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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무기력한 공부도 공부다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6-12-29 17:24
조회 : 1,081  


무기력한 공부도 공부다


강유정(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내년도 감이당과 강학원의 프로그램 공지가 떴다. 나는 마치 온라인 쇼핑몰을 구경하듯이 매일 매일 들어가서 프로그램을 기웃거린다. 토요일이 좋은가? 일요일이 좋은가? 아님 강학원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우스운 건 마치 지금의 공부를 제도권의 학교에서 학년 올라가는 것처럼 대하고 있는 내 모습이다. 그리고 수강신청 하듯 어떤 과정(과목)을 선택(신청)할까 만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 말이다. 

그런데 깜빡 잊은 게 있었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년에 공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었다는 것을. 고민의 이유는 감이당 1년 과정이 끝나가는 이즈음에 불현듯 나타난 ‘나에겐 공부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거야’ 라는 회의 때문이다. 처음 공부를 하고자 하여 감이당 문을 두드렸을 때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직장 내의 상사와 선배들의 꼰대 짓을 보면서 적어도 저들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한 번도 나에게 ‘공부 욕망’이 있나 없나를 생각해 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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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강의 시간에 채운 선생님께 책을 읽을 때 집중이 잘 안 돼요. 왜 그럴까요라고 물었더니 선생님께서는 ‘공부 욕망이 없는 거겠죠’라고 아주 짧고 냉정하게 대답을 주셨다. 선생님으로부턴 이미 지난 2학기 에세이 발표 당시 깨질 만큼 깨진 터라 어떤 말을 들은들 상처야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 눈에 전혀 변함없이 비칠 내 모습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래도 모든 학기가 끝나는 시점에 나의 공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감이당 선생님들이 모두 하는 말이 있다. 삶의 현장에서 강렬하게 부딪쳐본 경험만이 질문을 만든다고. 나 같은 경우 아직까지 현장에서 강렬하게 마주친 경험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그런 상태로 막연히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시작한 공부라서 이렇듯 무기력 해 졌나 보다. 공부가 무기력하니 질문도 있을 수 없다. 나는 왜 공부욕망도 없이 시작을 했을까? 아니 정말 나에겐 공부 욕망이 없는 걸까? 그런데 어떤 마음으로 1년 가까이 왕복 4시간의 거리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는가? 물론 ‘감이당을 다닌다’가 ‘공부한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감이당이라는 공간에서 보낸 시간들이 무의미한 걸까? 분명 그 시공간의 경험이 내게 부여한 어떠한 힘이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4학기까지 무사히 마치고 에세이를 쓰고 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       


뭐가 문젠데?

내가 감이당에서 조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샘은 여러 가지 장점들이 많은데 왜, 단점만 얘기하세요?’, ‘샘은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바꾸질 못한 채 자꾸 안 된다, 안 된다를 반복하는 습관이 있어요.’라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신성이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 중략 -
그의 신성과 불멸성은 어느 정도인가? 그가 하루 종일 움츠리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막연한 불안에 휩싸여 있는 모습을 보라, 불멸이나 신성은커녕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 즉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서 얻어진 평판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여론, 즉 대중의 평가는 우리 자신에 의한 자체 평가에 대단한 폭군이 되지 못한다. 자기가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가 곧 그의 생애를 결정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 대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16쪽) 

감이당에서의 지난 몇 달을 생각해 보니 내가 감이당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나는 난독증인가 봐요, 책을 읽어도 이해를 못 해요.’ 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나는 이런 사람이니 토론 시간에 말없이 있거나 얘기를 못 해도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세요.’ 라는 포석 깔기와 다름없다. 우리 조의 L씨는 자신은 처음 하는 공부라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일단 책이라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며 텍스트를 엄청 파고드는 인물이다. 텍스트에 대한 집중력이 대단하여 조원들이 어느 부분에 뭐가 있드라? 하고 물어보면 바로 ‘여기 몇 쪽’ 이라고 찾아준다. 그러다 보니 늘 주도적으로 질문을 하고 토론을 이끌어 간다. 

나는 그 L씨를 늘 부러워하면서 토론시간만 되면 작아지는 자신에게 ‘난 왜 저렇게 못 하지? 난 정말 머리가 나쁜가 봐.’로 자신을 비관하고 ‘넌 왜 그렇게 못 하니? 바보 아냐?’로 자학하며 어느새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폭군이 돼 버린다. 나는 난독증이 있는 것 같고, 머리가 나빠 책을 읽어도 이해를 잘 못 해요 라는 생각과 함께 한번 읽어서 이해를 못하니 두 번 세 번 읽어 볼까는 왜 생각을 못 하며 그렇게 해보지 못 하는지. 이런 나를 보는 다른 조원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나에게 저렇게 얘기했을까? 하지만 조원들의 나에 대한 답답함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언제나 자신을 저평가해야 직성이 풀리는 못된 습관이다. 그 습관이 스스로를 자체 평가한 프레임에 가둬버리고 그 프레임에 갇힌 신체는 무기력과 게으름으로 방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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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바로 몸이야

“배움의 핵심은 자신의 신체가 움직이는 것이다. 몸이 반응하고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앎을 열망하고 기쁨을 맛보고 또 그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이런 과정이 생략된다면 아무리 최상의 교육을 받는다 한들 완전 도루묵이다.”

(고미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146쪽)
 
곰샘께서는 늘 앎과 신체의 교감을 강조하신다. 몸이 반응하지 않는 공부에 배움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신체의 움직임이 공부에 대한 발심을 만든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게으르다’라는 프레임에 갇힌 몸으로는 발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혹 발심이 생긴다 해도 그 상태로의 공부는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 공부야말로 무기력한 공부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내 꼬라지가 바로 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난독증이라고, 책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못 박듯이 스스로를 평가하기 전에 TV 앞에서 식탐에 빠져 있는 신체를 도서관으로 이끌 용기는 없었단 말인가? 비록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 책과 마주하는 신체가 되려는 노력을 어느 정도는 해 본 후에 자신을 평가해도 늦진 않을 텐데 말이다.   

“독서를 잘하는 것,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풍조가 존중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이 드는 운동이다. 그것은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과,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독서를 하는 마음가짐을 요한다.”

소로우 또한 독서(공부)와 신체성을 강조한다. 독서, 즉 공부를 신체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혹독한 훈련의 결과로서만 공부 근육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운동은 힘이 든다. 운동선수가 자신의 종목에 맞는 신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혹독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혹독한 훈련이라야 튼튼한 근육이 형성되며 그때 비로소 그 선수의 신체는 자신의 종목에 맞는 최적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다른 신체의 근육보다 뇌의 근육은 단순하지 않고 더 섬세하여 그 근육이 발달하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부하는 신체로서의 뇌 근육을 최적화하려면 운동선수의 근육을 키우는 것보다 더 많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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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신체의 활동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른 물질적 존재의 모든 변화나 발전이라는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물질적 존재로서 ‘나’가 어떤 식으로든 변하려면 운동이 필수이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존재가 되려면 더 혹독한 ‘지적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독서와 공부는 뇌 근육의 발달뿐 아니라 물질적 존재인 인간에게 긍정적 변화를 주는 힘든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소로우는 고귀한 ‘지적운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으며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월든 150쪽)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감이당 공부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책들이 너무 어려워서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뭐 이렇게까지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하나 싶기도 했고 어쩜 그 핑계는 내가 무기력한 공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로우는 ‘가벼운 읽을거리’는 우리의 지적 능력을 소모시킬 뿐이라고 한다. 담벼락 너머 미지의 세계를 보고자 발돋음하고 서 있는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나름의 해답일 수도 있다. 쉽게 읽혀지는 책에서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기 어렵다. 미지의 세계란 내가 갖고 있는 신체로 그냥 서서는 볼 수 없다. 신체의 재구성을 통해야 볼 수 있다. 발돋움은 내가 갖고 있는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의 재구성이다. 내 키에 맞는 수준의 책은 물론 쉽게 읽혀지고 당장은 즐겁고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담벼락 너머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은 생기지 않을 테고 따라서 발돋움을 할 줄 모르는 신체를 갖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궁금하다. 나는 과연 발돋움을 할 줄 모르는가? 담벼락 너머 미지의 세계가 궁금하긴 한가? 이 질문은 어찌 보면 내가 ‘공부 욕망’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고 무기력한 공부를 계속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관능적인 행동은 그가 음식을 먹든, 음료수를 마시든, 누구와 동침을 하든, 또는 잠을 자든 똑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실은 한 가지의 욕망인 것이다. - 중략 -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온다. 나태로부터는 무지와 관능이 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관능은 마음의 게으른 습성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317쪽)
  
결국 ‘나는 게으르다’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무지와 관능에 사로잡힐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공부 욕망’이 있나 없나를 물어볼 게 아니다. ‘공부 욕망’을 거론하기 이전에 왜? 게으른 습성부터 제거하지 못하는지 물어보는 게 우선일지도 모른다. 천성이 게을러 어쩔 수가 없다고 핑계를 대려니 소로우의 말이 내 입을 가로막는다. ‘천성은 극복하기 힘드나 극복되어야만 한다.’(『월든』 318쪽) 고. 무지와 관능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선 게으름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나. ‘천성이 게으른데 되겠어?’가 아니라 ‘천성은 게으르지만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 봐야지.’ 라는 마음으로 시도하라고 소로우는 말하고 있다. 
 

결코 무의미하진 않았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실은 오래전에 한번 읽어 보겠다며 구입해 놨었다. 하지만 들춰보지도 못한 채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을 이번 학기 수업교재로 만나게 된 것이다. 『월든』을 읽기 전 책에 대한 나의 짐작은 도시생활에 지친 소로우가 숲속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면서 쓴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향후 퇴직 후의 내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시골생활 백서’쯤으로 말이다. 퇴직 후에 나는 텃밭에 농사를 지으며 지금보다는 훨씬 소박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내 생각을 소로우가 들었다면 어떻게 얘기했을까? ‘웃기네, 지금 여기에서나 잘하세요. 소박한 삶이 꼭 퇴직 후에 텃밭을 가꿔야만 가능한가요? 그런 삶이 꿈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 일단 소박하게 살아보세요.’라고. 그리고 특히나 요즘의 나에게 ‘공부가 쉬운 줄 알았나요?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근데 그렇게 힘들게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예요.’라고도 말하는 것 같다. 『월든』을 읽는 동안 참 즐거웠다. 콩밭을 매며 호미가 돌에 부딪칠 때 나는 소리를 숲과 하늘에 울려 퍼지는 음악이라고 표현한 것, 개미들의 전투를 드레스덴 전투와 콩코드 전투에 비유한 것, 그리고 소로우 자신이 되강오리와 밀당하는 장면 등등. 자연과 함께하며 쓴 주옥같은 글을 읽을 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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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당에 다닌다’ 가 곧 ‘공부 욕망’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내가 감이당엘 다니는 것만으론 ‘공부 욕망’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치열하지 못했고 스스로도 무기력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감이당이라는 공간에서 보낸 시간들이 결코 무의미하진 않았다. 감이당이 아니었으면 『월든』의 주옥같은 글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소로우를 오해 한 채로 살았을 테니까. 또한 그 시공간에서 만난 동학들과의 우정은 공부 이상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당장은 공부 욕망이 없더라도 감이당에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미세하게나마 변신하는 나에게 주목하고 싶다. 그것만으로도 공부를 계속해야 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무기력한 공부나마 손을 놓지 않고 붙들고 있다 보면 혹시 아는가? 언젠가는 내게도 공부를 운명처럼 받아들일 날이 올 수도 있겠지. 그래서 공부를 계속할까 말까 고민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선택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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