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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나를 찾아가는 여행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6-12-30 21:19
조회 : 1,355  

를 찾아가는 여행

이정수 (감이당 수요 대중지성)

1. “명리학이 뭔데요?” 

2014년 1월 8일, 나는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공교롭게도 회사를 떠나기 전후 약 보름동안 내 손에 들려져 있었던 책이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다. 조용헌은 동양사상의 연구경향을 강단동양학과 강호동양학으로 나누면서 강호동양학을 구성하는 3대 과목으로 사주, 풍수, 한의학을 소개한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인 ‘잡과’ 출신의 이 과목들은 근대를 맞으면서 고난의 시절로 들어간다. 그에 따르면 한의학은 1970년대 초반에 학문적 시민권을 얻게 되고 풍수도 1980년대 중반에 영주권이나마 받게 되나, 사주명리학은 아직 미아리 골목에서 이리 저리 방황하는 불법체류자 신세라고 한다. 
 
그로부터 두 달 전쯤. 고교 선배, 친구와 셋이 저녁 술자리에서 논어, 중용, 노자를 안주삼는 무례(?)를 저지르는 중이었다. 이야기 끝에 선배가 뜬금없이 하는 말. “너 나중에 명리학 공부 한번 해봐라.” “예? 명리학이 뭔데요?” 술김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자는 목숨 명(命)자가 아닌 이름 명(名)자였으니 이런 무식하기는. 그나마 사주명리학이라고 얘기했으면 팔자에 대한 것인가 보다 했을 텐데 말이다. 그날 조용헌의 책을 소개받았으나 아쉽게도 절판상태였다. 대신 음양오행에 대한 그의 짧은 칼럼을 모아놓은 다른 책을 한 권 구했고, 그렇게 나는 동양의 불법체류자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해 연말 직원들과의 송년 술자리에서 사주팔자에 대한 이런 책을 읽었노라 자랑질 수다를 떠는 중에 후배 직원이 “어? 저 그 책 있어요. 조용헌 사주명리학!” 다 읽었으니 기꺼이 빌려 주겠다고. 그래 퇴사 전에 빌려 읽던 책을 해가 바뀌고 퇴사 후, 마저 다 읽었다. 태어나 처음 읽었던 명리에 관한 책이라 세세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강호동양학답게 ‘강호’의 냄새가 물씬 풍겼던 것 같다. 퇴사 후 책 주인과 약속이 있던 날, 잘 챙겨서 돌려주었더니 “그거 퇴직 선물로 드릴께요”한다. 해가 한 번 더 바뀌어 작년 2월, 나는 우연히 감이당에 접속하게 되었고 그곳엔 ‘불법체류자’ 명리학이 당당히 영주권자로, 시민권자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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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북드라망, 2015, 31쪽. 이하 이 글에서 사주명리학과 관련된 내용은 앞의 책과 고미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북드라망, 2016)를 참조하였음. 

명리학은 운명의 이치를 탐구하는 공부다. 운명의 운(運)자에는 ‘운전하다(轉), 움직이다(動)’는 뜻이 있으니 운명이란 ‘타고난 명을 운전하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운전하고 움직이는 이치를 탐구하는 공부가 된다. 나는 운(運)자가 가진 뜻 중에 어쩐지 동(動)자에 마음이 간다. 동, 움직이다, 움직임, 흐름. 그래서 운명을 ‘명(命)의 흐름’으로 읽고 싶다. 바로 이 ‘흐름’이 혹 필연지리와 당연지리를 알아가는 실마리가 되지는 않을까? 과연 나의 글쓰기 기계는 명리학이라는 원천기계와 접속해서 무슨 흐름을 어떻게 절단하고 채취할 수 있을까?

 
2. 팔자와 욕망 

운명, 명(命)의 흐름! 팔자속에 있는 오행의 기운도 흐르고, 들뢰즈-과타리의 욕망도 흐른다. 둘 다 ‘열린계’다. 운명은 ‘몸이 밟아가는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리듬’으로 무엇보다 우선 우주적이다. 목화토금수의 기운이 맞서고 어울린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우주와의 합일을 이룰 수 있고, 마음과 우주가 하나임을 깨달아 스스로를 탈바꿈할 수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인용되는 분열자 렌츠는 “온갖 형태의 깊은 삶과 접촉하는 것, 돌들, 금속들, 물, 식물들과 영혼을 교감하는 것, 달이 차고 기욺에 따라 꽃들이 공기를 빨아들이듯 꿈에 잠겨 자연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것, 이런 것들이 무한한 지복의 느낌임이 틀림없다”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5, 24쪽. 고 생각했다. 우주와의 합일을 이루는 렌츠!

운명은 오행이라는 우주적 기운이 시공간에서 어떤 사회체와 마주치느냐에 따라 달리 펼쳐진다. 십신은 바로 팔자가 사회적 표상들과 마주칠 때 일어나는 욕망과 힘의 배치를 읽어내는 것이다. 비겁은 주체적인 힘에 대한 욕망이고, 식상은 말, 끼, 식욕, 성욕을 나타내며, 재성은 일과 재물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다. 관성은 사회적 관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 타자들의 삶에 깊이 개입하고픈 욕망이며, 인성은 배움의 열정이자 깨달음의 욕망이다. 십신으로 표현되는 욕망은 내가 지향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의 지향과는 무관하게 내 삶의 구체적 현장이 그런 욕망과 관련되어 있음을 뜻할 수도 있다. 

운명은 ‘내부와 외부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출현한다. 오행의 기운과 욕망은 타고난 팔자대로 각자의 내부를 구성함과 동시에 자연과 사회에도 편재하며 흐른다. 그런데 여기서 욕망이란 무엇일까? 일상에서 욕망을 표상할 때 우리는 늘 결핍과 대상을 같이 떠올린다. 무언가 결핍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의미로 욕망을 코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과타리에게 욕망이란 결핍이 아니라 생산이며, 연결, 작동하는 기계이다.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계를 생산한다......부분대상들, 흐름들, 몸들을 기계 작동하며, 생산의 통일로서 기능하는 수동적 종합들. 욕망은 이런 수동적 종합들의 집합이다. 현실계는 수동적 종합들에서 생겨난다. 현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같은 책, 60~61쪽.

 
그들에게 결핍은 결코 1차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선행하는 욕망적 생산이 조직화된 후에 자리를 잡는다. 또 욕망은 대상과 구분되지 않는다. “욕망은 그 대상과 일체이며, 기계의 기계로서의 기계이다.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같은 책, 61쪽. 그들은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며, 고정된 주체를 결핍하고 있는 것이 욕망이라고 말한다. 

오행의 흐름과 그 기운들이 자아내는 사회적 표상과 욕망의 주름에 주체와 대상을 부여하는 것이 ‘육친법’이다. 육친은 나를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로 나의 동선과 관계를 만든다. 비겁은 동료, 형제들이고 식상은 여성에게 자식, 남성에게 처가 식구이며, 재성은 여성에게 아버지, 남성에게 부인이나 애인이다. 관성은 여성에게 남편이나 애인, 남성에게 자식이며 인성은 남녀 모두에게 어머니가 된다. 오행, 십신, 육친의 해석에 따라 내 몸과 사회적 욕망, 인간 관계가 어우러지면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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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오행의 기운들이 내 밖의 사회적, 우주적 기운들과 어우러지면서 운명이 흘러간다. “욕망은 연속된 흐름들과 본질적으로 파편적이면서도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의 짝짓기를 끊임없이 실행한다.”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같은 책, 29쪽. 그러면 운명과 욕망의 흐름 속에 ‘나’라는 주체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들뢰즈-과타리는 삶의 운동 전체를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관 없는 몸 위의 분리 점들은 욕망 기계들 주위에서 수렴원들을 형성한다. 그러면 기계 곁에서 잔여로서 생산된, 즉 기계에 인접한 부속물 내지 부품으로서 생산된 주체는, 그 원의 모든 상태를 경유하고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이행한다. 주체 자신은 기계에 의해 점유된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고정된 정체성 없이 있으며, 중심에서 늘 벗어나고, 자신이 경유하는 상태들로부터 귀결된다.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같은 책, 51쪽.
 
진언이나 주술과도 같은 이 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운명과 관련해서 이렇게 접속해보고자 한다. 주체는 운명이 흐르는 “각 상태마다 태어나고, 한순간 그것을 규정하는 그다음 상태에서 항상 다시 태어나며,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이 모든 상태를 소비한다. 체험된 상태가 이 상태를 사는 주체에 비해 1차적이다.”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같은 책, 51쪽. 내가 살아서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흐름을 겪음으로써 내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미숙샘의 이런 구절과도 연결해본다. 운명의 흐름 속에서는 “주체가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삶이자 주체” 고미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191쪽. 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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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에 내재된 욕망은 우주적 기운이면서 사회적 장을 구성하고 ‘나’라는 주체의 질료가 된다. 팔자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따라서 운명의 핵심은 ‘창조와 순환 그리고 운동이며, 그 리듬의 조율’이다. 필연지리와 당연지리가 만나는 실천의 지점,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지점도 여기일 것이다. 그 원동력은 자율성과 능동성에 있다. “좋아, O~K!”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졌으니 이제 운명이 매끄럽게 흐를 수 있도록 자율성과 능동성을 발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장애물이 등장한다. 운명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 내 안팎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운명의 흐름을 막는가? 

하나는 들뢰즈-과타리가 지적하고 있는 “생산의 풍부함 속에 결핍을 조직하고, 모든 욕망을 결핍에 대한 큰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시장경제와 지배계급의 예술”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같은 책, 63쪽.이다. 다른 하나는 푸코의 지적대로 “우리가 권력을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바로 그것까지도 욕망하게 만드는 우리 안의 파시즘”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같은 책, 7쪽. 이다. ‘자본의 욕망을 자기의 욕망과 동일시하고, 내가 옳고 선하니 너도 나처럼 하라는 동일화의 논리를 구사하며, 욕망의 흐름을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화시키거나 어떤 조직의 관계에 고착시키는’(채운샘 강의) 우리의 일상 행동 속에 있는 파시즘. ‘지배계급의 예술과 내 안의 파시즘!’ 어찌해야 하는가? 고미숙샘의 제안이다. “모든 운명의 키는 자기 자신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법 또한 자기 자신 안에 있다. 해서 팔자를 고치려면 자기 안에 있는 단서와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185쪽, 242쪽.  다시 공부로 돌아온다. 내안에 있는 원인과 단서에 대한 성찰과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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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를 찾아가는 여행

내 친구 ‘이정’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다른 대학에 편입해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3저 호황’의 호시절을 만나 대그룹 입사원서를 발로 차고 다니다가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말에 혹해 조그만 회사에 입사했다. 운 좋게도 그때부터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증권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회사도 날로 성장했다.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속에서도 우여곡절을 거쳐 임원이 된 후 퇴직했다. 또 다른 내 친구 ‘이수’는 고3 때 시대적 격변 속에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무기정학을 당했다. 대학에서는 독재정권하의 ‘유화국면’에서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  활동을 했으며, 정치경제학과 경제사 공부에 심취했다. 취직을 해서는 엉겁결에 노조위원장을 하고, 이후에도 소위 ‘사무직 노동운동’을 계속했으며 진보정당의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 2016년에는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서있다. 짐작하다시피 내 친구 ‘이정’과 ‘이수’는 내 운명이 지나온 무수한 계열 중에 자의적으로 그어 본 두 개의 선이다. 나는 누구인가?  

‘독립불구 돈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과 멀리했어도 근심하지 않는다. 퇴사 전해에 조용헌의 책에서 처음 접했던 문구다. 백수 생활 첫해 내내 이 문구를 되뇌며 지냈다. 주역의 택풍대과(澤風大過)괘에 나오는 글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당파 싸움에서 패배하여 유배생활을 할 때 이 괘를 가장 많이 읽었다고 한다. 선비들의 유배생활에 비하자면 턱도 없지만, 회사와 월급이라는 우산을 내려놓고 험한 세상으로 나와야하는 마당이니 울림이 컸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작은 도주선을 하나 냈다. ‘더 이상 임노동관계에 포획되지 않겠다’는 정치경제학적(?) 중대결심을 했다. 아직 도주중이다.

인도에서는 50대 이후를 숲에 들어가 명상하는 시기라는 뜻에서 임서기(林棲期)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족과 사회적 책무를 벗어나 존재와 우주의 소리를 들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천명(天命)을 모른 채 지천명의 나이를 넘겨버린 나는 숲 대신에 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감이당에 접속해 존재와 우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있다. 무슨 소리가 들리려나. ‘팔자타령’이라고는 해본 기억이 없으니 아직까진 그저 별 볼 일없이 무난히 살아온 듯하다. ‘별 볼일 없는 것’도 ‘무난한 것’도 다 사주원국에 목화토금수를 하나씩은 끼고 앉은 팔자 덕분인가? 지난 달 의역학 시간에 시성샘이 주단계를 소개하면서 “단계는 만학의 대명사다. 주자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36세,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 43세니 모두 중년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도 가히 희망적이다”라고 썼다. 아~ 절망적이다! 그래도 배움의 열정과 깨달음의 에너지가 흐르는 곳으로 ‘욕망을 재배치’하고, 백수 3년이면 읊을 풍월을 찾아 서성거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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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흐른다. 나의 운명도 지금껏 흘러왔고 앞으로도 흘러갈 것이다. 큰 강줄기로, 실개천으로, 더 작은 흐름으로, 각각의 흐름 속에서 천지사방으로 또 다른 가지를 뻗고 길을 내며 흘러갈 것이다. 나는 지금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하는 중이다. 고미숙샘은 “명리학이라는 뗏목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명’을 운전하는 ‘삶의 기예’를 터득하고 강을 건넌 다음 뗏목을 버리라” 고미숙, 위의 책, 9쪽.고 한다. 푸코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성애술, 이론술, 정치술’의 술(術, art)로 읽기를 제안한다. 내게는 ‘뗏목과 술(術)’의 이야기가 모두 ‘책의 글자 속에 틀어박혀 엄숙한 태도로 진리를 찾지 말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나는 여전히 지식과 지성과 지혜가 분리된 채 따로 놀고, 아직 책 속에서 지식, 진리를 찾아 헤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진리는 매순간의 접속 그 자체에서 구성되는 것일 텐데 말이다. 나는 아직 명을 운전하는 법을 모른다. 이제 겨우 명리학이라는 강으로 들어섰다. 그러니 계속 뗏목을 타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 웃으며 뗏목을 버릴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인터넷을 하다보면 회원가입을 위해 가끔 ‘별명’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좀 난감하다. 딱히 마음에 드는 별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입을 하려면 제출을 해야 하니 고민 끝에 만들어 본 것이 두 개 있다. 더 젊은 시절엔 자본주의의 감당할 수 없는 속도에 분노하면서 ‘한가로이’라는 별명을 썼다. 나이가 좀 든 어느 날 “내가 곧 우주”라는 희미한 깨달음을 얻고부터는 ‘우주’라는 별명을 쓴다.(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있다’고 하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좁쌀 한 알을 뜻하는 일속(一粟)을 호로 썼다. 나는 거꾸로 가보기로 했다.) 감이당에 접속할 때도 별명을 요구하기에 잠시 고민하다 ‘우주’로 했다. 내가 곧 우주다! 어떻게 막히지 않고 흘러 우주가 될 것인가? 운명은 흐른다. 흐르는 운명 속에 내가 있다.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란 결국 ‘일상의 리듬 속에 깨어있는 나’를 매순간 확인하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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