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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 공생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7-10-21 14:28
조회 : 496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 공생



이소영, 박혜정, 박성희, 이가영, 정인혜, 조윤숙

 (감이당 대중지성 일요반, 1조 밴드)  





새롭게 만난 진화론 


초등학교 시절 처음 배운 진화론에선 태초에 인간은 절대자에 의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서서히 진화되었다고 했다. 그 진화의 시간개념이 그리 와 닿지는 않았다. 진화 과정을 이해할 만큼 긴 시간, 즉 단세포 때부터의 길고 긴 시간을 우리의 뇌가 감각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어린 날 들었던 다윈의 자연선택은 나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자연선택이란, 개체에는 어떤 특정 환경조건에 따라 차별적 적응도가 있고, 생존경쟁을 통해 변이들이 점진적으로 축적된다는 것을 말한다. 신다윈주의자 리처드 도킨스의 과격한 설명을 더 보충하자면, ‘길을 찾지 못한 개체들의 시체가 즐비한(리처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사이언스북스)’ 과정 속에서 성공을 거둔 개체가 최종 산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다윈 그 스스로가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생존경쟁이란 말 자체에는 살아남고 죽고의 차이에서 오는 자연선택의 살벌함이 느껴진다. 동시에 ‘인류’란 존재가 진화 과정에서 행운 같은 우연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에 우월감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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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경쟁이라는 말은 진화사에서 배우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몸소 겪고 있는 진행형 용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이 필수이며, 이 경쟁에서 도태되면 살 길이 막막하다. 서점가에 난무한 자기계발서들은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는 노하우를 전수한다. 우리는 습관처럼 종교처럼 그 경쟁의 길을 가고 있다. 거기에 자연선택 이론은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구나’라는 믿음에 강한 방점을 찍어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린 마굴리스는 우리가 믿어왔던 이 보편적인 진화론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자연선택이 아닌 공생 


린 마굴리스는 진화란 공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공생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채와 개체가 물리적으로 접촉하면서 사는 것’ 이상의 개념이다. 여러 학자들에 의한 ‘공생 발생’이라는 개념은 신종이 공생에서 유래한다는 것으로, 장기간의 지속적인 공생 관계를 통해 새로운 조직, 기관, 생물, 더 나아가 종이 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는 신종의 출현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며, 공생은 진화적 새로움과 종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개체, 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생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린 마굴리스는 자연선택을 부정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먼저 이 질문을 심플하게나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외계인이 와서 ‘너희는 어떻게 진화했니?’ 라는 질문을 다윈과 신다윈주의자와 린 마굴리스에게 동시에 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할까? 다윈은 인류는 ‘주로’ 자연선택으로 인해 진화한 것이라고 할 테고, 신다윈주의자는 ‘오직’ 자연선택만이 진화의 길이라고 할 것이며, 린 마굴리스는 ‘공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주로’와 ‘오직’에는 큰 차이가 있다. ‘주로’는 어떤 방향성을 열어 둔 것이라면 ‘오직’은 자연선택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반면, ‘공생’은 다윈의 ‘주로’ 자연선택인 진화에서 ‘아닐지도 모르는’ 어떤 미지의 방향성 안에 들어갈 수도 있고,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해한 린 마굴리스는 그 지점에 있다. 실제로 그녀의 책을 읽다보면, 그녀가 다윈주의의 장 안에 있는 거 같으면서도, 밖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혼란은 과학 상식의 부족으로 인한 오독 때문만은 아닌 거 같다. 구글링을 해 보면 린 마굴리스는 창조과학 쪽에도 껴 있고 다윈주의 쪽에 껴 있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녀는 자연선택이란 개념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제껏 우리가 배운 진화론에서 개체가 생존경쟁을 위한 ‘살아남기’의 결과였다면, 린 마굴리스의 개체는 공생을 위한 ‘살아가기’의 결과다.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 


우리 눈에 보일 만큼 큰 생물들은 모두 한때 독립생활을 했던 미생물들이 모여 더 큰 전체를 이룬 것이다. 한편 그들은 융합한 뒤, 예전에 개체성을 이루고 있던 각각의 특성들을 많이 잃었다(린 마굴리스, 『공생자행성』, 사이언스북스(2014), 78p). 


  

그녀는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나 볼 수 있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작은 세계로 안내한다. 그 속을 면밀히 살펴보면, 우리를 이루는 세포는 여러 세균들이 장시간에 걸쳐 공생하면서 진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종’이 없는 이 세균들이 서로 융합하여 식물과 동물의 조상을 비롯한 더 큰 생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조상은 세균이다! 

  

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면 여러 세균들이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융합한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예로, 현대 식물 세포의 조상인 ‘헤엄치는 녹조류’는 4가지 세균이 시간차를 두고 융합한 복합체이다. ‘발효성 고세균(황과 열을 좋아함)’, ‘유영성 세균’, ‘산소 호흡하는 세균’, 마지막으로 ‘초록색 광합성 세균’이 융합한다. 그 과정을 보면 두 번째 세균 융합체는 산소를 싫어했지만 세 번째 ‘산소 호흡하는 세균’과 융합하면서 산소에 대처하게 되고, 마지막 단계에서 ‘초록색 광합성 세균’을 소화하는 데 실패하면서, 소화되지 않은 초록색 세균은 엽록체가 된다. 이 최종 융합으로 공생자들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데, 이 ‘합병’은 엄청난 투쟁의 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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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마굴리스의 주요 이론인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이라는 것이 세포의 세포질에 있는 여분의 유전자가 ‘세균 유전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유전자들은 과거에 격렬하게 경쟁을 벌이다가 협정을 맺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유물이다. 오래전 다른 세균에게 먹혔다가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갇힌 세균들이 세포 소기관이 되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즉 우리의 근육, 소화기, 뇌 등에서 미토콘드리아는 우리의 모든 대사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고, 개체 수만으로 따지면 지구를 지배하는 생명체는 인간이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다. 즉 우리는 이미 독립된 단일한 개체가 아니라 수많은 세포, 세균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인 것. 또한 세균이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는가는 아직 연구 중이지만 아마 여러 화학물질들이 섞이고 ‘막’이 형성되면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막으로 생명은 생기지만 이 막은 내부를 외부와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부와 소통하고 순환하기 위한 것이다. 즉 외부가 있어 내부가 있는 것이고, 네가 있어 내가 있는 것이다. 우리 세포 안에는 이미 35억년의 공생의 역사가 각인되어 있다.




우아하지 않은 공생 


“생물이 서서히 자신의 부분들을 잃으면서 배경과 뒤섞인 뒤에도 약간의 잔재가 남아 자신이 존재했음을 알린다.”라고 말한다. 합체된 존재는 동반자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된다. 일단 융합이 완료되면, 동반자들의 상대적인 유전적 기여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린 마굴리스, 『공생자행성』, 사이언스북스(2014), 93p)


  

그렇다고 공생이 우아한 진화 과정이라는 건 아니다. 공생에 의한 진화는 점진적이 아니라 매우 순간적인 사건, 포식에 의한 사건이다. 또한 공생의 방식은 아름답지 않다. 서로 잡아먹히고, 기생하기도 하고 무단침입하기도 한다. 린 마굴리스는 이 공생 융합과 성적 융합의 원동력을 ‘굶주림’ 때문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원생생물들은 위험이 임박했을 때 동족을 먹음으로써 살아남으려는 시도를 하고, 이때 그들은 홀로 죽기보다는 융합하는 쪽을 택한다. 배수화를 통한 생존은 환경 위협에 대한 해결책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다시 위기가 지나가면 반수체로 돌아간다(린 마굴리스, 『공생자행성』, 사이언스북스(2014), 177~183p). 

  

이렇듯 린 마굴리스가 말하는 공생에 의한 변화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것이다. 다른 타자와의 만남도 나를 (폭력적으로!) 무너뜨린다. 전혀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이 공생은 새로움을 가져온다. 밴드글쓰기를 통해서도 이 과정을 알 수 있다. 우리 밴드의 구성원은 6명이다. 모두 여자. 미혼도 있고 기혼도 있다. 평균에 비해 미혼이 많은 편이다. 30대에서 40대 직장인이다 보니 각자의 삶에 한창 바쁘다. 어떤 인연으로 밴드조에 묶였는지 모르지만, 막상 밴드글을 쓰려니 막막했다. 여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찾기 어려워 보이는데 밴드글이라니! 시간은 모두 부족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서로 우왕좌왕, 읽지도 않은 책을 텍스트로 선정하려하기까지 했다. 서로는 각자가 살아온 삶의 맥락이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에세이야 어쨌든 어려운 것인데 나 혼자 쓰면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점점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도움을 청하거나 무리 짓는 것을 불편하고 촌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만 거슬려도 ‘민폐’니 ‘**충’이니 ‘극혐’이니 하면서 벌레 보듯 경멸하고, 혹여 그 피해자로서 ‘호구’나 ‘가마니’가 되지 않기 위해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점점 더 개별화되고 고립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이렇게 개체들의 단절적 현상들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관심조차 두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과 관련해서만 사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공생하는 생명체의 모습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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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편함의 근저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언젠가 나도 누구를 도와야 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차라리 누군가로부터 조건 없이 도움을 받는 것보다 대가를 지불하고 서비스를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가 그 서비스를 산다는 것 자체가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선언과도 같다. 왜냐하면 내가 서비스를 사는 이유는 타인이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나는 그 서비스를 사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내가 가진 능력을 주고 대가를 받는다. 내가 서비스를 사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내 서비스를 사줄 누군가도 필요한 것이다. 결국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으면서 관계가 주는 불편함을 잊고자 ‘혼자’라는 허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공생은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는데, 우리는 공생이라는 생존수단을 굳이 외면하는 것이다. 연대와 협력에 걸리는 시간과 갈등이 불편하고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이 허상 때문에 왜 공생이 시작되었는지를 잊었던 것이 아닐까.




랭킹(Ranking)이 아닌 링킹(Linking)!


‘랭킹(Ranking)’이 아닌 ‘링킹(Linking)이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한 말이지만 이는 바로 마굴리스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적자생존’이니 ‘자연선택’이니 하는 용어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인간, 호모 사피엔스를 생태계 최고의 승리자이자 지배자로 인식하게 한다. 동물들을 사냥으로 멸종시키거나 가축으로 길들이고, 위생이란 명목으로 곤충과 세균을 박멸하면서 인간은 마치 먹이사슬 제일 꼭대기의 최고 권력자인 듯 거드름을 피운다. 하지만 마굴리스는 인간을 ‘그저 그런 포유류’ 중 하나일 뿐이라 일축하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들의 입장에서 우리의 오만과 착각을 일깨운다. 



인간이 ‘선택’되었다는, 다른 모든 생물들이 오로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수가 많고, 강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인간이 가장 중요한 종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특별한 혜택을 입은 존재라는 집요한 환상은, 그저 그런 포유류라는 우리의 진정한 지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린 마굴리스, 『공생자행성』, 사이언스북스(2014), p211).


마굴리스는 이러한 개체 개념을 세포 단위로 해체하면서 기존 인식을 뒤집는다. 즉 우리의 몸 자체가 아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로 생명의 단위를 분해하면서 우리를 ‘인간’이라는 하나의 개별 종으로서보다 한때 독립생활을 했던 수많은 미생물들이 함께 모여 이뤄낸 연합체이자 ‘공생체’로 보는 것이다. 개체가 우선이 아니라 ‘따로 지내던 주인공들이 상호작용하는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개체성을 출현시킨다(린 마굴리스, 『공생자행성』, 사이언스북스(2014), p.31)’.


마굴리스의 시각이 신선한 점은 ‘종’이라는 익숙한 분류에 가려 보이지 않던 모든 생명의 존재를 일순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즉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각각의 개체가 세포와 미생물, 세균과 박테리아로 분해될 때 모든 생명체의 구성요소는 동일해진다. 따라서 종의 우위나 경쟁의 이유는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진화의 정해진 길을 향해 ‘진보’하고 있는 목적 지향적 존재가 아니라 가장 작은 생명의 단위들이 끊임없이 만나고 결합하고 흡수되고 공생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우연한 ‘사건’의 결과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른 종의 생사여탈권을 가진다는 생각은 단순한 착각을 넘어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의 생명 단위가 무시해버릴 만큼 작은 것이고, 어떤 존재가 완전히 박멸해버릴 정도로 우리 신체와 다른 것일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를 끌어안고 있는 이 수많은 ‘링크’들을 함부로 끊어버린다면 과연 인간은 독자적인 생명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굴리스는 바로 이렇게 우리의 초점을 ‘개체’에서 ‘전체’로, ‘우위’에서 ‘연합’으로 옮김으로써 단지 지구에 같이 존재하는 개체들의 ‘공존’을 넘어, 함께 살아왔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대한 역사를 가진 생명 연합체로서의 ‘공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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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을 탐색하며 발견되는 세포들이 생존을 위해 공생을 선택하는 모습을 우리는 마굴리스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마굴리스는 ‘초기 지구에 살던 가장 단순한 세균 세포도 이미 통합성을 갖추고 있었다(린 마굴리스, 『공생자행성』, 사이언스북스(2014),  135p)’라고 말했다. 모든 생물들과 우리의 몸 속 세포들은 항상 소통하고 있으며 외부의 타자들과도 상호작용하며 섞이며 살아가는 것이 생명체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공생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면 우리는 잃어 가는 공존, 공생의 감각을 찾고 본래의 생존방식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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