와준 것은 그 죄책감을 없애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나만 생각한 행동이었다. 늘 신경 쓰이는 그 죄책감을 없애고자 딸 아이의 인생은 생각하지 않고 나만을 위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 “신경증적이고 이기적인 죄책감”(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정영목 옮김, 교양인, 472쪽)으로 인해 결국 딸을 망치게 된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집을 나온 이후 딸도 곧 집을 나와 방황을 거듭하며 살았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나에게 손을 벌렸다. 도대체 이런 딸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마음이 만드는 세상

최근에는 급기야 딸 아이가 전세 사기에 공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딸은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낯선 외계인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내 몸과 마음은 더더욱 긴장되고 차가워졌다. 아랫배에 통증이 찾아왔다. 그동안 나는 딸을 어떻게 보아왔을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만든 환상, 곧 마음이 홀로그램 같은 영상을 만들고, 그 영상을 외부에 투사해놓고, 그것을 외부의 실재라고 착각한 것이라”(정화 스님,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까?』, 북드라망, 6쪽) 한다. 내가 그동안 보아온 게 실재가 아니라 착각이란다.

무엇이 착각이라는 걸까. 지금 여기에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면 꿈만 같다. 어떤 것이든 영화 장면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곧 사라진다. 그러니 어떤 것도 고정된 모습으로 그 실체가 있다고 생각할 순 없다. 볼 때마다 장면이 달라지는데 내가 어느 장면에 집착해 그것이 실재한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웠을까. 정말 험한 일을 겪는 딸을 걱정해서 그랬을까. 딸이 겪는 고통보다는 내가 겪을 고통 때문에 괴로워한 것 아닐까. 내 것을 빼앗기고 잃는, 그 상실감을 걱정한 것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거기에는 항상 나의 자아가 있는 것이다. 소유욕과 탐욕이 꿈틀거리는 그 자아가 있기에 늘 괴로운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항상 끊임없이 수많은 영상이 펼쳐졌다. 전세 사기를 공모한 일은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닌가,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게 하려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며 밤잠을 못 이뤘다. 속을 썩이는 딸이 죽도록 미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돈을 갚지 못해 장기가 훼손되어 죽어 있는 딸의 처참한 모습이 보여 슬펐다. 내 마음은 이렇게 지옥을 만들고 있었다.

고요히 지켜보기

딸은 왜 저렇게 되었을까. 어렸을 때 자기가 버려졌다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저렇게 살게 된 것일까. 하지만 융은 다른 말을 한다. 어린이는 반드시 부모에게 내쳐지고 그 버림받음을 통해 독립적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이다(신근영 지음, 『칼 구스타프 융, 언제나 다시금 새로워지는 삶』, 북드라망, 236쪽). 누구든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스스로 서려면 어떻게든 부모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러나 딸은 그것을 상처로, 나는 그것을 죄책감으로 받아 안았다.

나는 아이가 어려서부터 줄곧 독립을 외쳐왔다. 그러나 나도 아이도 서로에게 얽어매어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딸 아이는 자기가 버려졌다고 여기는 그 15살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 눈엔 사회에서 좋지 않게 여기는 온갖 짓을 다 하고 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딸이 싫고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지켜보면 그건 내 안에 있는 모습이다. 나도 젊은 시절 부를 탐하고 남자를 탐하며 살았다. 한 마디로 탐욕의 악귀로서 천박한 쾌락에 빠져 살아왔다. 그런 내 모습이 딸에게 보일 때마다 내가 지은 악업(惡業)에 대한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결국 내가 싫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내 마음이 조작한 영상 세계였다.

불교의 지관(止觀) 수행에서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를 계속 지켜보고 알아차리라고 한다. 정말 고통스러움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 고통이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물론 잠시 찾아오는 기쁨도. 또 다른 생각들이 밀려오고 이전 생각은 어느새 사라졌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들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사라져 갔다. 그러니 어느 것에도 머물 순 없었다. 그러면서 그걸 지켜보는 마음은 차츰 고요해졌다. 들뜨고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 공(空)

딸은 나름대로 자기가 저지른 일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전 남편과 함께(이 과정에서 딸도 이혼했다) 빌려 간 돈을 다달이 얼마씩 갚아나가기로 하고 전세 사기 건은 일단락되었다. 전 남편과 상의해 가며 일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대견했다. 딸에 대해서 처음으로 갖는 긍정적인 생각이었다. 전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도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딸에 대해서 다른 영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딸처럼 그러지 못했다. 누구의 잘못이든 우리는 원한과 분노로 결혼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회한만 남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인연(因緣)에 따라 생기는 가상(假相)일 뿐이라고 한다. 그 가상의 바다에서 우리는 허우적거리고 있다. 여기에서 끊임없이 무언가 상(想)을 짓고 분별하여 번뇌를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나와 대상을 소외시켜 몸과 마음이 긴장되고 차가워진다. 그 “긴장시켜서 차갑게 만드는 힘들이 없어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힘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공”(정화 스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법공양, 93쪽)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 공, 이 유식성은 나와 타자를 가르는 이분법, 그 분별을 없애는 데서 나온다.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 공, 이 유식성은 나와 타자를 가르는 이분법, 그 분별을 없애는 데서 나온다.

그렇다, 나는 딸을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계속 분별하고 있었다. 내가 옳고 딸은 옳지 않다는. 어쩌면 딸을 여전히 15살 난 아이로 보고 있었던 건 나 아니었을까. 그러나 나에게도 딸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지 않겠는가. 딸도 어떤 식으로든 자기 수행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내 마음이 펼치는 영상에 따라 그 홀로그램을 그대로 믿으며 번뇌를 일삼아 너무 거칠게 살아왔다. 이제는, 모든 것이 연기(緣起) 조건에 의해서 변해 가는 실상, 공, 이 앎의 흐름을 알아 부드럽고 따뜻하게 살아가고 싶다. 내가 계속 공부 수행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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