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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힘으로 살아가기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7-12-22 10:23
조회 : 1,076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힘으로 살아가기 







유승연 (감이당 토요 대중지성)




   이번 학기 나와 학인들은 니체와 서양 별자리 수업에 연애하듯 푹 빠져들었다. 자신이 태어난 연월일시로 운명을 예측해보는 서양 별자리 수업은 학인들의 임상까지 더해져 흥미로웠다. 그동안 확신하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고, 믿고 있던 진리를 망치로 깨부수라는 니체 또한 강렬했다. 특히 니체 특유의 비유와 잠언이 가득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어려운 만큼 매혹적이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결론이 애매모호하면 ‘니체가 그랬잖아! 그러니 그게 맞지!’라며 ‘기승전니체’로 대화를 마무리 짓는 버릇까지 생겼다. 

   나는 동양의 사주명리로 해석하면 관성이 발달해 직장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운이다. 26년을 공무원으로 일하며 조직의 질서에 순응하고 상사들의 눈빛도 잘 읽는 ‘예스맨’으로 인정도 받고 존재감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주변의 평가나 시선을 의식했고 어떻게 하면 입지를 견고히 하며 더욱 돋보일까를 고민하였다. 놀라웠던 것은 4학기에 배운 서양 별자리에도 이러한 나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 명함과도 같은 태양 별자리는 사자다. 사자자리는 자기에게 속한 무리를 책임지고 보호하는 관대한 왕의 별자리다. 인정과 칭찬을 중요시하며 타인에게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길 원한다. 그밖에 무의식과 습관을 표현하는 달과, 가면처럼 외부에 보여 지는 사회적 인격의 동쪽 별자리가 모두 천칭인데, 천칭자리는 고려와 균형, 중재의 속성을 가지며 타인의 견해에 민감한 별자리다. 

   관성발달, 사자와 천칭자리는 셋 다 내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며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중요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니체는 ‘내 운명을 사랑하라!’며 운명의 주인이 될 것을 강조했지만 사주명리나 서양 별자리로 본 내 운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타인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타인의 시선과 인정욕구가 내 삶에 중요한 가치였다.

   이번 학기 서양 별자리와 니체와의 만남은 그동안 타인 중심이었던 나의 삶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힘은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으로 나누어지는데 나는 그동안 반동적인 힘을 주로 쓰며 살았다. 그 힘은 강자인 귀족이 쓰는 힘이 아닌, 약자인 노예가 쓰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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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직장은 ‘철밥통’, ‘무사안일’, ‘정년보장’ 등이 먼저 떠오르는 반동적인 힘의 표상이다. 주로 생활하는 현장이 기존의 지배 가치에 순응하는 힘의 장인데다 그런 성향을 갖고 태어난 내가 만나 그 힘은 더욱 커졌으리라. 일을 하면서 느꼈던 만족감이나 성취감이 나를 고양시키고 충동을 일으키는 능동적인 힘이 아니고 내 영토를 더욱 굳게 지키려는 반동적인 힘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답답하게 했다. ‘벗이여,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시장터의 파리들에 대하여, 84〉를 읽는 순간, 니체의 음성이 내게 들리는 듯했다. 오랫동안 반동적인 힘이 지배해왔던 이 시장터를 벗어나고 싶었다.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의 투쟁


생명체를 발견하면서 나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자기 극복에 대하여)』, 책세상, 194p〉


   니체는 ‘세계는 힘들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우주든, 객체든 세계는 다양한 힘들이 상호 작용을 하면서 투쟁을 벌이는 장이다. 이런 힘들은 강한지 약한지에 따라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으로 나눠진다. 또한 내재되어 있는 잠재적 방향성에 따라 능동적인 힘을 쓰는 긍정적 힘의지와 반동적인 힘을 쓰는 부정적 힘의지로 표현된다. 들뢰즈는 니체의 힘에 대해 ‘능동적인 힘은 정복하고 제압하며 탈취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힘이고 반동적인 힘은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힘’이라고 했다. 〈박찬국, 『니체를 읽는다』, 아카넷, 270p〉 능동적 힘은 자신의 힘을 자발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갖는 반면 반동적인 힘은 자발적인 표현이나 정복과 제압을 악으로 간주한다. 능동적인 힘에게 문제 되는 가치 기준이 고귀함과 비천함이라면 반동적인 힘에 문제가 되는 가치 기준은 도덕적인 선과 악이다. 

   니체는 전형적인 노예들은 타인의 명령에 복종할 때 다른 것을 지배하려는 욕망도 같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힘의 본질은 싸워서 이기고, 어떤 힘에 대해 주인이 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다른 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감내하는 힘으로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군림하려고 한다. 직장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꼼짝 못 하다가 약한 자는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며 지배하려는 메커니즘과 같은 이치다.   

   우리의 힘의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힘의지는 세계의 해석이다. 생성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벡터는 긍정적인 힘의지고 변하지 않고 동일성을 생성해내는 힘의 벡터는 부정적 힘의지다. 이처럼 모든 가치는 힘의지의 표현이고 평가의 산물이다. 그 평가의 결과로 그 사람을 해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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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나를 지배해왔던 인정욕구는 반동적인 힘에 가깝다. 인정받고 성과에 따라 보상받는 것은 내가 직장생활을 완벽하게 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일로서,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주며 더 높은 성취를 꿈꾸게 했던 기제이기도 하다. 내 관성과 별자리의 속성으로 보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니체는 신을 대신한 모든 우상을 죽이라고 했지만 나는 ‘인정욕구’라는 우상을 섬기고 살았던 셈이다. 상사들의 지시에 ‘안되는 게 어디 있어요? 사람이 하는 일인데!’라며 100% 이상 성과를 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성과를 낼 때마다 내게는 연수, 표창, 장기교육의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너희가 그에게 경배만 한다면 이 새로운 우상은 너희에게 무엇이든 주려 들 것이다. 국가는 이와 같이 너희 덕의 광채와 너희의 자랑스러운 눈길을 매수하는 것이다. 

너희를 미끼로 하여 많은–너무나도–많은–자들을 낚아 올리려 하는 것이다.


〈같은 책,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81쪽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대비시키고 있다. 주인도덕은 지배계급의 것으로 진취적이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노예도덕은 피지배계급의 것으로 겸손하고 근면하며 주인에게 순종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 남들이 얼마나 나쁜가에 따라 자신의 선함을 강조하는 관점은 전형적인 약자인 노예들의 태도다. 대신 남들과는 상관없이 ‘나는 선하다’인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자는 강자인 주인들의 태도다. 특히, 니체는 남들이 못나줘야 남들이 실수해야 내가 올라간다는, 타인을 부정적 가치로 판단하는 것을 양에 비유하면서 그런 양들을 참을 수 없어 했다. 나 또한 직장에서 은근히 옆 팀에서 실수라도 하거나 상사에게 혼이 날 때 반사적으로 우리 팀이 돋보여 내심 좋아한 적도 있었다. 더욱이 나한테 친절하게 해주는 동료들과 더 잘 어울리며 익숙한 것들을 습관처럼 놓지 못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상대에 맞춰주고 참고 묻어가며 최소한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했던 나의 삶의 태도를 니체는 천박한 노예도덕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해석, 해석만큼 존재한다


   어느 날 차라투스트라가 큰 다리를 건너가고 있을 때 곱사등이 한 사람이 와서 눈먼 자와 절름발이, 곱사등이를 고쳐달라고 말했다.


곱사등이에게서 그의 혹을 떼어낸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서 넋을 빼앗는 것이 된다. 민중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만약 장님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준다면, 이 세상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눈을 고쳐준 자를 오히려 저주하려 들 것이다. 

〈구제에 대하여 233쪽〉


   곱사등이는 그의 신체성으로 세계를 해석한다. 곱사등이에게 혹을 떼어내면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이 달라진다. 장님 또한 눈을 뜨게 되면 장님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을 못 느끼게 되며 더 이상 장님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곱사등이와 장님의 신체성으로 세상을 해석하듯이 각자에 맞게 해석한다.

   니체는 세계의 가치는 우리의 해석 속에 있다고 했다. 가치의 좋음과 나쁨을 따지기 전에 그 가치평가에 드러난 힘의지를 보라고 강조했다. 세상에 보편적인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해석을 통한 평가로서 그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민족에게 선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이 다른 민족에게는 웃음 거리와 모욕이 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서는 악한 것으로 불리는 많은 것들이 저곳에서는 존귀한 영예로 장식되는 것도 나 발견했고, 


〈같은 책, 천 개 그리고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96쪽〉


   이처럼 민족마다 자기 가치로 세상을 평가한다.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이 이웃 민족에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 해안지대, 산악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해석하며 살아간다. 해석은 각 민족이나 개인이 어떤 질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같은 사건을 두고 긍정적인 해석이냐 부정적인 해석이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도 한다. 가령 세월호 사건을 한쪽에서는 인재로, 다른 쪽에서는 사고로 해석한다든지. 요즘 이슈인 ‘정규직 전환’이나 ‘복지정책’에 대한 해석도 개인과 단체의 힘의지가 어디에 쏠려있는지 언표에 따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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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반동적인 힘을 써왔던 내가 능동적인 힘을 쓰려고 할 때 내 의지대로 쓸 수 있는 것인가? 힘의지는 주체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능동적인 힘이 발휘되는 메커니즘을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배우면 배운 대로 못 배우면 못 배운 대로 말이다. 저마다의 기질과 환경도 다른데다 각자가 습득한 지식이나 관념 등이 총망라되어 저마다의 욕망과 본능과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니체는 좋음과 나쁨을 평가하기 전에 그 자체가 어떤 가치로서 그렇게 평가되는지, 즉 좋음과 나쁨의 가치 기원을 물으라 한다. 나는 왜 이것을 좋다고 생각할까? 나는 왜 나쁘다고 생각할까? 가치의 가치를 묻게 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가 사회가 좋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동안 믿고 있던 가치에 의문을 갖게 되고 그러면 자기가 믿고 있던 편협된 환상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그 환상이 무너지는 순간 새로운 힘이 생이 생긴다. 결국은 인간이 자기의 해석 자체를 의심하는 과정에서, 가치의 가치를 묻는 과정에서 새로운 힘, 바로 능동적인 힘이 생기는 것이다. 가장 무겁게 자기 안에 작동하고 있는 가치에 의문을 던지는 순간 어떻게 힘의지를 전환할까 하는 자기만의 답이 나온다. 그게 바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행위 할 수 있는 힘이자 능동적인 힘을 쓰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깨닫는 일에서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것을 위한 전사는 되어야 할 것이다. 전사야말로 그같은 신성의 길동무이자, 선구자이니.

나 수많은 군졸들을 보고 있다. 나 많은 전사가 보고 싶구나! 저들이 걸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유니 – 폼”이라고 부르지. 


〈같은 책, 전쟁과 전사에 대하여, 75쪽〉


니체는 이런 힘들을 전사와 군졸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전사는 니체의 길동무다. 훌륭하게 칼을 쓸 수 있도록 자기를 연마한 자다. 군졸은 오직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로 니체가 경멸하는 자다. 전사는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능동적인 힘을 쓰는 고귀한 귀족에 비유된다. 그 복종은 자신이 만든 가치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 군졸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유니폼은 규범과 척도에 따른 근대인의 상징이다. 오직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거나 반항하는, 반동적인 힘을 쓰는 비천한 노예로 비유된다.

   직장에서 투덜거리며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거나 반항했던 힘들은 내 영토를 변화시키지 않고 있던 곳에만 머무르려는 부정적인 힘의 해석이다. 니체가 세계를 ‘전쟁모델’로 인식했듯이 힘들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투쟁한다. 이는 안정을 거부하는 생명의 본질이다. 타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전투를 벌일 각오로 살라고 한다.




나를 사랑하는 법 배우기

   채운샘은 8주 니체수업을 마무리하면서 ‘카프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대문학의 거장인 카프카가 평생을 보험회사에서 보험증서에 도장을 찍고 서류를 작성하는 공무원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반전! 낮에는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소설을 썼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조건을 소설적으로 풀어낸다. 카프카의 소설은 국가기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 관료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카프카의 직업은 분명 소설을 쓰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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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동안 감이당에 다니면서 가장 큰 불만이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 공부를 제대로 못 한다는 것이었다. 카프카는 계속 직장을 다니면서 매일 밤 자기 방에서 소설을 썼다. 직장의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그의 소설은 보험사 직원으로서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카프카를 제약하는 그 조건이 아니었다면 카프카의 소설도 없는 것이다. 어떠한 제약도 사유를 다르게 가져가면 더 이상 제약이 아니다. 더 이상 경계석이 아닌 것이다. 늘 누군가 경계석을 치워주길 바랐던 나. 부서가 힘이 들면 타부서로 옮기려고 애를 썼고, 팀원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팀으로 발령 나기를 바라고, 시간이 부족해 책 읽을 수 없다고 투덜거리던 내가 만든 경계석이 나를 날게 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언젠가 사람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칠 자, 그가 경계석을 모두 옮겨 놓았으니. 그에게 있어, 경계석들 자체가 모두 하늘로 날아갈 것이고, 그는 이 대지에게 “가벼운 것”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세례를 베풀 것이다. 


〈같은 책, 중력의 정령에 대하여, 318쪽〉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산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직장, 승진, 가족 등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놓고 의존하며 산다. 고정된 영토에 갇히지 말고 떠나라고 니체는 말한다. 지금 힘들게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들이 산을 올라 높은 곳에 도달하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거나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날 수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 26년 머물렀던 시장터를 벗어나 감이당에 와서 니체를 만나고 스승과 도반들을 만났다. 배움을 통해 견고했던 내 영토에 아주 ‘약간’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이번 학기 8주 수업 때도 직장에서 행사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참석하지 않아도 될 행사임에도 상사들의 눈치를 보면서, 보여주기 위해 참석하거나 지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리 준비해 상사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택했다. 물론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그때만큼은 무조건 복종해왔던 욕망 하나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었고 그때 나는 능동적인 힘을 쓴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반동적인 힘을 써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부터는 조금씩 능동적인 힘을 쓸 수 있도록 시도해볼 것이다. 내가 스스로 가치를 세우고 명령하고 복종하는 삶을 위해서는 당분간 니체는 스승이면서 도반으로 함께 할 것이다. 팀원을 대할 때도, 상사들에게 업무지시를 받을 때도, 업무 관계자와 미팅을 하거나 관계를 맺게 될 때도 순간순간 내가 반동적인 힘을 쓰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면 조금씩 전환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니체는 철학의 목표가 나에게로 이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 길은 곧 나를 떠나는 길이기도 하다. 내 삶을 조금씩 능동적인 힘을 쓰도록 바꿔가면서 그 길을 가고 싶다. 그 길을 걸으면서 그동안 익숙했던 습들과 나를 제약하는 가치들과 다르게 관계를 맺다 보면 조금은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충만해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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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를 배우면서 한 가지 욕망이 생겼다. 그동안 공무원으로서 생활하면서 반동적인 힘이 지배하고 있는 내 견고한 영토에 약간씩 균열을 내면서 새롭게 현장을 관찰할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도 카프카처럼 현장을 비유한 철학적 에세이집을 쓰고 싶다. 반동적이고 부정적인 힘들이 가득한 시장터에서 독파리를 잡는 파리채가 되지 않고, 능동적인 힘을 쓰며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나만이 쓸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인정욕구로부터 벗어나 진정 나에게로 이르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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