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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이야기꾼 장자, 일상에서 도를 살다 - 『장자』
 글쓴이 : 이민경 | 작성일 : 17-12-29 16:18
조회 : 107  

이야기꾼 장자, 일상에서 를 살다




이민경(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장자는 도인이다. 어딘지 신비하고 세속을 초월한 사람. 기수련 단전호흡……. 그러다 어느 날 홀연히 도를 깨닫고 속세를 떠나는 존재 말이다. 도인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신선이 된다. 고대의 신선술과 도가사상이 결합된 도교에서 장자는 남화진인, 또는 남화노선이라 불린다. 즉, 신선이라는 얘기다. 

신선들은 어떻게 사는가. 그들은 이슬만 먹고 산다. 밥벌이의 지겨움, 자식 문제, 배우자와의 갈등, 인간관계의 어려움. 이런 것들 때문에 애면글면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주로 만발한 복사꽃 아래서 바둑을 둔다. 교통수단은 구름 또는 바람. 스마트폰 없이도 세상을 꿴다. 그런 도인인 장자가 썼다는 [장자]라는 텍스트를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첫 장부터 신비한 바다에 사는 몸길이 수 천리 물고기 얘기가 나온다. 게다가 그 물고기는 어느 날 엄청난 크기의 새가 되어 9만 리 창공으로 솟아올라 한 번도 쉬지 않고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터무니없을 만큼 스케일이 크고 너무도 차이가 있어 상식을 의심하게 하는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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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이런 이미지의 도인 장자에게 끌렸다. 나 역시 삶을 초월한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삶은 내게 아주 많은 번거로운 일상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권태와 허무를 안겨주었다. 이게 다라고? 힘든 노역과 무의미 사이를 반복하며 생명을 소진하다 죽는 것? 삶이 이게 전부일리 없다. 나는 다르게 살고 싶었고 그 삶은 이곳이 아니라 항상 저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저곳에서의 삶에는 일상의 무게와 구차함을 한 방에 날려줄 신선술(?)도 필요했다.

그런데 책을 계속 읽다보니, 신선이 아니라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생활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와 똑같이 희로애락이 펼쳐지는 일상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생활하는 사람. 내가 만난 장자는 생활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는 이야기꾼이다. 신선은 인간들의 이야기에 잠깐씩만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렇다면 인간세계에 출연하지 않을 때 그들은 어떻게 사는가? 내가 막연히 도달하고 싶었던(또는 도망치고 싶었던) 그곳에 펼쳐진 일상의 이야기. 

1. 생활인 장자_저잣거리의 자연인

장자의 구체적 삶에 대한 정확한 연대기적 기록은 없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전국시대 중기를 살았던 송나라사람 장주에 대한 짧은 얘기가 나온다. 이 짧은 기록과 <장자>에 나오는 삶의 흔적을 재구성해 보면, 장자는 하급 관리였다가 그마저 집어치우고 짚신을 삼아 팔았다. 장자가 살았던 곳은 지저분한 뒷골목이었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도인 장자의 생활무대는 무릉도원이 아니라 바로 저잣거리 한가운데였던 것이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상업과 수공업이 농업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발달한 시기이다. 즉 수공업으로 먹고 살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장자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비좁고 지저분한 뒷골목에 살며 가난해서 신을 삼고 있고 목덜미는 비쩍 마른 채 두통으로 얼굴이 누렇게 뜬 꼴이 되는(<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 765쪽)”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그러면 그도 정부의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으러 관청에 찾아간다. 거기에서 민원을 담당하는 공무원인 감하우의 지독한 관료주의와 맞닥트려 분통을 터트리는 장자. 당대최고의 논리학자이자 고위관료인 친구 혜시와 토론하고 산책하며 우정을 나누는 장자. 그러나 친구와 주변사람들의 질시와 몰이해를 겪기도 하고,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먼저 죽은 친구를 절실하게 그리워하는 장자도 그 안에 있었다. 

이러한 생활인 장자의 모습은 나에게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의 그 다음 이야기가 펼쳐진 것처럼. 남쪽 바다로 날아간 거대한 붕새의 촘촘한 일상. 문명의 기초가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는 시기, 수 백 개의 제후국이 강력한 제국으로 통합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시대에, 치열하게 공부하는 지식인이자, 생계문제를 걱정하고, 우정과 질시와 배신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우리와 같은 삶의 현장을 살았던 바로 그 장자 말이다. “서랍 같은 아파트에 수납되어 살며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갇혀 컴퓨터만 쳐다보고 있고 목덜미는 자라처럼 구부러진 채 커피와 술로 얼굴이 누렇게 뜬 꼴이 된” 나는 격하게 공감하며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2. 이야기꾼 장자

 넘나듦의 기술_이야기

도인인 장자의 생활은 어떤 지점에서 우리와 다른가. 생활인 장자에 이어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이야기꾼 장자의 모습이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남자. 어떤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 

나는 아직도 호접몽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를 잊지 못한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장자라는 사람이 낮잠을 잤는데 꿈에서 나비가 되었데. 그런데 깨고 나니 장자였데.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걸까,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걸까?’ 나는 한순간에 그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내 안의 무엇인가를 흔드는 그 강렬함! 태곳적 진화의 시초까지 단박에 거슬러 올라가 내가 해체되고 다른 생명들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그 묘한 느낌. 나는 며칠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사람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기다릴 때의 그 짜릿함이란! 아주 길고 길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러나 단 몇 줄의 이 짧은 이야기. 나는 가끔 장자의 나비가 얼마나 많은 사유의 경계를 허물었는지를 생각하면 작은 전율을 느낀다. 이게 다 꿈이야. 너는 나비고 나비는 너야. 만물은 하나야.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넓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고 있는 장자의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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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실재적, 경험적, 감성적 내용이 배제되어 오직 형식만 남은 정언명령과 다르다. 사람들은 물론 어떤 이야기에서건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러나 개인의 해석은 개인의 것으로 남은 채 이야기의 원형은 전달된다. 양반들이 열녀로 해석했건,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해석하건 춘향이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냈던 사랑이야기가 고스란히 원형을 간직하며 퍼져 나간 것처럼 말이다.

장자는 왜 이야기가 필요했는가. 전달 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도란 본래 한계가 없고 말이란 애초 일정한 의미 내용이 없다.(같은 책/72쪽) 그리하여 장자는 전달이 아니라 묘사를 택한다. 자신이 도달한 도의 세계를 이야기로 그린 것이다. 가봤더니 그곳에는 느티나무가 있는 정자가 있고 그 옆에는 우물이 있어. 그리고 이러저러하게 생긴 사람들이 살고 있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의 말과 생활도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영화처럼. 그리고 이 영화에는 장자 자신도 종종 까메오(!)로 출연한다. 그 역시 그 세계의 거주민이기 때문에.

일상을 살고 일상을 이해했던 도인. 그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식은 이야기여야 했다. 일상과 도의 세계를 연결하는 방식으로서의 이야기. 이쪽의 세상에 저쪽의 세상을 묘사하는 방법으로서의 이야기. 경계를 넘나들며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기술, 그것이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위대한 힘

흥미진진한 자동암기시스템. 우리가 드라마를 열심히 보는 이유는?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막장이라 욕하면서도 다음이 궁금해 열심히 본방사수를 한다.

장자는 하층관리였으며 서민 출신이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고, 더 빨리 더 멀리 퍼지는 것이 스토리텔링임을 알았을 것이다. 도덕경의 도가도 비상도...맞나? 암튼 멋진 말인데 잘 안 외워진다. 읽을 때는 알 것도 같은데 책에서 눈을 떼면 잊어버려 전달하기도 어렵다. 등 넓이가 수 천리나 되는 물고기 곤이 붕새가 된 이야기, 혼돈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는 이야기, 아내의 장례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의 이야기는 어떤가. 그냥 와서 꽂힌다! 

이야기는 또한 “메시지를 보다 삶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정신적 시뮬레이션을 하게 한다.(<Stick 스틱!> 칩 히스.댄 히스 지음, 안진환.박슬라 옮김/웅진윙스)고 한다. 즉, 개념을 풀어헤쳐 삶에 직접 접목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생활로 펼쳐진 이야기는 그 것을 듣는 사람에게 마치 그 삶을 사는 듯 가상체험이 가능하게 만든다. 이렇게 체험한 이야기 중 어떤 것은 잊히고 어떤 것은 기억된다. 이렇게 기억되는 메시지는 그 특성으로 단순성, 의외성, 구체성, 신뢰성, 그리고 감성과 스토리를 가진다고 한다(위의 책). 장자 이야기의 특성과 일치한다. 그의 이야기는 짧다. 그러나 긴 사유를 이끌어 낸다. 단순하다. 그러나 독자의 추측을 뛰어넘는 의외성으로 경계를 허문다. 영화 아바타가 떠오르는 파격과 아름다움. 거기에 구체적인 상황이 더해져 머리에 한번 각인되면 떨어지지 않는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가 가지는 가장 위대한 힘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 수단에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지어내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지어내는’ 이라고 썼다. 천지만물의 순환과 우주의 생성까지, 이 세상 모든 것은 이야기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는 힘이 있다. 우주의 메시지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해 전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역시 이야기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매일 매일의 사건, 과거,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삶은 우리에게 닥쳐오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방식으로 그것을 해석하며 창조한다. 

우리는 종종 서로 상관이 없는 것들도 엮어 인과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지어낸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이 된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는 ‘허구를 창조하고 그것을 믿는’ 인간의 특질이 잘 드러나 있다.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느냐가 우리의 현실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가 가지는 진정 위대한 힘이다. 그리고 장자는 그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3. 이야기꾼이 들려준 세상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는 곳_전제 

장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문체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다. 전달하려는 목적에 따라 세 가지 다른 방식을 사용했는데, “사람들은 자기 입장과 같으면 따르고 다르면 반대하며, 자기 생각과 같으면 옳다하고 다르면 잘못이라”하기 때문에, “시비의 언쟁을 그치게”하고, “시비를 초월하고 속박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 노닐면서 자적하여 그 천수를 다하기 위해서” 각각 우언, 중언, 치언을 사용했다.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 673쪽)

세 가지 다른 방식을 사용했지만 장자가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시비를 떠나는 것’이다. 장자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입장에 갇히지 않고, 시비의 언쟁을 그쳐 마침내 시비를 초월하여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시비란 무엇인가? 옳고 그름이다. 어떤 게 옳고 어떤 게 그른가? 사람들은 그 자체를 보지 못한다. 단지 자기와 생각이 같으면 옳다고 따르며 기뻐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틀렸다고 반대하며 노여워하는 것이다. 그저 각자의 입장을 기준으로 삼을 뿐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시비를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시비를 말하지 않을 때 사물은 조화를 지닌다. 조화를 지니는 일과 시비를 말하는 것은 결코 같은 수가 없다. 때문에 지인은 시비를 말하지 않는다... 공자는 나이 육십에 육 십 번이나 생각을 바꾸었소... 시비를 정해서 말하지 않은 거요. 호오시비를 말하지 않고 사람들을 심복케 하여 자기와 대립되는 것을 없애고 천하의 도리를 바로 잡았소.(같은 책/673~676쪽) 

여기서 잠시 감하우와의 대치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장자는 감하우의 관료적인 일처리에 화가 났다. 굶어죽을 상황에 처한 사람을 앞에 놓고 그냥 정해진 규칙대로 할뿐이라고 말하는 그 기계적인 무관심. 나 또한 사업을 하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관료주의에 부딪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많은 투자를 한 새로운 사업허가를, 관련 규정 중 애매한 부분에 적힌 문장하나를 잘못 해석한 것을 관행이라는 이유로 그대로 적용하여 반려하려는 것이다. 확실한 위법이나 미비였다면 차라리 덜 억울했을 것이다.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엄청난 손해의 이유가 아주 하찮은 전임자의 실수이고 그걸 답습하려는 관행이라니. 나는 그 담당자에게 적개심을 느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데 나는 죄는 밉지 않은데 그 사람은 진짜 미웠다. 장자 역시 ‘불끈 성이 나서 낯빛이 달라질’ 정도로 화가 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의 분노는 이 지점에서 나와 어떻게 달라지기 시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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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무능한 관리가 우리 식구를 굶겨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라는 이야기 대신, 일단 그는 당사자들을 사건현장에서 떼어놓는다. 배경과 등장인물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리하여 마치 무대에서 벌어지는 연극처럼 떨어져 보게 한다. 진행 중인 연애는 글로 쓸 수 없다고 했던가. 감정의 거리두기가 안 되기 때문이다. 장자도 처음엔 화가 났다. 하지만 그는 감하우의 인간성이나 품격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의 관료적인 처리방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절실하고 즉각적으로 아주 작은 도움이 필요한지를 전달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건어물전의 붕어’라는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다.

장자가 감하우에게 대놓고 관료주의를 비판했다면 어찌되었을까. 감하우는 사건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상황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자신만의 입장에 갇혀 버렸을 것이고, 이렇게 서로 입장이 갈라져 시비가 생기면 그 다음 순서는 싸우는 것이다. 그것도 죽기 살기로.

그들의 마음이 시비를 가릴 때 그 모질기란 쇠뇌나 활을 당겼다 세차게 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승리를 지키려 할 때 그 끈덕진 고집이란 맹세를 지키는 것과 같다. 그들이 외물의 싸움으로 날로 기운이 쇠약해 가는 것은 가을과 겨울에 초목이 말라 시듦과 같다.(같은 책/52쪽)

쇠뇌나 활을 세차게 당겼다 쏘듯이 모질게(!) 서로 싸우면서 관계는 메말라가고 삶은 쇠락해 간다. 반대를 위한 반대, 공격을 위한 공격. 상대가 좋다고 하는 건 싫다고 하고, 싫다고 하는 건 좋다고 한다. “같은 사물에 대한 견해차에 불과한 자기 입장에 갇히면 편견을 내세워 실은 모두가 하나임을 알지 못하게(같은 책/64쪽)”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언쟁의 말들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릴 수 없다. 나에게 와서 박히고 상대에게 가서 박힌다.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사건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상처는 처절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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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을 할 때 나에게 이런 재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입장이고 상대에겐 비난일 뿐이다. 공격받은 상대는 방어모드 풀가동. 그 다음은? 막장까지 가는 것. 말을 해도, 안 해도 꼬인다. 상대의 말은 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내 입장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왜곡되어 버린다. 명심하자. 인간세상에서는 시비를 말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옛사람의 예지에는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데가 있었다. 애초 사물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무의 경지.. 그 다음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구별을 두지 않는 경지.. 그 다음은 사물도 있고 구별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시비를 고려하지 않는 입장이다. 시비가 나타나면 도가 파괴되는 원인이 되고, 도가 파괴되면 또한 편애(애증)가 이루어지는 원인이 된다. (같은 책/65쪽)

모든 애증은 시비에서 나온다. 일상을 삶의 현장으로 가지고 있었던 장자는 그래서 시비의 문제를 가장 경계했다. 그리하여 장자는 시비가 벌어지는 지점에 도달하면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한 몸 안에 있는 간과 쓸개도 멀리 떨어진 초나라와 월나라 같고,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만물은 모두 하나이다.(같은 책/149쪽)장자가 창조한 이야기세계에서 시비란 단지 입장의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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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님 말고 vs. 그 사람 되기

가면 그 옹색한 속박의 세계에서 자유로이 거동하여 명예 따위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네 말을 들어주면 하고, 안 들어주면 그만두어라. 자기 마음에 출입문을 세우지 말고 보루도 쌓지 말며 마음의 거처를 일정하게 하여 부득이할 경우에만 응하도록 하라. (같은 책/115쪽)

폭군인 위나라 왕에게 간언하러 가겠다는 안회에게 공자가 한 말이다. 네 말을 들어주면 하고, 안 들어주면 그만두어라. 아님 말고의 정수다. 내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상대가 나와 같은 입장이 될 때 가능하다. 안 들어준다는 건? 입장의 통일이 안 된 거다. 이럴 때 내 입장만 가지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내가 경험한 것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 그 경험을 한 것처럼 만들려는 시도이다. 이건 불가능하다. 예수도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했을 뿐이다. 너를 위한다고 하지만 어찌 보면 내 잘난 척이고 폭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누군가의 말에 공감하는 것은 내가 공감 받았을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의 말을 우리는 듣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장자는 ‘그 사람 되기’를 하라고 말한다. “그가 갓난아기가 되면 역시 그와 함께 갓난애가 되십시오. 그가 절도 없이 굴면 또한 함께 절도 없이 구십시오. 그가 턱없이 방종하면 함께 방종하십시오. 그가 하는 대로 따르면서 그를 인도하여 결점이 없는 경지로 이끌어 들여야 합니다.(같은 책/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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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들은 다른 부족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과 똑 같이 사는 과정을 거친다. 정신과 의사 역시 전이라는 과정을 치료의 중요한 과정으로 본다. 우리는 쉽게 역지사지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의 몸을 가지고 그 사람처럼 살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 사람과 만나 그 사람이 되는 것. 나를 떠나 판단을 멈추고 내 입장을 버리는 것.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장자> 잡편 중 설검편에는 칼싸움에 중독된 문왕을 깨우치러 가는 장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는 가서 다짜고짜 칼싸움만 좋아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는 건 잘못이라고 충고하지 않는다. 장자는 사흘 걸려 문왕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검복을 스스로 갖추어 입고 자신을 최고의 검사라고 소개한다. 왕이 좋아하는 것을 장자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왕은 기뻐하며 최고의 검객을 대적할 만한 검사를 뽑을 때까지 기다리라 명한다. 마침내 왕이 준비가 되어 부르자 장자는 그때서야 검의 비유를 들어 말을 꺼낸다. 천자의 검, 제후의 검, 서민의 검 중 어떤 검을 휘두르겠느냐고. 문왕은 크게 깨우치고 석 달 동안 문밖출입을 하지 않는다. 

장자의 이 일화는 ‘그가 하는 대로 따르면서 그를 인도하여 결점이 없는 경지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상대를 위하는 것처럼 우겼지만 결국 내 입장을 관철시키려 고집했던 수많은 나의 충고가 생각난다. 내 충고를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품었던 적대감까지도 말이다. 장자 스스로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그의 도를 재연해 내는 이런 이야기와 마주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 중 하나다. 장자의 삶 역시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

 모든 것은 하나다_등장인물

장자의 이야기에는 다채로운 존재들이 등장한다. 공자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겹치기 출연하는 캐릭터도 별로 없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무생물까지 실로 다양한 출연진을 자랑한다. 사람들은 백정, 목수, 목동, 어부, 국경을 지키는 문지기, 매미를 잡는 노인, 형벌을 받아 다리가 잘린 사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 등 직업, 신분을 총 망라한다. 이들의 입을 빌어 말하는 도의 세계. 장자의 세계에서는 겉모습이나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 장애를 가졌지만 덕이 충만한 사람들은 그 덕으로 인하여 오히려 비장애인들을 이상하게 보이게 만든다. 신분이란 형식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의 사람들은 겉모습과 상관없이 온전한 삶을 사는 똑같은 하나의 생명일 뿐이라는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장자>에서 빈번하게 묻는 질문 중 하나는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이다. 천하의 군주들이 그 질문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장자에게는 천하에 쓸 데 없는 질문이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혼이 나거나(“물러가라 넌 야비한 인간이다. 얼마나 불쾌한 물음이냐.” <같은 책/224쪽>) 무시를 당한다. 그런데 그 질문을 하는 대상이 참 신기하다. 천하의 왕과 제후들이 목동에게 어부에게 국경지기에게 묻고 다니는 것이다. 장자가 보기에 지위의 고하와 도의 경지는 상관이 없다. 

<장자> 내편 양생주에는 백정이 소를 잡는 것을 보고 제왕이 양생의 도를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백정인 포정은 그가 하는 일을 통해 도에 이르렀다. 19년간 소를 잡는 일에서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경지로 나아간 것이다. 장자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전형적이지 않다. 그들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도 앞에서 완전하고 평등하다. 이렇게 다양한 존재들을 볼 수 있는 힘. 그 존재들의 완전함을 꿰뚫어 보는 장자의 눈.

이 세계에는 또한 물고기, 새, 매미, 올빼미, 상수리나무, 원숭이, 개구리, 사마귀 등 뭇 생명들이 출연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존재들의 공동체인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인간이 주인공도 아니다. 물고기는 미인이 오면 도망친다. 인간의 미추는 그들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실 인간중심의 시선으로 만든 동물이야기는 가짜다. 예쁜 공주님에게 우호적인 동물들, 크기와 모양만 다를 뿐 인간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진 그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 말이다. 

만물을 이루는 존재들은 등가를 가지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완전한 존재이다. 손가락이 하나 더 있건 없건 우리가 만든 편협한 기준이 완전성을 해칠 수 없는 것처럼. 장자는 만물제동의 세계관을 그의 이야기 속 존재들로 보여준다. 
 
4.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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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장자는 도인이자 생활인이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도의 세계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야기꾼이다. 그는 일상과 도의 경계에서 다른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다. <장자>를 읽으며 나 자신도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  지어낸 이야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이야기를 지어내는 힘의 역동성을 모르면 내가 창조한 세상에 수동적으로 갇히는 상황이 발생한다. 현재의 상황을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 어떤 이야기건 그걸 믿으면 그게 내 삶이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성격에 맞게 행동한다. 여기서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고, 다른 곳 다른 시간이 되어야만 다르게 살 수 있다고 변명하며 말이다. 

나에게 닥치는 사건들. 그것들에 대한 해석도 전부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이 이야기라면 한 가지 패턴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변주하여 만들어 내는 능력을 키우면 된다. 단일한 해석의 회로에 갇히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지어내는 힘. 그리고 내 세계를 내가 창조할 수 있는 능동적인 공간으로 전환하는 사유의 전복이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고 따르고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은 기존의 내 입장과 같은 것일 뿐이지 그것이 만고의 진리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성찰도 함께.

나는 막연하게 언젠가는 다르게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만 졸업하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낳으면, 돈만 벌면... 그런데 다시 또 그 아이가 학교만 졸업하면, 결혼만 하면... 이런 복사/붙여넣기의 반복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에 대한 구체성도 없었다. 막연히 이건 아닌데 상태의 무기력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내가 기다리는 ‘언젠가’는 언제가 되어도 오지 않는 부재의 시간. 다른 삶은 다른 곳이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카피하는 한 다른 삶은 없다. 복사와 붙여넣기를 멈출 것. 이곳에서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것. 이것이 이야기꾼 장자가 내게 전수해 준 비기(!)의 신선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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