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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장자』, 자유로운 삶의 지침서 - 장자 『장자』
 글쓴이 : 푸르니 | 작성일 : 17-12-29 21:50
조회 : 102  
                    


『장자』, 자유로운 삶의 지침서
                                          




김현화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장자』는 올해 나와 동고동락한 인생 최고의 책이다. 일 년을 함께 할 책은 의미와 재미를 두루 갖추어야 했다. 장자의 사상서이지만 이야기 형식이라 지루하지 않고 수월하게 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언에 담긴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장자』의 이야기들은 역설과 아이러니로 가득했고, 비유나 상징적 표현이 많아 종잡을 수 없었다. 뜬구름처럼 알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개념과 의미들로 막막함과 좌절을 거듭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난해함과 심오함에 더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사유의 혼돈화~ 이것이 바로 장자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까?

장자를 읽는 내내 눈길이 가는 키워드는 ‘마음’이었다. 장자의 친구인 혜시가 그의 철학은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다고 지적하자, 장자는 “어째서 무하유의 드넓은 들판에 심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면서, 그 그늘에서 유유히 누워 자 보지는 못하오.”(『장자』, 안동림 역, 현암사, 소요유, 43쪽)라고 반문한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란 그 어떤 것도 없는 곳으로 ‘텅 빈 마음’을 뜻한다. 장자의 핵심 사상인 ‘소요유(逍遙遊)’는 텅 빈 마음에서 유유히 노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장자가 추구한 자유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의 경지였을까? 그것은 장자가 대면했던 시대가 가혹할 정도로 부자유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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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어떻게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2300여 년 전 장자가 던졌던 이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현대사회는 과거보다 더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으로 스트레스가 만연하고, 부와 명예, 권력을 좇느라 우리의 삶이 불안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살던 시대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부득이한 현실
장자(BC369년~286년)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235자로 짧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장주이고, 몽 지방에 살았고, 젊어서 칠원리라는 벼슬을 했으며, 아내와 제자가 있었다는 것 정도만 팩트이다. 장자와 관련된『장자』 속 에피소드들은 허구지만 그의 사상을 짐작케 하는 단서가 되어 준다.

기원전 4세기 중반.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격변기였다. 당시에는 어떤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쏜살같이 빠르게 달려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정할 수 없었고, 들끓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었다. 청동기에서 철기로의 기술 혁신은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상업과 수공업이 따라 발전하면서 중국 전체가 커다란 교역 시장이 되었다. 생산과 교역의 기초 위에 큰 도시들이 생겨났고, 이익을 얻기 위해 송나라 사람이 월나라에 모자를 팔러가고(39쪽), 한 나그네가 손 안트는 약의 비법을 오나라 왕과 거래하며(42쪽), 정객들은 힘 있는 제후의 식객이 되기 위해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팔러 다녔다. 또 과학사상이 발전하고 두레박 같은 새로운 발명품도 생겨났다. ‘기계를 갖는다면 기계에 의한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 그런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듯이'(327쪽), 기술의 진보는 풍족함과 편리함 이면에 복잡한 삶과 기계에 의존하는 마음을 초래했다.

한편 잉여 생산물을 동력으로 전쟁이 일상적이었고 살육과 파괴가 이어졌다. 주나라로 대변되던 주류 가치가 붕괴되고 세상이 혼탁해지자 사회를 걱정하는 현자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었고, 제후들의 식객이 되려는 정객들은 갖은 말솜씨로 명예와 이익을 좇아 서로 경합하고 쟁탈전을 벌였다. 통치자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농민들이 전쟁에 동원되었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 『장자』에 의하면 당시의 통치자들은 ‘경솔하게 국권을 남용하고 잘못을 깨닫지 못하며, 함부로 백성을 사지에 몰아넣어 그 주검이 너무 많아, 나라를 못에 비유해서 계량한다면 그 속에 무성한 잡초와 같을 지경이라, 백성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103쪽) 형편이었다. 특히 장자가 살았던 송나라는 최악의 정국이었다. 송은 망해가는 약소국이었고, 사방으로부터 적을 맞아 싸워야 하는 전란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송 왕의 폭정으로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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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백성을 안정되게 통치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해 제자백가라고 하는 여러 사상가들이 활약했다. 유가는 인과 예, 법가는 법, 묵자는 겸애를 주장하며 저마다의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장자는 인간의 통치에는 저항했다. 그는 통치자들의 잔혹한 수탈과 압제에 반대하고, 지배층과 그들을 돕는 지식인들을 나라를 훔치는 큰 도둑의 무리로 보았다. 지배자의 통치에 삶을 의존하기 보다는,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도’에 대해 탐구했다. 장자는 노자의 ‘도’개념을 이어받아서 도가 사상가로 알려져 있으나, 노자와 장자의 도에는 차이가 있다. 노자의 도는 통치술의 일환이고, 우주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정적인 도이다. 장자의 도는 생성 소멸 변화하는 자연 그 자체이다. 운동하는 변화의 과정에는 일종의 필연성이 존재하는데, 장자는 이 자연의 필연성을 운명이라 했다. 그는 자연의 법칙 안에서 인간이 숙명적으로 짊어진 부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모색했다. 만물은 본래 ‘스스로 변화’(自化)하기 마련이다. 변화의 원인은 스스로의 내부에 있고, 사물은 그 내부를 따른다. 인간의 내부는 마음이니, 스스로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2. 미몽에 빠진 사람들
성심을 스승으로 삼다
장자가 보기에 전쟁과 군주의 폭정, 빈곤과 부귀,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가난, 삶과 죽음 등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필연적인 세계였다. 그는 인간의 부득이한 운명에 대해 탄식한다. 인생은 준마가 벽의 틈새를 언뜻 지나가듯 순식간인데, 생노병사는 자기 뜻대로 제어할 수 없고, 평생 힘쓰고 지쳐도 돌아갈 곳을 모른다. ‘사람의 생애란 본래 이렇듯 어리석은 것일까? 아니면 나만이 어리석고 사람들 중에는 어리석지 않은 자가 있는 것일까?’(55쪽) 장자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성심’ 때문이라고 보았다.
무릇 일정한 성심에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느 누가 스승이 없는 사람이 있으랴. 어찌 눈앞에 차례로 나타나는 감정을 판별하는 현자라야만 스승을 가지게 된다고 하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스승은 있는 법이다.(56쪽) 
성심에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 이건 무슨 뜻인가? 성심(成心)은 한자 풀이로는 ‘이루어진 마음’ 또는 ‘굳어진 마음’이다. 하나의 사견(私見)으로서, 온전한 마음이 아니고 어느 특정한 것에 집착된 마음이다. 모든 사람은 조건이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서 그가 속한 공동체의 규칙과 질서를 보고 듣고 배운다. 각자가 살아오는 동안 형성된 역사적, 환경적 조건의 산물이 성심인 셈이다. 그러니 성심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외부 조건에 의해 굳어진 마음은 우리의 삶을 구속하게 된다. 장자의 ‘망량 이야기’를 들어보자. 엷은 그림자인 ‘망량’이 그림자인 ‘경’에게 “어째서 앉았다 일어섰다 일정한 절도가 없이 움직이냐?”고 묻는다. 그림자(마음)는 기대고 있는 것(사람의 몸)을 따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가 기대고 있는 것은 또 달리 그가 기대고 있는 것을 따라 그럴 거라 말한다.(86쪽) 여기서의 망량이 바로 마음의 그림자인 성심이다. 망량의 불만과 항의에 경은 자신은 사람 몸의 그림자에 불과하므로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없고, 그 몸도 다른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몸은 가족이나 사회, 국가, 시대, 종교, 전통, 가치 등등에 기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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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마음에 얽매어 사는 것을 꿈을 꾼다고 말하고 있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꿈속에서 또한 그 꿈을 점치기도 하다가 깨어나서야 꿈이었음을 아오. 참된 깨어남이 있고 나서라야 이 인생이 커다란 한 바탕의 꿈인 줄을 아는 거요.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깨어있다고 자만하여 아는 체를 하며 군주라고 우러러 받들고, 소치는 목동이라고 천대하는 따위 차별을 하오. 옹졸한 짓이요. 공자도 당신도 모두 꿈을 꾸고 있소.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또한 꿈이요.(81쪽)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은 ‘성심을 스승삼아 살아간다’는 말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에 얽매어 한 바탕 꿈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또 설령 깨달았다 하더라도, 깨달음은 또 다른 성심이 될 수 있다. 계속 마음의 패턴이 바뀌는 것이라고 할까. 그래서 공자도, 책을 읽는 독자도, 심지에 장자 자신도 계속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들 성심이 없으랴. 

장자는 자기의 마음에 갇힌 인간을 우물 안 개구리에 비유한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살고 있는 곳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별수 없는 것은 살고 있는 철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오. 한 가지 재주뿐인 사람에게 도에 대해 말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교육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오.”(418쪽)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은 우물 안 개구리와 여름 벌레처럼 시공간에 얽매어 있다. 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르침에 얽매인 성심으로 인해 저마다의 꿈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유한함으로 무한함을 좇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백년 남짓이다. 누구나 때가 되면 죽게 마련인, 시공간에 한정된 존재다. 그런데 천지 만물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 변화하므로 무한한 우주에 대한 지식은 끝이 없다. 그래서 장자는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써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 그런데도 알려고 한다면 더욱 위태로울 뿐이다.’(91쪽)고 했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지식은 무궁한 자연에 비해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우주만물을 규명하려고 하니까 혼란이 뒤따르고 위태롭다는 것이다. 우주만물이라는 앎의 대상은 주체인 마음이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은 몸이라는 한계를 가지지만 우리의 마음은 무한대다. 한정된 삶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나 다 알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어서, 유한한 몸으로 무한한 욕망을 좇으면 위험하다고 볼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 속에는 부귀, 명예, 지식을 추구하는 욕망이 끝없이 이어져 왔다. 
하.은.주의 3대 이후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외부의 사물 때문에 자기의 본성을 바꾸지 않는 이가 없다. 서민은 목숨 걸고 이를 쫓고, 사인은 몸을 바쳐 명예를 좇으며, 대부는 몸을 바쳐 가문을 지키고, 성천자는 목숨 바쳐 천하를 지킨다. 그래서 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은 하는 일이 다르고 명칭도 다르지만, 그 본성을 해치고 자기 몸을 희생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250쪽)
장자 시대의 사람들은 서민은 이익, 사인은 명예, 대부는 가문, 천자는 천하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다. 고위 고관으로 있는 자는 모두 의식주에 마음이 빼앗겨 그것만 소중히 여기며 이익만을 보고 경솔하게 자신의 삶을 망쳐버렸다. 백이는 명예를 위해, 도척은 이욕 때문에, 제왕은 그 지위 때문에. 이유와 명분이 무엇이건 그 몸을 희생하고 죽게 되었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이는 비단 그 시대만의 이야기일까? 신자본주의 시대인 요즘은 더 심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스컴에 오르는 고위 공직자들의 뇌물 수수 사건, 치정에 의한 폭행과 살인, 투기판에서 일희일비하는 사람들. 부와 명예와 지위를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이 쌓이지 않으면 괴로워하고, 남에게 인기있고 싶은 사람은 명성이 자자하지 않으면 좌절하며, 세력이나 물력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갈망으로 애태운다. 이렇듯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몸을 망치고, 참된 삶을 잃고 있는 사람은 세속에 이끌려서 스스로의 참된 즐거움을 즐기지 못한다. 어리석은 욕망의 끝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다. 어찌 미혹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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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된 깨어남 
부지가 최고의 앎이다
장자에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다. 설결과 왕예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설결이 “선생님은 모든 존재가 하나같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아십니까?”하고 묻자, 왕예는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나?”(75쪽)고 말한다. 네 번 물었으나 네 번 다 모른다고 한다. 그러자 설결은 ‘모르는 것(不知)이 바로 참된 앎’임을 깨닫고 껑충 뛰며 매우 좋아한다. 제자의 처음 질문은 모든 존재가 하나같이 옳다고 인정하는 기준이 있는가?였다. 과연 그런 기준이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성심에 따라 살기 때문에 모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전국시대에 유가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묵가에서는 나쁘다고 하고, 묵가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유가에서 나쁘다고 하여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은 스스로를 세상의 기준으로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점을 옳다고 한다면 천하 사람이 모두 요임금이 되는 셈이듯 천하에는 공인된 옳음이 있는 게 아니다.(600쪽) 세상에 공인된 옳음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치우쳐 있고, 보편적이지 않으며 두루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움직여서 일정하지 않은 것일뿐더러, 세상은 끝없이 변화한다. 인간의 지혜로 사물의 이치를 이해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함과 같고, 알았다고 해도 실은 모름과 같아서, 자기의 지혜를 잊고 부지의 입장에 이르러야 비로소 정말 안다는 것이 된다.(621쪽) 부지(不知)란 무지(無知)가 아니다. 지식이 없는 무식한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기존 지식을 잊고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나'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다. 기준이나 잣대로 작용하는 분별하고 차별하는 지식을 버릴 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의 심지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그 지점에서 진정한 앎이 시작되는 것이다. 

장자에 추남 애태타 이야기(덕충부, 159쪽)가 나온다. 위나라에 아주 흉하게 생긴 애태타라는 추남이 있는데 그를 한번 본 사람들은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아주 많다. 별다른 지위나 재산,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수 많은 남녀가 그에게 모여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남에게 동조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기의 핵심 비결이다. 그가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걸 아직 아무도 들은 적이 없고, 늘 남에게 동조할 뿐이라고 한다. 애태타는 한마디로 '부지' 상태의 아이콘이다. 인간 관계에서 자신이 좀 안다고, 무조건 내가 옳다고, 자기를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불편한 마음이 들고 기피하게 된다.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을 때 주변 사람들과 마음이 통할 수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자연의 도리를 따른다 
인간의 심지(마음의 지식)가 더 이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장자는 자연의 도를 따르라고 한다. 부지의 입장에 선 왕예, 애태타와 같은 인물은 지식이 자연의 도리에 도달한 사람, 즉 자연의 필연성을 운명으로 아는 진인이다. 그래서 ‘자기의 판단을 내세우지 않고 사물을 평상시의 자연스런 상태 속에 맡기고, 그저 자연의 변화를 따르는’(63쪽) 삶을 산다. 자연은 스스로(自) 그러함(然)을 말한다. ‘사물에는 본래 그래야 할 것이 갖추어져 있고, 또 본래 좋다고 할 만한 데가 있어서 어떤 사물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 없고 좋지 않은 데가 없다.'(61쪽) 가장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발가락이 붙어 있어도 네 발가락이라 생각지 않고, 손가락이 더 있어도 육손이라 여기지 않는다.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생각지 않으며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이 타고난 고유한 성향대로 사는 것이 바로 자연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장자의 ‘해조 이야기’(456쪽)는 만물은 자연을 따를 때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노나라에 해조가 날아왔는데 노왕은 새를 아끼는 마음으로 궁궐 안에 가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술, 음악, 고기를 극진하게 대접한다. 해조는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새의 방식을 원하는데도 말이다. 아무리 좋은 새장이 있고 먹이가 있어도 새는 숲이나 강에서 자유롭게 날아 다니고, 제 식성대로 먹으며, 자기 무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행복한 법이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삶의 길이다. 그래서 장자가 삶을 보전하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식과는 달랐다. 언젠가 초나라 위왕이 사신에게 후한 재물을 보내며 재상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자, 장자는 차라리 더러운 진흙탕에서 뒹굴지언정 권력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며 그 제의를 거절한다.(441쪽) 부귀영화를 누리는 출세의 길을 멀리하고, 칠원리라는 작은 벼슬마저 버리고 은거를 택했고, ‘못가의 꿩’처럼 소박하게 살아갔다. 곧은 나무는 일찍 베이고, 단 샘물은 일찍 고갈되어 버린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권력, 이익, 명예라는 세속적 가치보다 생명과 자유라는 존재의 가치가 더 소중했다. 장자는 세속적 쓸모의 가치나 잣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온전한 삶이라는 더 큰 유용함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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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명과 자유의 가치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생명과 자유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오리 다리가 짧다고 늘이면 괴로워하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면 아파하는 법이다. 장자에 혼돈에 일곱 구멍을 내는 이야기(236쪽)가 나온다. 남쪽 바다의 임금 숙과 북쪽 바다의 임금 홀은, 중앙의 임금인 혼돈의 땅에서 만난다. 혼돈은 그들을 아주 잘 대접했고,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를 갚기 위해 혼돈에게 없는 구멍을 뚫어주기로 한다.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는데 칠일 째 혼돈이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은혜갚음은 선의의 행동인데 왜 죽음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끝났을까? 혼돈을 인간과 같게 만들려는 동일화의 욕망이 화근이었다. 아무리 선의라 할지라도 자신의 성심을 잣대로 삼아 행동한다면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자연의 도에 의거함이란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해, 인기와 비인기 같은 세속의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대립을 초월해서 시비를 조화시키고 만물의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이다. 어떤 인위도 가하지 않고 혼돈을 혼돈이게 놓아두는 것,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자연과 본성에 따라 사는 길이다.

4. 성심의 해체, 무하유지향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에 얽매어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 똑같은 『장자』의 이야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지 않는가. 자신이 해석한 세계가 지금 자신이 만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마음장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가에 따라 다른 삶이 펼쳐진다. 그 어떤 것도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자유롭고, 꼭 막힌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감옥처럼 답답할 터. 내 마음의 길을 어디로, 어떻게 내는가에 따라 삶의 길이 달라 질 수 있다.
 
갱년기가 되면서 인생의 후반기는 좀 다르게 살고 싶었다. 지난 세월 집착하던 ‘좋은 엄마’라는 표상과 가정 주부라는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길 원했다. 그래서 장자 첫편에 나오는 대붕의 변신(27쪽) 이야기에 빨려들었다. 북녘 바다의 물고기 곤이 변해서 붕이라는 큰 새가 된다. 붕은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이 일 때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변화의 첫 걸음은 변화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마음이다. 곤도 깊고 어두운 북녘 바다 속에서 새가 되는 꿈을 키워 갔을 것이다. 곤의 크기는 몇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니, 얼마나 크고 원대한 꿈이었을까. 그리고 파도를 일으키기를 3천 리,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르기를 9만리라 했으니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바람이 쌓인 것이 두텁지 않으면 큰 날개를 띄울만한 힘이 없다고 한다. 9만리나 올라가야 날개 밑에 충분한 바람이 쌓이고, 그런 뒤에야 붕은 비로소 바람을 타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남쪽을 향하여 날게 된다. 여기서의 바람이란 수행의 정도가 아닐까. 존재의 변이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임계치에 도달할 정도의 실행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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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 나오는 현인 거백옥은 나이 육십에 육십 번 변화했다. 처음에는 옳다고 했던 일도 나중에는 잘못이라고 물리쳤다.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일도 지난 오십구 년 동안에 잘못이라 했던 일인지 모른다.(640쪽) 공자도 나이 육십에 육십 번이나 생각을 바꾸었다고 하지 않았나. 변화의 출발은 자신의 성심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성심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지만 특정한 성심은 집착이 되어 시비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 말을 옳다고 고집하고 그 행동이 반드시 이러이러 해야 한다고 집착하면 재앙을 겪고 우환을 만나게 된다.”(726쪽) 자신의 마음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려서 그 집착을 끊고, 지나친 욕심을 버려야 자기에 속박되지 않는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매 순간 나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마음 속을 들여다 봐야 알 수 있다. 마음을 알아차리려면 우선 멈춰야 한다. 공자가 한 어부에게 자신은 과실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노. 위. 진. 채 나라에서 네 번이나 원한을 산 것은 어째서인지?묻는다. 어부는 이렇게 대답해 준다.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들로부터 떨어지려고 달린 자가 있었소. 발을 들어 올리는 횟수가 잦으면 그만큼 발자국이 많아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소. 그래서 아직 느리게 달린다고 생각하여 더욱 빨리 쉬지 않고 달리다가 힘이 빠져 죽고 말았소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멈추어 있으면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을 몰랐던 거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오!(어부, 751쪽)
어부는 공자가 인의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백방으로 나돌아봐야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시비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열심히 하면 할수록 화를 면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밖으로 내달리는 마음을 멈추고, 내면을 들여다보고, 고요한 마음을 가꾸는 데 힘쓰라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수양하라’는 처방전을 내려 준다. 『장자』에는 오상아, 심재, 좌망과 같이 마음을 재계하고 수양하는 방법들이 나온다. 관건은 감각 기관인 귀나 눈의 지각을 멈추고, 마음의 작용을 밖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바깥 일에 얽매인 자는 마음이 뒤흔들려서 그 마음을 바로잡을 수가 없게 되오. 심지라는 마음 속의 작용을 닫아야 하오. 또 마음속의 생각에 얽매인 자는 헝클어져서 그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없게 되오. 눈, 귀 따위의 바깥 작용을 닫아야 하오. 이렇듯 마음이 어지럽혀지고 본성의 자유가 없어져서 속과 바깥이 얽매인 자는 도덕을 지닐 수가 없으며 하물며 대도에 그대로 몸을 맡긴 채 유유자적하기란 더욱 어렵소. (경상초, 571쪽)
성심을 알아차리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면 언제 어디서나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소요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방에 눈부신 햇빛이 비쳐 환히 밝은 것처럼 마음을 텅 비우면 모든 사물의 진상이 환하게 뚜렷해진다. 행복도 이 호젓하고 텅 빈 마음에 머무는 것이다.(116쪽) 

비울수록 충만한 삶.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비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나는 왜 감이당에서 인문 철학을 공부하는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성심을 깨고 마음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계속 공부를 하면서 내가 어디에 얽매어 있는지, 내 마음이 어디에 집착하는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찾아갈 것이다. 『장자』는 그 사유의 여정에서 무하유지향으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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