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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생명력 있는 노동은 과연 가능할까?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7-02-09 19:24
조회 : 4,248  
 
생명력 있는 노동은 과연 가능할까? 
-어느 정규직 노동자의 불온한 실험기


이림영옥(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감이당에서 인문의역학을 공부하면서 몸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었다. 예전에는 생각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몸이 생각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는다. 생각해보라. 그날 하루하루의 몸 컨디션이 얼마나 많은 사유를 규정짓는지. 몸이 움직이는 생활의 반경만큼이 딱 생각의 반경이다. 몸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몸이다. 인간은 사유할 줄 아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생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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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공동체와 윤리’라는 주제로 이번 학기 책을 읽으면서 또렷이 남는 말은 ‘생명주권’이었다. 나는 이 말이 내 삶의 윤리를 찾아가는 데 주어진 하나의 열쇠 같이 느껴졌다. 생명답게 살 권리, 생명주권! 그래서 나는 내 삶과 일의 윤리로서 생명 주권을 곰곰이 찾아가보려고 한다. ‘정규직 노동자로 생명 주권을 지키며 건강하게 일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조금 더 구체적인 내 질문이다. 


생명답게 살며 일한다는 것 

생명은 끊임없이 변하고 관계 맺으며 순환해야 한다. 이런 생명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생명주권이라는 말을 좀 파보자!  

존재의 리듬이 시절 인연을 만나는 것, 그것이 곧 운명이다. 하여 성공도 좌절도 결국은 타이밍이 결정한다. 그러니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기뻐할 것도, 느닷없이 난관에 부딪혔다고 해서 좌절할 수도 없다. 시대적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때를 만나지 않고 이루어진 역사는 없다. 그러니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흘러가는 수밖엔. 이것은 결코 무기력한 순응이나 퇴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의 형세를 알아 마음의 거처를 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능동적 실천이다. 나아가 어쩔 수 없음이란 나의 행위가 우주적 인연 조건의 소산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실존적 결단이 세계를 이끌어 간다고 보는 서구식 인간중심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태도다. 이것은 주체성보다는 생명 주권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전자가 데카르트적 이성을 전제로 삼는다면, 후자는 이성을 넘어 무의식 혹은 생명의 네트워크를 향한다.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고미숙. 북드라망. 71쪽)

생명 주권에는 생명의 네트워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인간의 이성을 넘어 우주와 무의식을 인정한다. 나는 이 생명에서 겸손함과 능동성을 동시에 읽었다. 생명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차서를 지켜 살아간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무성하게 피어나고 가을에는 수렴으로 열매 맺고 겨울에는 쉬면서 씨앗을 준비한다. 욕심내지 않는다. 시절인연이 따라 주지 않으면 어떤 것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 또한 봄에는 최선을 다해 씨 뿌리는 일을  하는 것이 운명에 대한 가장 능동적인 자세라는 것도 알았다. 이것은 생명의 원리이기에 체념이나 회한 같은 것들이 들어차지 않는다. 생명의 원리는 간단하고 가차 없다. 이런 생명의 이치를 어기면 반드시 아프거나 죽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 노동현장에서의 생명력을 키우는 것이 나에겐 관건이다. 올해 초 옮긴 직장은 노동 강도가 세다. 따지고 보면 연봉이 올라간 딱 그만큼의 차이일 것이다. 클라이언트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기획해서 파는 자본주의의 최전선의 일을 하면서, 나는 감히 생명력을 꿈꾸었다. 곰쌤은 생명의 존재형식으로서의 노동은 백수일 때만 가능하다고 하셨다. 사실 직장을 때려치우고 백수가 될 용기는 아직 없다. “백수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직업을 만드는 존재 혹은 직업과 직업 사이를 경쾌하게 오가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견주어볼 때 모든 정규직에게 직장을 때려치우라고 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단 나는 ‘정규직 노동 안에서 생명력을 키워내는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첫 번째 실험_일에서 삶을 배울 수 없을까?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일을 한다. 한 드라마의 대사처럼 살아있으면 뭐라도 해야 하는 거다. 거기에는 일과 몸, 일과 날, 일과 인생 등이 파동처럼 연결되어 있다. 화폐는 그 연결고리를 싹뚝 잘라버린다. 해서 일을 하면 할수록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고미숙. 북드라망 266쪽)
   
돈에 붙들리는 것이 문제란다. 다행히 나는 연봉보다 재밌을 거 같아서 이 일터를 선택했다. 단순히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실험이 가능했다. 일 자체가 기획하는 일이라 재밌게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좋은 조건이 되었다. “일이란 단순한 잡(Job)이나 워크(Work)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람이 임하는 일종의 액션”이라고 강조하며 일과 삶의 균형에 애쓰는 CEO의 마인드도 이 실험을 추동했다. 입사 초기, 물리적인 노동강도가 세다는 것을 직감하고 직장을 옮긴 것을 후회했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던 시간을 모조리 기획서 쓰는 일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 지독히 싫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몸도 무기력하고 아팠다. 진액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에 난생 처음 육미사물탕이라는 보약을 먹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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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토록 일이 싫었을까? 이 일을 하면서 아무런 배움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일하는 시간을 아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디지털 환경과 영어 등 새 직장의 바뀐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토로했을 때 친한 언니가 말했다. “그런 것들을 배우려고 대학원을 가는데, 돈 받으면서 대학원 다니는 거라고 생각해” 무릎을 탁 쳤다. 정말 이 세계에서 배울 것이 없겠는가. 내가 동경했던 일터였고 어렵사리 면접을 봐서 들어온 곳이다. 뭔가 다른 모색이 절실했다. 일과 삶과 공부의 벽을 허물고 변화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실험을 시작했다. 극하는 힘이 나를 변하게 만든다는 상극의 원리. 나는 일에서 상극의 힘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편하게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싶었던 거 같다. 이런 심리가 작동하니까 불편하고 어려운 일들이 찾아올까 두렵고 불안했다. 편하고 좋은 것에 길들여 질 때 신체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그렇다면 이 불편함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꿔야 했다. 

시절인연이 따라주었던지 내가 PM을 맡아 기획한 첫 PT에 성공했다. 새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마음을 먹었다. 내 시절인연으로 찾아온 일이라면 마음을 담아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의 행로를 바꾼 것이다. 마음을 바꾸니 몸이 조금씩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극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나를 극하는 불편함은 나를 변화의 길로 이끈다고 했던가. 

새 프로젝트는 S금융그룹 사사였다. 금융은 일자무식에 재테크에는 관심도 없는 나에겐 제대로 상극이다. 파견근무가 필요해 매일 S은행 본점으로 출근했다. 출근 동선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다른 경험의 출구가 열린 것이다. 파주에서부터 출발하는 빨간색 광역버스의 중간 지점쯤인 집 앞에서 버스를 탔는데, 출근 버스 안 풍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버스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비슷한 무채색 정장을 차려입고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마치 좀비 같았다. 도심외곽에서 서울 중심부로 출근하는 고연봉 노동자들의 세계와 나는 그렇게 만났다. “아! 내가 모르는 이런 세계가 있구나” 놀람과 동시에 호기심이 일었다. 이 세계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이 세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실험_일은 놀이가 될 수 없을까? 

모든 노동이 소외라면, 누구든 이 소외와의 전투를 벌여야 한다. …… 평생 하나의 직종에 종사하면서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노동과 정신 노동, 낚시와 목축, 비평과 사냥을 매끄럽게 넘나들 수 있는 유동성! 자율성과 능동성, 이것이 노동해방의 전제조건이어야 한다. …… 핵심은 노동에 대한 표상의 전복이다.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고미숙. 북드라망 271쪽) 

노동에 대한 표상을 바꾸고 능동적으로 유동해야 한다. 나는 일을 하면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디렉터가 되고 팀원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그것을 마무리하는 막내가 되기도 하고 작가의 글을 고치는 교열자이기도 하고 예산을 짜거나 견적을 낼 때는 회계자이기도 하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그런 일들을 모두 경험하며 넘나들 수 있다. 체력이 되는 한 어떤 일이든 주도적으로 챙긴다.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감당할 것이 많아졌다. 내가 정한 책임의 마지노선은 언제나 체력이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아프고 생명력은 사라지고 만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의 에너지가 다했다는 신호가 오면 일단 쉰다. 

생산 혹은 욕망의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운동과 창조다. 들뢰즈 가타리 식으로 말하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고 할 수 있다. 이 흐름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당연히 시작도 끝도 없다. 오직 접속(타자와의 마주침)과 변용(다르게 되기)만 존재할 뿐! 인간은 이 흐름에 참여할 때만 신체적 역량이 증가한다.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고미숙. 북드라망. 91쪽)

나는 이 욕망의 흐름에서 생명의 생생불식이 떠올랐다. 생명의 활동도 시작도 끝도 목적도 없이 흐름으로만 존재한다. 나는 이 생생불식에서 일의 태도와 자세를 한층 더 바꿔낼 수 있었다. 생명력을 키우면서 일하려면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서 자유로워져 과정과 활동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위계와 서열로 구성되어 있고 연봉과 실적으로 평가하는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다. 클라이언트에게 컴플레인을 받을 때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내 안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자기윤리를 지키며 자기 당당함으로 일하자고 팀원들을 독려하며 나에게도 주문을 건다. “주사위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는 어떤 수가 나와는 것과 상관없이 그 주사위가 던져지는 과정을 즐긴다. 반면 도박꾼은 높은 수가 나오는 결과만을 중시한다.”는 니체의 어린아이의 마음을 일러준 채운 쌤의 말을 되새기면서 과정에 집중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 평가보다 그 현장과 깊숙이 접속했다. 활동 그 자체에 집중하니 평가보다 그 일의 본질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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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수단이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임무로만 느끼다가 활동과 경험으로 보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과정에 집중하니 슬슬 재미도 생기고 배움이 일어났다. 이 직장이라는 지옥이 사람들과 관계 맺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장으로 보였다. 내가 정말 싫어하고 관심 없는 금융권 사사를 만들면서도 어떤 배움을 만나는 순간에는 빛이 탁 켜지는 느낌을 받았다. 금융권 사람들은 꼼꼼함이 경지를 넘어선다. 10원짜리 동전까지 맞추며 마감하는 사람들이다보니 어떤 팩트를 점검할 때 크로스 체크만 3번씩 한다. 나는 그 사람들을 꼼꼼함을 배우며 하루를 마감하고 정리하는 것도 배웠고 수많은 파일을 보기 쉽게 정리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다 됐다 싶을 때 한 번 더 챙겨본다. 하기 싫다고 생각했던 일 안에서 즐거움과 배움을 만들어 내는 것, 그렇게 나는 노동과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일하는 시간이 많아도 좀 신난다. 이것이 신체적 역량이 커진 것인지, 정신무장으로 마취하는 아큐의 정신승리법인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몸이 아프지는 않다.  


세 번째 실험_ 일하면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    

직장을 옮기면서 감당해야하는 것이 버겁기만 했던 올해 초, 1학기를 겨우 마치고 공부를 잠시 접고 싶다고 친한 도반들에게 말했다. 지금은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내 말에 아주 아픈 말들이 날아왔다. “그래 공부하지 마. 그런 마음으로 공부하는데 뭐가 변하겠어”, “공부는 잘할 수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닌데 ”등 모두 공부의 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일침이었다. 설렁설렁 공부의 리듬을 타며 자리를 지키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 이런 방식의 공부는 지식의 축적일 뿐이다. 생명은 축적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야속했지만 그때 도반들의 진솔한 말 덕분에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다른 리듬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제대로 공부하려면 완벽하게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허물어졌다. 조금씩 할 수 있는 만큼 마음을 내어 공부했다. 시간을 내어 읽을 수 있는 만큼 읽고 감이당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만큼 배우며 갈무리해 나갔다. 조금을 읽더라도 내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내 속도로 읽어 나갔다. 책을 다 읽지 못한 채 수업을 가는 날도 있었지만 도반들과 선생님들을 통해 다르게 텍스트를 만났다. 책을 다 못 읽으면 못 읽는 대로 조원들 토론이나 선생님들의 강의를 통해 마음을 툭 치는 문장들이 생겼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하다 보니 공부에 대한 다른 강밀도가 생기는 거 것 같았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집중이 문제였다. 몸은 바쁜데 공부도 하나하나 매듭을 지어 나가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또한 조원들과 한바탕 토론을 하며 웃고 떠들다 보면신체가 열리는 것 같았다. 주말에 쉬는 것보다 감이당에서 공부하고 암송하고 산책하는 것이 몸의 활력을 불러왔다. 함께 공부하는 묘미다. 지금 이 에세이를 쓰고 있는 시간도 일을 마치고 들어온 새벽 2시, 에세이 발표날도 수업을 참석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롤러코스터 마감일정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내 공부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자기윤리가 생겨난 것일까. 그냥 에세이는 써서 한해 공부를 매듭지어야 할 거 같았다. 에세이를 쓰기 위해 텍스트를 다시 읽어 나가는 것 자체가 기쁘다.  


나가며 

안락함과 편리함을 내세우는 거대 기술사회 바깥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길들여진 것보다 더 많은 관계를 맺고, 더 많은 책임을 지고, 더 많은 헌신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잊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가 관계 맺는 물건과 장소, 사람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세세한 부분까지 다시 배워야 한다.

(『그들이 사는 마을』. 스콧 새비지. 느린걸음 24쪽)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좋은 삶을 위해 다양하게 실험을 계속하는 것에 깊이 감명 받았고 그렇게 터득해 낸 소박하고 겸손한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지금 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다르게 힘쓰고 배워야 한다. 나도 다르게 힘쓰고 싶었다. 이 실험은 불과 8개월 동안의 고군분투다. 실험의 성패는 아직 잘 모르겠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다. 다만 일의 현장에서 생명을 지키는 자기윤리가 조금 선명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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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글을 쓰는 동안 ‘생명력 있는 노동’이라는 주문에 취해 유능함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었다. 자본주의식 노동에 균열을 내보겠다고 호기롭게 시작한 노동에서의 생명력이 결국 자기계발을 위한 주문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는 생명답게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 딜레마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노동 속에서 생명력을 발휘하겠다는 불온한 실험의 대가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내어 실험하는 시간들은 생명력이 넘쳤고 기뻤다. 이 실험이 생명 주권에 충실하지 않으면 몸은 바뀌지 않고 아프기만 할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가차 없음이다. 

무엇보다 몸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미쉬공동체 사람들처럼 계속 실험해야한다. 몸과 욕망이 바뀌고 익숙해져야 자본이 만들어 낸 안락함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생명답게 일 한다’는 열쇠를 꼭 쥐고 건강한 노동을 실험할 것이다. 이 실험이 계속되는 어느 날, 불현듯 백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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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유승연   2017-03-19 13:07:46
 
이림! 잘 읽었소~  나도 동참하고 싶은 실험이네. 무엇보다 몸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에 어려운 일이겠지만 공감가며 항상 화이팅~
     
키키이림   2017-03-22 20:38:34
 
승연쌤! 화이팅 감사! 계속 실험하고 실패하며 조금씩 샛길을 만들어 갑시다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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