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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육화된 글쓰기로 가는 길 -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글쓴이 : 전화노인 | 작성일 : 18-01-03 19:48
조회 : 413  




육화된 글쓰기로 가는 길






김해숙(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1. 인트로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조르바일까? 소설의 화자 ‘나’일까? 처음 읽을 때는 조르바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따라가느라 급급해서 조르바만 주인공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점점 보였다. 조르바에게서 인생 수업을 받으며 점점 변해가는 ‘나’의 모습이.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20세기 초다. 혼란과 격동의 시대다. 공간적 배경도 대단히 다이내믹하다. 그리스와 발칸반도 등 세계 1-2차 대전이 한창인 불구덩이 같은 곳이다. 이런 시공간을 살아가는 ‘나’에게 두 명의 도반이 있었다. 한 사람은 ‘나’와 같이 30대 중반의 청년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다. 그는 조국을 위해 기꺼이 전쟁터로 나가 민족을 구하는 혁명가 스타브리다키다. 이 사람은 소설에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처음, 중간, 끝 등 중요 지점에서 편지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언어 표현도 심상치 않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여’, ‘나의 제자여’ 라는 표현을 보면 대단히 열정적인 도반 관계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다른 도반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조르바다. 지식인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중의 상노동자로 광부가 직업이다. 한 마디로 막장 인생이다. 하지만 ‘나’에게 인생의 참맛을 알려주는 선생으로서 독특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으로 ‘나’를 잡아당긴다. 스타브리다키는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하러 가는 것으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조르바는 조국이나 하나님이나 ‘대의명분’이란 것을 죽도록 섬겨봤자 서로 죽고 죽이는 현장에 투입되는 노예일 뿐이니 그것들로부터 달아나는 게 진짜 자유라고 말한다. 이 두 명의 도반 사이에서 ‘나’가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즉 글쓰기가 자기 혁명이 되는 과정이 바로 내가 이번에 눈여겨 본 지점이다.



2. 혁명의 시작, 떠남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첫 구절이다.

‘나’의 손에는 크레타행 배표가 쥐어져 있다. 그는 크레타 섬으로 가서 광산을 열 참이다. 지금 이 항구에는 비가 오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만큼이나 그의 마음은 몹시 심란하다. 처음에는 좀 설레기도 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어찌 보면 무작정 떠나는 길이고, 어찌 보면 무모한 여행일 수도 있다. 불안감이 스멀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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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때문일까, 허기 때문일까. ‘나’는 이 항구에서 쓰라린 작별 인사를 했던 친구 스타브리다키의 얼굴을 떠올린다. 볼셰비키로 인해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 15만 그리스인들을 구하기 위해 그가 카프카스로 떠난 게 작년이었나? 그와의 이별이 전생이었는지, 작년인지, 바로 어젯밤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다만 그 날의 빗줄기와 추위와 새벽의 미명만을 기억할 뿐이다. 이별의 한기는 매우 써늘했고, 비 오는 새벽 안개 속의 항구는 적막했다. 



스타브리다키는 ‘나’의 분신 같은 친구다. 그런 그가 이 항구에서 뼈아픈 이별의 말을 했다. "이 책벌레야, 자네가 말했잖은가?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자네는 설교만 잘하는 사람인가? 왜 나랑 같이 가지 않지?"



왜 따라가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세계 1차 대전 직후 카프카스에서 벌어진 분쟁의 해결사로 파견될 정도로 스타브리다키는 상당한 정치적 입지를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나’ 역시 여러 사상가들을 두루 섭렵한 지식인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에게는 나름 책무가 있었을 것이다. 민족과 민중을 위해 시대가 요구하는 현장에서 실천적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 그래서 스타브리다키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민족에게 핍박받는 동포를 구하러 가는 길에 왜 ‘나’가 동행하지 않는지를.



어쨌든 스타브리다키는 떠났다. 그가 떠난 후 ‘나’는 한시도 편할 수 없었다. 친구에게서 들은 마지막 작별의 말이 자신을 찔러왔기 때문이었다. “이 책벌레야!” 이 말에는 비난과 연민과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 말에 몹시 화가 났다.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다 오랫동안 처박아 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심한다. ‘나’ 또한 떠나겠다고. 동포를 구하려는 게 친구의 혁명이라면 ’나‘는 다른 혁명을 하고 싶었다. ’나‘는 ‘농부와 노동자와 함께 하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 민족을 구하러 간 스타브리다키, 민중과 함께 하는 생활을 선택하는 ‘나’. 이 두 친구는 왜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일까? 무엇이 이 둘의 길을 갈라놓은 것일까? 이 둘의 입장에 당시 시대 상황이 고스란히 오버랩된다. 그리고 이 때의 이별이 곧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조르바’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3. 요동치는 시대, 각기 다른 혁명의 길


그러면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친구 스타브리다키가 간 길을 추적해 보면 이 시대가 얼마나 요동치는 시대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때는 1919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막 끝났을 때다. 스타브리다키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파견된 곳은 카프카스 땅이다.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에서는 지금 북쪽에선 볼셰비키가, 아래쪽에서는 쿠르드족이 그리스 유민들을 보는 족족 죽여대고 있다.



볼셰비키와 쿠르드족이 그리스인들에게 이런 대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데는 당시 세계 정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쿠르드족은 오랜 동안 터키의 지배하에 있던 민족이었다. 물론 그리스도 터키의 압제하에 있었다. 조르바도 한창 젊었을 때 독립운동에 참여했었다. 그런데 그리스는 독립국이 되자마자 에게해 지역의 섬들을 한두 개씩 정복해간다. 물론 터키가 쇠망해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세계 1차 대전이 터졌다. 그리스는 재빨리 연합국에 가입했다. 그리고 연합국의 기세에 힘입어 카프카스 땅 즉 흑해 근처 내륙 지역까지 정복해나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때 러시아에서 세기의 혁명이 일어난다. 볼셰비키 혁명이다. 볼셰비키는 혁명 공약으로 소수 민족의 독립을 내세웠다. 마침 윌슨이 그 유명한 민족자결주의도 공표한 참이었다. 독립된 나라를 갖고 싶었던 쿠르드족은 볼셰비키와 손을 잡았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또한 남부 러시아에 퍼져있는 그리스인들이 못마땅했다. 그들은 협공을 해서 그리스인들을 그 땅에서 내몰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볼셰비키에게 당하고 한쪽에서는 쿠르드에게 당하고 있는 것.....이들을 구하여 이들을 필요로 하는 땅(마케도니아 변방, 멀리 떨어진 트라케 변방 말일세) 자유로운 우리 국토에 심어 주려면 사랑과 이해와 열의와 현실 감각이 필요해. 이 길만이 수십만 그리스인을 구하는 길이며 우리 자신을 구하는 길이네 .....< 이 원안의 그리스인들을 구한다면,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구원하지 못하면 나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다가오는 쿠르드인들의 총소리가 들리는군. 이들 그리스인들은 내 눈치만 보고 있어.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듯이. (그리스인 조르바』 207쪽/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스타브리다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을 바치는 것 즉 대의를 위해 몸 바치는 게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책벌레’처럼 책상에서 글만 쓰고 있는 ‘나’에게 지식인의 책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네는 크레타 해안에 드러누워 바다 소리와 산투르 소리를 듣고 있으리...... 친구여, 행동하기 싫어하는 내 스승이여. 행동, 행동......구제의 길은 그것 뿐이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다른 것을 본다. 그는 ‘민족 혹은 국가’가 폭력과 손을 잡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탄생한 거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민족애와 애국심에 경도되지도 않는다. 친구 스타브리다키와 함께 카프카스로 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깊게 볼 점은 ‘나’가 민족을 구하겠다는 그 길을 가지 않은 그 선택이 그리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이 온 세상을 휩쓸던 시대였다. 우리 민족 우리 국가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던 그런 때. 세계대전도 그런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경도되지 않았다. 왜였을까?



‘나’는 그 즈음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민족과 국가이데올로기가 판치는 현실 너머에서 다른 것을 발견했다. 뭐냐하면 레닌이 주창한 러시아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은 국가와 민족이란 개념으로 생긴 게 아니다. 부르주와와 프로레타리아, 자본주와 노동자라는 계급을 전복하는 게 러시아 혁명이다. 그 사상이 바로 ‘나’로 하여금 노동자와의 공동체 생활을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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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도 많이 했을 것 같다. 그는 볼셰비키가 말한 공약도 이해 되고, 볼셰비키가 세운 러시아 정부도 마음속으로 지지한다(물론 작가 카잔차키스는 나중에 또 혁명 후의 러시아에 대해서는 비판의식도 가지지만). 레닌을 그리스도의 화신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는 공산주의를 새로운 이상으로 삼았다. 또한 소수민족도 사실 그리스가 독립했듯이 독립하는 게 맞는 거 아닐까. 그런데 지금 카프카스에서는 볼셰비키와 쿠르드족에 의해 ‘나’의 민족 그리스인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이걸 어쩌나?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이 부분에서 이 화자 ‘나’란 사람의 면모가 새롭게 보인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횡행하고 있던 당시로선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이 훗날 조르바의 입을 빌려 아래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두목,.....내가 터키인들의 귀를 얼마나 자르고, 터키인들의 귀를 얼마나 술에 절였는지.....우리는 독립군이 되어 그 OO을 했는데, 사기 치고 훔치고, 죽이고 했는데, 그 때문에 게오르기스 왕자가 크레타로 왔답니다. 그러고는 자유라니!......우리가 이 더러운 놈의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살인을 저지르고 사기 치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웃겨. 자유라니! 우리 같은 것들에게 벼락을 내리지 않고 자유를 주신 하느님이라니.....두목은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가 괴로운 듯이 내게 물었다.(같은 책 36쪽)



‘나’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카프카스로 떠나는 친구와 동행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이 들고 있는 깃발 행렬에는 동참할 수 없었다. 국가와 민족이란 이름아래 폭력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죽고 죽이는 그런 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지? 세상에 이토록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건 왜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건 사람들의 영혼이 피폐해진 탓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건 직접 혁명전선에 뛰어드는 것도 있지만 정신의 혁명도 있다, 나는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구원할 테다.’




하여 그는 친구 스타브리다키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글쓰기로 혁명을 하겠다는 것이다. 헌데 그 글쓰기가 또 의미심장하다. 그가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 원고는 ‘붓다’다. 그는 어릴 적부터 수도사가 꿈이었을 정도로 골수 깊은 그리스정교회 신자다. 그런 그가 붓다와 씨름하고 있다. 국가도 넘고 종교도 넘어선 그 어름에서 고군분투 중인 그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4. ‘책 학교’에서 ‘조르바 학교’로


하지만 문제는 글이었다. 레닌의 사상을 머리에 품고 붓다 같은 수행으로 글과 씨름하고 있지만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다. 글이 영 나가지 않는다. 아직 머리만 뜨거울 뿐 도대체 글이 생명력이 없었다. 답답하기만 했던 그에게 ‘책벌레!’라는 스타브리다키의 조소는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글쓰기를 접고 새로운 인생에 뛰어들기 딱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는 이제 스타브리다키가 지적한대로 ‘행동’을 해보기로 한다. 관념적인 글쓰기일랑은 다 집어치우고 레닌주의를 실현할 노동자 공동체 생활을 해보기로 한다. 사실 이것만 봐도 이 사람 많이 독특하기는 하다. 광산을 가졌을 정도의 부르주아 출신이 노동자 공동체를 꿈꾸는 것을 보면.


나’의 결심은 사실 그만큼 절실했고 절박했다. 그는 크레타로 떠나면서 강한 다짐을 한다. “붓다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어찌보면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글이 근심덩어리라는 건 확실하다. 그만큼 글쓰기라는 허상에 목매어 살았고, 이제부터는 실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자신을 변하게 하고 싶다는 얘기다.



하지만 크레타로 떠나기 전날 밤 장면을 보면, 그는 글쓰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몸이란 걸 잘 알 수 있다. 이삿짐을 싸다가 미완성 원고 ‘붓다’를 보자 마치 태동을 느끼는 산모 같은 행동을 한다. 책의 씨앗인 원고가 뱃속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친다고 느낀다. 결국 그는 아기를 싸듯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원고 뭉치를 이삿짐 속에 넣는다. 이는 그가 책벌레에서는 벗어나고 싶지만, 자기 책에다 생명을 불어넣는 작가로서의 욕망은 크다는 증거다. 지금 그가 정말 원하는 건 글쓰기를 버리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글이 살아 숨쉴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용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글쓰기에 몸이 달아 있는 사람이란 얘기다. 크레타섬에서 그가 찾고 싶은 것도 바로 글쓰기의 생명력이었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 조르바라는 60대 중반 노인은 살아있는 ‘삶의 교과서’였다. ‘나’는 한 눈에 조르바에게 반한다. 울퉁불퉁한 손으로 곡괭이질을 하고, 여자를 다루듯 부드럽고 섬세하게 산투르를 다루는 조르바. 그는 인생도 그렇게 섬세하고 주의깊게 다루는 삶의 달인이었다. 벌레먹은 나무처럼 풍상에 찌들고 주름투성이인 그의 얼굴에서 ‘나’는 ‘책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을 본다. 조르바 역시 한 눈에 관념에 절어 쩔쩔매는 ‘나’의 상태를 간파한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 풍상을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뿐.(같은 책95쪽)



펜대 운전사 ‘나’가 볼 때 조르바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조르바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입에서 푸짐하게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그대로 받아적기만 해도 ‘나’의 글이 살아 숨쉴 것만 같았다. 누에고치에서 실이 나오듯,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부처의 말이 따로 없고, 철학자의 말이 따로 없었다. 만고풍상에서 건져올린 깨달은 언어들은 생생 그 자체였다. 그 원천은 바로 몸으로 세상과 육박해서 살아낸 경험이었다.


‘나’는 반문한다. 이제까지 읽었던 수만 권의 책 속에서, 그토록 암송하던 순수시의 대명사 말라르메의 시에서, 그리고 옆구리에 꼭 끼고 다니던 불교경전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배웠던가. 이렇게 생명력 없이 말라 비틀어진 글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어떻게 글쓰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건지 스스로도 한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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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책 학교’에서 ‘조르바 학교’로 전학을 한다. 그리고 이 ‘위대한 민중’인 조르바를 교장으로 삼고 세상을 교과서로 삼는다. 학습 목표도 정한다. ‘이제까지 나는 나무 위에서 하늘만 바라보던 새처럼 형이상학적인 말을 했다. 이제부터는 땅에다 배를 대고 사는 뱀 같은 사람 조르바의 현실적인 말을 배우겠다.’ 이른바 생동감 있는 글쓰기 프로젝트.



그런데 조르바는 ‘나’가 왜 이렇게 꽉 막혀 있는 지, ‘나의 글’이 왜 생동감이 없는지 단번에 진단했다. 그는 레닌과 붓다를 새로운 이상향으로 설정하는 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고 일갈한다. 무엇에든 기대를 하는 순간 노예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빠지든 붓다에 빠지든 종교가 구원이 되지 못하듯 시대 정신에 기댈 것도 없단다. 자신의 현실에서 나름대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란 논리다.



‘나’는 이제 자신의 병통을 알았으니 뚫어야했다. ‘붓다’라는 진흙 뻘속에 갇힌 자신의 글을 건져내야 했다. 크레타에서의 현실 경험이 글로 된다면 그 글은 조르바의 ‘말’처럼 살아 숨쉬는 언어가 될 것이다. 그런 언어들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글쓰기만이 거대한 전쟁터로 뛰어든 스타브리다키와는 또 다른 혁명이 될 터였다.



5. 생명력 있는 글쓰기를 배우다


20세기 초는 자본과 노동을 신성시 했던 시대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도 거기에서 파생된 이념이다. 그런데 조르바와 ‘나’는 그런 세태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갈탄광 사업을 한다. 거의 놀이에 가깝다. 원래부터 ‘나’의 사업 목적은 민중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않게 뱃사람 신드바드 같은 이야기 보따리 조르바를 만난 것이다. 하여 ‘나’의 주요 사업은 조르바에게서 듣는 세상 공부였다.



‘나’는 몇 달 동안 조르바와 함께 생활하면서 세상의 진면목을 다 경험한다. 아니, 마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나’는 하나하나 몸으로 느끼며 배워간다. 작품에서는 그걸 갱도를 파들어가는 것으로 형상화 해놓았다. 조르바가 인부들과 함께 갱도를 파들어 가는 시간에 ‘나’는 글쓰기의 갱도를 파고 들어간다. 조르바가 몸으로 갱도를 열어 갈 때마다, ‘나’는 크레타로 올 때 싸갖고 온 붓다 원고를 꺼내어 씨름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보면 화자 ‘나’가 작가 카잔차키스와 거의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조르바 역시 카잔차키스가 만난 실제 인물이며 둘은 실제로도 진한 우정을 나누었다. 조르바를 니체와 붓다처럼 자신을 변화시킨 스승으로 손꼽았을 정도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을 보면 조르바를 만나기 직전에 에파포스 신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에파포스는 감촉의 신 즉 신체성을 중시한 신이었다.



환상보다는 육체를 더 좋아하고, 속담에 나오는 늑대처럼 배를 채우는 문제라면 남들의 약속은 믿지 않는 촉감의 신 에파포스. 그는 눈이나 귀를 믿지 않고, 인간과 흙을 만지고 움켜쥐기를, 그것들의 따스함이 자신의 체온과 뒤섞여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심지어 그는 만지기 쉽게끔 영혼까지도 육체로 바꾸고 싶어한다. 땅위를 걷고, 땅을 사랑하고, <자신의 모습을 따서 그대로> 땅을 다시 만들어 놓기를 바라는 가장 믿음직하고 부지런한 신-그것이 나의 신이었다.(영혼의 자서전』니코스 카잔차키스, 581쪽) 



조르바는 어찌 보면 에파포스 신이 현신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나’에게 세상을, 삶을, 느껴보라고 시종일관 가르치고 있다. 제자인 ‘나’도 충실히 조르바 선생에게 배운다. 먹는 것의 신성함도 알고, 바다에 몸을 맡겨 태양과 파도를 온몸으로 느낀다. 하지만 습관을 고치기는 쉽지 않았다. ‘나’의 인생 독법은 여전히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었다. 그건 ‘나’가 정신과 육체, 이론과 실천 등을 여전히 합일시키지 못한 채 이분법에 갖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즈음 ‘나’가 탐구하던 인물은 붓다였다. 그는 사람들이 붓다처럼 깨닫는다면 날마다 국경선이 변하고, 민족과 민족끼리 서로 파괴하는 현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네 인기녀 ‘과수댁’을 안고 싶을 때마다. 또 그녀가 눈길을 보내 올 때마다 불경을 베낀다. 몸의 욕망을 따르면 정신의 고통이 커질 것이라는 게 이유다. 그에게 있어 ‘과수댁’은 물리쳐야 할 ‘마라’였다. 아니 자신의 몸의 욕망 자체가 ‘마라’였다. 이처럼 그는 고행 속에서 해탈을 얻는 ‘붓다’를 이상형으로 삼으면서 스스로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선생 조르바는 제자 ‘나’의 이런 점이 못내 안타깝다. 그래서 끝없이 종용한다. 과수댁이 보내는 에로스의 화살을 기꺼이 맞을 것. 사람은 짐승이니까 두려워 말고 육체에 정신을 맡겨 볼 것. 그게 해방이고 해탈이다. 정신과 육체의 합일, 그걸 못 느끼는 신체로는 밤새 글을 써봤자 헛 일. ‘두목 당신’은 지금 생명력 제로인 글만 쓰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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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지부진하던 ‘나’의 글쓰기에 새로운 전환점이 온다. 갱도가 무너질 뻔한 사건 후, 즉 죽을 위기를 겪고 난 후, ‘나’는 스스로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백척간두에서 뛰어 내리듯 큰 맘 먹고 과수댁의 집으로 돌진한다. 과수댁을 안은 뒤, 그는 비로소 육체와 영혼의 합일을 경험한다. 그러자 몇 년간 그토록 끙끙거리던 ‘붓다’ 원고가 완성된다. 드디어 ‘붓다’를 낳았다! 한 작품을 제대로 낳았을 때 작가는 다른 신체가 된다. ‘나’는 이제 ‘붓다’를 떠날 때가 되었다. 때마침 갈탄광 사업 놀이도 끝장났다. 에파포스 신을 영접한 건지, 조르바 학교의 학점을 이수한 건지, 이제 ‘나’는 조르바 학교를 졸업하고자 한다.



6. 육화된 글쓰기, 혁명이 되다


‘붓다’를 낳고 다른 신체가 된 ‘나’에게 조르바는 같이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는 ‘나’가 자신처럼 몸으로 육박하는 신체로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식료품상점 주인같이 자꾸 계산하지 말고, 긴 줄 끝에 묶인 것도 모르고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걸 자유라고 착각하지 말고, 진짜 자유롭게 지식, 조국, 이상 그런 것들과 반대의 길을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조르바에게 배운대로 책에 물릴 때까지 책과 더 씨름해보겠다’며 함께 떠나지 않는다. 조르바를 진짜로 존경하고 좋아했지만 같은 길을 가진 않는다. 이 책의 처음 장면에서 친구 스타브리다키와의 동행을 거절한 것처럼.



‘나’는 왜 도반들과의 동행을 거절했을까. 조르바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조르바의 말은 피로 겪은 인생에서 건져 올린 말이라서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었다. 또한 혁명가 친구 스타브리다키는 불같은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사람이었다. 몸으로 혁명 그자체를 살아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글을 쓸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조르바의 ‘말’을 글로 쓰고, 온몸으로 전쟁을 살다간 혁명가 친구를 글로써 형상화하는 게 ‘나’의 운명이었다. 그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혁명의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친구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고 자신 만의 길을 간다.



다음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면서 화자 ‘나’가 조르바를 작품으로 형상화시키는 대목이다.



조르바가 꿈으로 나타났다......나는 그와 더불어 크레타 해안에서 함께 보냈던 생활을 재구성하고 기억을 더듬어 조르바가 내 마음에다 뿌렸던 말, 절규, 몸짓, 눈물, 춤을 모아 보존하고 싶다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나는 이 욕망을, 이 지구 어느 곳에선가 조르바가 죽어가고 있는 징후로 파악했다.....한동안 나는, 조르바의 추억을 모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주저했다. 유치한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내게 이 일을 시키는 저 신비로운 손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내 마음은.....조르바를 기억해내어 실체 그대로 소생시키면서 미친 듯이 써내려 갔다.(그리스인 조르바』 442쪽)


그가 내 몸속에서 어떤 야수의 모습으로 튀어나올지 굉장한 기대를 품고 기다렸다.....벌레도-아무 쓸모도 없는 벌레조차-나비가 되기를 원하는데, 조르바라면 무엇이 되기를 원할까?-......나는 성(*)이 바뀌어 대지처럼 여자가 되어, 씨앗에게 <말씀>의 젖을 먹이며 기다리는 기분이었다.『영혼의 자서전』 643쪽



말 그대로 ‘조르바를 글’로 토해내고 있다. 스타브리다키와 이별을 하고, 조르바와 만난 인연이 이렇게 ‘조르바’란 작품을 탄생시켰다. 조르바는 유한의 생명을 다했지만, 불멸의 텍스트로남았다. 조르바의 입에서 나오던 그 <말씀>들을 잉태하고 세상으로 내보내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 에파포스신이 그러했듯, ‘나’는 내가 만난 세계가 살아있는 글이 되어 사람들에게 감촉되도록 묵묵히 써내려갔다. 

육화된 글쓰기! 그게 바로 ‘나’에겐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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