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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시대에 갇힌 마음의 지도-나쓰메 소세키『마음』
 글쓴이 : 생각통 | 작성일 : 17-12-28 15:40
조회 : 628  



시대에 갇힌 마음의 지도 





성승현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나는 오랜 시간 고립을 고독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혼자 지내는 게 편했고, 단지 ‘외로움을 타지 않는 성격’이라 생각했다. 함께 지내면서도 감정을 공유하거나 마음을 드러내기를 꺼렸다. 내가 겪는 소소한 감정을 드러내 분란을 만들기 싫었고, 그렇게 시작된 갈등을 해결하는 게 오히려 힘들고 고되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런 내 성향은 누구와도 불화를 겪지 않지만, 동시에 사람들과의 거리 역시 좁혀지지 않게 만들었다. 나는 오랜 시간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감정은 숨기기에 급급했다. 나를 지배하는 부정적 감정들을 제거해야 이성적이고 매끈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마음’은 은폐된 감정들로 지옥을 겪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을 부끄러워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것. 그런 나를 계속해서 의식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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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의 소설 중 『마음』의 인물들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사랑을 다투고 있는 듯 보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며, 내면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고립을 자처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나는 그 원인을 ‘근대’라는 시공간을 탐색하는 것에서 시작해보려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마음이라는 것이 근대적으로 해석됨으로써 인간의 삶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시대와 소설을 통해 ‘마음’을 탐색해보자. 


근대적 산물로써의 ‘사랑’ 
나쓰메 소세키는 1867년, 메이지 시대와 함께 태어났다. 일본의 근대를 몸소 겪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하며, 동아시아의 별로 부상했다. 서양의 근대 문물과 문명, 이념과 가치들이 수입되며 일본 근대의 포문이 열렸다. 일본은 점차 ‘근대인다운’ 가치들을 생산해냈다. 그중 주목할 것은 남녀간의 ‘사랑’이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유난히 인간을 약하게 만들었고, 죽음을 욕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세키도 이 ‘사랑’에 주목했다. 

신분이 해방되었고, 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신분이 따로 없으니 모든 선택이 자유로워진 셈이다. 학업이나 직업뿐만이 아니다. 사랑도, 결혼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사랑은 더욱 풍성해지고 생명력을 발휘하게 될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왜 사랑은 삶의 에너지로 작용하지 못하고 죽음을 욕망하게 만든 걸까, 소세키의 문제의식도 여기에서 시작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모리타라는 남자도 쓸데없는 사랑 타령으로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고 게다가 젊은 여자까지 홀리다니 괘씸한 녀석이다. 아키코는 자기 멋대로 무분별하게 러브는 신성하다느니 뭐라느니 외쳐대더니 밀통이나 하고. 뻔뻔스러운 행동이 자기중심의 극치로다. (간노 사토니, 『근대 일본의 연애론』, 28쪽) 

한동안 신문지상은 모리타와 아키코의 사건으로 시끌벅적했다.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동반 자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정사 사건으로 취급하며 맹비난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소세키는 이를 두고 ‘사랑에 대한 지적 투쟁에 불과하다’고 코멘트했다. 근대의 지식인들이 정신적인 사랑, 죽음도 불사하는 근대적 사랑으로 자신의 지성을 뽐내려 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한 것이다. 정신적 사랑으로 근대 지식인임을 증명한다? 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도 사랑, 질투, 집착을 다룬 문학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랑이란 게 서양의 전유물은 아니었던 거다. 다만, 근대 이후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겼다고 볼 수 있겠다. 서구 문물이 들어올 때 서양의 ‘러브’도 수입됐다. 일본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랐다. 사랑의 숭고함과 신성함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은 색(色), 정(精), 연(戀), 애(愛)와 같은 단어들로 사랑을 표현해왔다. 단어들로 유추되는 것처럼 정신과 육체가 뒤섞이는 것이 남녀의 사랑이었다. 그런데 러브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육체적인 개념을 쏙 빼고, 정신적 사랑을 뜻하는 ‘애’에 초월적인 개념을 덧붙여 ‘연애’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정신을 우위에 두는 서양적 가치가 보편화되었다. '지금까지 적당한 시기가 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었던 ‘색’이나 ‘연’은 이원론을 터득한 ‘지식인’들에 의해 전면 부정된 것'(59쪽)이다. 이제 사랑은 육체가 아닌 정신으로 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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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본은 왜 정신적인 사랑을 하는 인간이 필요했을까? 단순히 서양 흉내내기는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근대는 각기 다른 삶의 리듬을 획일화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인간의 고유성이나 이질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랑’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었다. 육체는 통제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통제할 장치로 도덕과 이성을 강조했다. 당시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족에 대한 이미지가 공고히 된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들로 국가의 ‘질서’를 담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거다. 도덕과 이성, 제도로 인간의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근대를 움직인 것이다. 

물론, 근대로부터 이어지는 이 프로젝트는 인간에게 폭력적으로 작용했다. 사람들은 욕망을 침묵하고 은폐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분출되었던 욕망은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도덕과 이성이라는 각성제로 유지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자기검열과 신경쇠약으로 이어지게 됐다. 정신적으로 고결한 사랑, 즉 ‘연애’로 해석된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해석하도록 만들었고, 그런 자기를 끊임없이 의식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제, 근대적 산물로써의 ‘사랑’을 겪게 된 이들이 어떤 파란을 겪게 되는지, 구체적 인물을 통해 살펴보겠다. 


근대인의 마음의 지도 

▮ 근대인의 사랑과 자의식
『마음』에서 중요하게 다룰 인물은 선생님과 K, 그리고 아가씨다. 선생님과 K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는데, 함께 도쿄제국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도쿄제국대학은 일본 최고의 대학이었다. 이 대학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신뢰와 위상은 대단했다. 도쿄제국대학은 새시대를 위한 엘리트 양성기관이라 할 수 있었으며, 근대적 가치를 완전히 학습하게 되는 공간으로 작용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렵 내 주변에 있던 사람은 다들 이상했어. 여자에 관해 깊숙한 이야기까지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 그중에는 이얏기거리가 없는 사람도 꽤 있었겠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보통인 것 같았네. (나쓰메 소세키, 『마음』, 현암사, 179쪽)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고,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근대’를 학습하게 된 학생들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자, 그에 따른 욕망은 감추어야 할 무엇이었다. 사랑을 하더라도 정신적 고취와 연결될 때에만 의미가 있게 된다. 이런 모습을 갖췄을 때 근대 일본을 대표할 수 있다는 관념이 새겨진 것이다. 이런 표상을 갖게 된 이들이 사랑을 하면 어떤 양상을 보이게 될까? 

먼저, 선생님을 보자. 기숙사에서 지내던 선생님은 조용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에 하숙집을 구하게 된다. 모녀가 운영하는 하숙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 딸을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선생님은 자신의 사랑을 신앙심에 비유한다. 

만약 사랑이라는 불가사의한 것에 양쪽 끝이 있고 높은 쪽 끝에는 신성한 느낌이 작동하고 낮은 쪽 끝에는 성욕이 작동하고 있다면 나의 사랑은 분명히 제일 높은 쪽에 매달려 있었을 거야. 아가씨를 보는 내 눈은, 아가씨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전혀 육체의 냄새를 띠지 않았어. (같은 책, 179쪽) 

선생님은 자신이 숭고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런 사랑에 육체적 욕망이 개입된다는 것은 선생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결혼도 신성하고 깨끗해야만 한다. 그래서였을 거다. 선생님과 아가씨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거론되지만, 선생님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아가씨의 마음이 진실한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학력이나 재산을 보고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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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태에서 친구 K가 하숙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K는 사랑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인간이라면 정신적 향상심에 힘써야 한다는 강렬한 확신을 가졌기에, 그렇지 않은 인간에 대해서는 경멸했다. 아가씨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아가씨의 행동이 이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아가씨는 선생님과의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자, K를 이용해 질투심을 유발한다. 선생님이 하숙집으로 돌아올 즈음 K의 방에 들어가 단 둘이 수다를 떨기도 하고, K와 외출을 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는 것이다. 이에 선생님은 K에 대한 질투와 아가씨에 대한 소유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아가씨의 작전은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K도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다. 정신적 사랑조차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K였는데, 육체적 욕망에 흔들린 것이다. 

이들은 사랑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자책감에 시달린다. 정신적 사랑의 추구가 소유욕으로 바뀌어버린 선생님, 하찮다고 치부했던 육체적 욕망에 무너져버린 K. 이 둘은 자신들이 배제했던 욕망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과 K 모두 정신적 향상심을 추구했다. 하지만 K는 선생님보다 강도가 셌다. 말하자면, 선생님이 사랑에 관해 정신성을 추구했던 반면에 K는 정신적인 것으로 구성된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정신적 사랑, 정신적 사람에 대한 자의식으로 가득차 있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은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흔해빠진 삼각관계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으로 드러난 자의식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옳다. 자의식과 자의식이 부딪치는 이야기, 자기 자의식과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 억압된 욕망, 약한 인간을 만들다
선생님과 K는 자기 욕망에 놀랐고, 그 욕망을 숨겨야 할 무엇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선생님과 K가 보여준 행보는 달랐다. K는 약해빠진 자신이 부끄럽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며 방황한다. 반면, 선생님은 ‘이러다 아가씨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진하기 시작한다. 둘 사이를 의심할 때만 해도, ‘내가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상대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면 나는 그런 여자와 결혼하기는 싫었네’(224쪽)라고 생각했던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K의 고백을 들은 이후, 폭풍 질투에 휩싸이게 된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선생님이 느끼게 된 질투의 속성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모습이다. 선생님은 아가씨와 K 사이를 의심하여 질투할 때 ‘질투란 사랑의 다른 일면’이라 말한다. 사랑의 이면에 이런 감정의 작용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는 거라고, 그것이 사랑의 일종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선생님이, 자신이 아가씨에게 느끼게 된 육체적 욕망, 그렇게 소유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질투’라는 감정으로 바꿔 해석해버리는 장면으로 봐야 한다. 선생님은 자신이 느낀 육체적 욕망을 정신적 사랑의 한 단면이라고 인식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선생님의 질투가 정당화되고, 정신적 사랑을 하는 자신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투라는 명목으로 선생님은 폭발한다. 오랜 친구를 자신의 앞길을 망치는 마물로 설정한다든지, 친구 몰래 아가씨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등의 비겁한 행동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과 행동이 나오게 된 과정을 보면 마치 전쟁을 치루는 것처럼 치열하다. K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며 그의 약점을 찾기 바쁘다. 결국, 방황하는 K에게 ‘정신적 향상심이 없는 자는 바보’라는 뼈아픈 말을 던짐으로써 공격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며칠 후 K는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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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왜 죽은 걸까? 위 사건으로만 보면 정신적 향상심을 잃은 ‘자신’에 대한 실망과 환멸로 죽었나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선생님에 대한 배신감 혹은 실연의 슬픔 때문에 죽은 걸까 유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K의 죽음은 자기 자의식을 견디지 못한 ‘약한 인간’의 말로로 봐야 한다. K는 정신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의 일상만 봐도 알 수 있다. 의식주를 일부러 궁핍하게 만들고, 정신적인 사랑도 거부하지 않았던가. 육체적 욕망에 흔들리는 자기를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정신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강했던 만큼, 데미지는 엄청났다. K 입장에서는 정신적 추구가 자신을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줄 거라 믿었겠지만, 오히려 그를 약하게 만들었고, 육체적 욕망과 만났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무능력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약한 인간이라는 것이 부끄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던 K에게 가장 쉬운 길은 ‘죽음’이었던 거다. 

▮ ‘잃을 수 없는 나’, 고립되는 인간   
K가 죽은 이후 선생님은 아가씨와 결혼했다. 하지만 완전히 고립된 채로 살아간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유일하게 하는 일이라곤 한 달에 한 번 조시가야에 있는 K의 묘지를 찾아가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고립은 K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그래도 나는 끝내 나를 잃을 수 없었네. 나는 곧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편지를 보았지. 정신없이 봉투를 뜯었네. 거기에는 나에게 얼마나 쓰라린 문구가 쓰여 있을까 하고 예상했거든. 그리고 만약 그것이 아주머님이나 아가씨의 눈에 띈다면 경멸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있었네. (같은 책, 255쪽) 

K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후 선생님이 겪는 마음의 행로이다. 선생님은 K의 죽음 앞에서 슬픔이나 죄책감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공포심’을 느낀다. 그 공포심의 원인은 ‘잃을 수 없는 나’ 때문이다. 정신적이고 고귀한, 그리고 깨끗한 사랑을 완성해야 하는 ‘나’가 있다. 그렇기에 K의 죽음에 자신의 감정과 행동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가졌던 아가씨에 대한 소유욕, K에게 느꼈던 질투심과 비겁하고 비열한 마음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선생님은 표면적으로 한 일이 거의 없다. 아가씨를 뜨겁게 사랑한 것도 아니고, K에 대한 질투심을 표현한 적도 없으며, 아가씨를 사이에 두고 무섭게 싸우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만 한 일이다. 때문에 이것은 자신이 드러내지 않는 한, 누구도 알 수 없다. ‘하늘과 자기 마음만이 알고 있는 일’(253쪽)이니 덮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선생님은 정신적으로 완벽한 사랑에 대한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더럽고 비겁한 마음을 가진 자신을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의식에 갇혀버린 사람이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선생님에게 고립된 삶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나는 K의 사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네. 처음에는 그가 실연 때문에 죽은 거라고 단정했지. 하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해보니 쉽게 결론지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현실과 이상의 충돌? 그래도 불충분했지. 나는 결국 K가 나처럼 혼자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갑자기 결심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지. (같은 책, 267쪽) 

선생님은 알게 된다. K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자의식이라는 감옥이었다는 것을. 단순히 여자 때문도 아니었고, 친구에 대한 배신감 때문도 아니었다. 자의식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현실이 죽음을 욕망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동시에 자신의 길도 K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을 하게 된다. 

▮ 죽음으로도 넘지 못한 ‘자의식’이라는 한계
선생님이 이렇게 자발적 유폐 생활을 하던 중, 젊은 청년이 선생님에게 다가오는 일이 생긴다. 선생님이 마냥 좋았던 청년은 무작정 집으로 찾아와 배움을 청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 청년에게도 끊임없이 ‘자신은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다’, ‘조만간 나를 떠나게 될 것이다’라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겪었던 사건을 알게 된다면, 누구도 자신을 인간답게 대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무튼 날 너무 믿으면 안 되네. 곧 후회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속은 앙갚음으로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되는 법이니까. (같은 책, 50쪽) 

청년이 그토록 존경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속았다는 생각에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될 거라는 거다.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도 물리치고 싶단다. 이런 자신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혼자서 지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년과의 만남은, 선생님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자의식을 확인하는 사건으로 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청년은 선생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선생님의 사상이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인과를 계속해서 묻는다. 선생님에게 질문을 던지는 존재였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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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자의식이라는 감옥이 고통스러워 더 이상 그 안에 머물 수 없고, 그렇다고 부술 용기도 없는 상태라고 고백한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놓였다고. 이렇게 자살을 결심하면서, 청년에게 자신의 과거가 담긴 편지를 남긴다. 이 편지에는 자신이 고립되어 살다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과거가 들어 있다. 선생님이 겪었던 마음의 지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여전히 한계를 드러낸다. 죽음 이후에도 아내만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몰랐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내가 내 과거에 대해 가진 기억을 되도록 순백의 상태’(274쪽)로 남겨두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아내가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선생님 자신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일 뿐. 이처럼 죽음을 앞에 두고도 끝내 자의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가 남기는 의미가 있다. 청년이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자격이 없다’는 선생님의 자의식을 무색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선생님은 더럽혀진 자기가 드러나는 걸 두려워했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전개하는 화자는 청년이다. 청년은 선생님의 과거를 알고도, 선생님에 대한 글을 남김으로써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가졌던 자의식과 두려움은 스스로 만든 벽이며, 고립을 자처한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자기본위’로 바꾸는 마음의 지도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왜 조금의 불화도 견디지 못하고, 불쑥불쑥 올라오는 욕망을 부끄럽게 여기며 억누르기만 했을까. 그렇게 고립을 자처했을까? 고립된다는 것은, 저항의 상태가 아니다. 마음이 무언가에 예속된 상태로 봐야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으로 나의 이상을 설정하고,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 나를 제거하려는 시도. 그런 내가 되지 못했을 때 자기만의 방으로 숨어버리는 게 고립인 것이다. 

소세키의 ‘자기본위’는 이 지점에서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자기본위를 ‘자기가 주체고 타인은 객체라는 신념’이라고 정의했는데, 이 개념을 개발한 것은 영국 유학에서였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했고, 영문학으로 밥벌이를 했지만, 내내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영국 유학을 가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라면 영문학의 정체를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소세키의 불안은 더욱 심해진다. 그 불안함 속에서 쥐게 된 게 자기본위다. 

소세키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꾸고 나서야 불안에서 해방된다. ‘영문학이 무엇인가’는 잘못된 질문이었던 거다. 그것은 그 방면에서 내로라하는 사람, 베르그송이나 오이켄이 대답을 더 잘할 것이다. 소세키는 그들이 말하는 영문학에 갇혀 해석하려 했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을 느꼈던 거다. 하지만 질문을 바꾸고 나니, 길이 열렸다. 소세키 본인이 구성하는 것으로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어서다.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 소세키의 행적은 이렇다. 그는 의무기한을 마치고 학교를 바로 그만뒀다. 문부성에서 내리는 문학박사라는 타이틀도 거부했다. 반사회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서는 안 된다. 그는 자기 욕망을 직시했고, 그 욕망이 사회적 이념이나 정책에 포획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문학박사 칭호를 두고 국가와 실랑이를 벌이는 소세키를 떠올려보자. 문부성에서는 문학박사 칭호를 형식적으로라도 받아달라 하고, 소세키는 거듭 거절한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문예원에 귀속되면 문사라는 자격에서 벗어나 갑자기 국가를 대표하는 문예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나쓰메 소세키, 『문명론』, 329쪽)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과거 문학이 아닌 영문학에 갇혔던 것처럼, 그 칭호를 받는 순간 ‘박사’라는 단어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 속의 이 구절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네.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천황으로 시작되어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군. 메이지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우리가 그 후에 살아남는 건 결국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내 가슴을 쳤네. (같은 책, 271쪽) 

이 말은 선생님의 욕망이 어디에 귀속되어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선생님의 사랑과 자의식은 메이지라는 시대의 산물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사랑을 시대적 사명인 것처럼 여기며 쫓았던 한 인간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욕망이 ‘근대인’이라는 미명에 빨려들어가 버린 상태, 그래서 죽음마저도 시대적 사명감으로 환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말이다. 선생님과 K는 ‘근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없이 근대적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왜 정신적인 사랑을 해야 하는지, 아가씨를 대상으로 올라오는 욕망이 왜 나쁜 것인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국가가 정해주는 가치를 내면화해서 자기를 그 가치에 맞추려 안간힘 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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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나의 욕망을 끊임없이 어딘가에 귀속시키고 있었다. 분열되지 않는 ‘평화로운 공동체’, 불화를 조장하지 않는 ‘고상한 인간’…. 그 ‘이상’에 나를 길들였고,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 같은 공동체와 인간을 꿈꾸기 이전에, 그 본질에 대해 질문했어야 했다.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그런 공동체가 왜 필요한가’, ‘고상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인간형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가’에 대해서. 결국 나는 차이와 무질서, 예측불가능하고 불균질한 것을 참지 못하는 근대적 인간으로 살고 있었던 거다. 다양한 욕망을 정신으로 환원해 삶을 해석하고 그것이 진리라 믿으면서. 그렇게 억압된 욕망은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책하는 자아로, 고립을 자처하는 자아로 몰고 갔다. 

자기본위는 다른 게 아니다. 자기 욕망을 기반으로 질문을 구성하고, 그것에 답하는 것이다. 자기본위로 세워진 주체가 되었을 때에는, 두려움이 용기로 바뀔 것이고, 시대적 가치에 대항할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불화는 이질적인 것이 부딪치는 관계의 불씨가 되고, 욕망은 새로운 주체를 생성할 수 있는 씨앗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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