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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글쓴이 : 물길 | 작성일 : 17-12-29 11:59
조회 : 376  



혼자서 가라! 
                                                                          




김주란(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숫타니파타를 읽는다는 것

숫타니파타는 초기불교경전이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처럼 많이 들어본 경은 아니지만, 어쨌든 불경이다. 이름은 낯설지언정 알고 보면 꽤 유명한 경전이기도 하다. 저 유명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구절의 출처가 바로 이 경이다. 타계하신 법정스님이 애송하셨다는 사연과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제목에 쓰이면서 유명세를 탔었다. 하지만, 어떤 문장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 문장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일 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짧은 한 편의 시가 지닌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다. 소리에도 그물에도 진흙에도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 우리는 자유에 목말라 있고, 숫타니파타는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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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여전히 주변에 숫타니파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요즘 뭐 읽냐는 질문에 숫타니파타 읽는다고 하면 잘 못 알아듣는다. 하긴 나도 그랬다. 무슨 뜻인지 짐작도 안가고, 발음도 낯설고. 그래서 다시 “불경 읽어요.”라고 고쳐 답하면, 그제서야 “아, 불경!”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그럼에도 흔쾌한 표정들은 아니다. 왜일까? 성경을 읽는다 해도 비슷한 반응이었을까?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성경, 불경은 대표적 종교의 경전인 동시에 인류 사상의 보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다고, 불경을 읽는다고 바로 종교적인 행위로 해석할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경을 읽는다고 할 때는 에세이나 철학서를 읽는다고 할 때와는 다른 반응이 있는 것이다. 그게 뭘까?

내 생각엔 이게 바로 성(聖)과 속(俗)의 경계인 것 같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성속을 구분 짓는다. 신앙을 가진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나같이 신앙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용한 경내에 들어갈 때 절로 옷깃을 여미는 것처럼, 불경을 읽을 때는 마음가짐이 달라야 할 것 같다. 다른 책이라면 얼마든지 물고 뜯고 씹으면서 맛보아도 좋지만, 불경(佛經)은 그러면 너무 ‘불경(不敬)’스러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불경에 담긴 ‘지혜’에 접속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성속을 분별하는 마음 어딘가에 ‘성스러움’은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하려는 시도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건 안 될 일이다. 그건 마치 최고급으로만 차려진 연회에 초대받고도 여긴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들어갈 곳이 못된다며 한사코 뒷걸음치는 꼴이다. 
 
당당히 가장 고귀한 진리의 연회에 참가하여 지혜의 성찬을 즐기려 할 때 불경만한 성찬이  어디 있으랴. 숫타니파타를 처음 읽으면서 나는 바로 그런 성찬을 대접받은 기분이었다. <자애의 경>, 혹은 <자비의 경>이라 불리는 이 대목에서였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세계에 대하여 
   높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 
   장애 없이, 원한 없이, 적의 없이, 
   자애롭고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뱀의 품/ 자애의 경)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일체의 세계를 향하여 낼 때(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마음을 내는 자신이야말로 자비의 축복 가운데 놓이게 된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뭔가 완전히 낯설진 않은 경험이었다. 하여 숫타니파타를 읽는다는 것은 어디에도 걸림 없는 자유와 한량없는 자비심을 기를 좋은 시간이 되리라, 나는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다.
 
진리를 찾아서

■ 누가 수행승인가
그러나 딱 거기까지. 숫타니파타는 내가 아닌 ‘수행승’을 위한 경전이었다. 그 경계는 너무나 분명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소리 내어 읽는 순간에는 나 자신이 사자나 코뿔소나 된 양 담대해진 기분이 들었지만 내 뿔은 무소의 뿔이 아니라 사슴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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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소는 인도의 코뿔소다. 아프리카 코뿔소와는 달리 외뿔이 달렸다고 한다. 사슴의 뿔은 나뭇가지에 얽혀 주인을 곤궁에 처하게 하지만, 코뿔소의 단순하고도 강고한 뿔은 모든 장애를 시원스럽게 헤치고 길을 열 것이다. 하지만 수행에만 전념하는 수행승이 아닌 나는 일상사 오만 일에 구애된다. 그래서 나는 일단 이 경을 ‘눈’으로만 읽었다. 보기는 좋으나, 내게는 필요 없는 아름다운 물건을 ‘아이’쇼핑하듯 말이다. 아래의 경도 마찬가지였다.

  “흘러가는 급류를 말려버리듯 갈애를 남김없이 끊어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뱀의 품/뱀의 경)

그래, 수행승이라면 갈애를 끊고 머리를 깎아야지. 이 세상, 저 세상에 연연해서도 안 되고. 하지만 이게 다 수행승을 위한 경이라면 수행승도 아닌 내가 이 경을 읽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내 삶과 관계된 다른 책을 읽는 게 낫다. 
 
그러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누가 수행승인가? 수행승은 수행승으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수행의 길에 나섰기 때문에 수행승인 것이다. 너무 지당한 말이었지만, 이 질문으로 인해 나는 다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질문은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들 수행승’들은 왜 수행을 하는가? 수행승이란 진리의 구도자들이다. 그렇다면 진리를 구하는 이들은 모두 수행승이 아닌가. 자유와 자비의 경지에 접속하고 싶어 한 나 역시 수행승이 아닌가. 이제야 숫타니파타는 내가 읽을 수 있는 책, 아니 읽어야 하는 책이 되었다.  
 
또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자면, 붓다 역시 태어날 때부터 붓다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인도 히말라야 산기슭에 자리한 한 싸끼야 부족의 후계자였다. 계절마다 달리 머무는 세 개의 궁전과 아리따운 미녀들, 갓 태어난 아들까지 둔 그의 원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 
 
그가 생로병사와 윤회에서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났을 당시, 인도의 거리에는 수행자들이 넘쳐났다. 철기문명의 영향으로 급성장한 금권과 무력이 지금껏 인도인의 세계관을 형성해온 베다신앙의 토대를 흔들었고, 낡은 교설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구도자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지금은 붓다로, 아니 부처님으로 대웅전에 모셔져 있지만 우리는 그런 부처님을 잊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는 불교라는 종교의 창시자이자 진리의 현현으로서 붓다를 떠올리지만, 막상 고타마는 불교라는 종교를 창립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자신이 품은 질문에 답을 찾고, 그 진리를 벗 삼아, 의지처 삼아 살아가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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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에는 그런 고타마 붓다의 모습이 또렷이 드러나 있다. 맨 처음에 말했듯, 숫타니파타는 초기불경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경이란, 역사적 인물로서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다. 그 외의 불경은 사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창작물이다. 그렇다면 초기불경 외의 불경은 위작이란 말인가? 그건 그렇지 않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모두 붓다이다. 붓다가 고타마 한 사람에게만 허여된 존칭이 아니듯, 진리의 언어를 담고 있는 한 모든 불경은 다 진본이다. 
  
■ 지금까지 없던 길로 
붓다의 생애는 떠남의 연속이었다. 왜 떠나야 했을까? 이제까지의 삶으로는 그가 찾는 답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부와 권력, 여러 개의 궁전과 미녀들, 사랑스런 아내와 아들까지. 장차 이제껏 없던 위대하고 걸출한 왕이 되리라는 예언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왕국과 완벽한 신체와 뛰어난 지혜를 지녔다 해도 결국은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은 생로병상의 무한반복, 윤회였다. 윤회의 끝없는 굴레에서는 신조차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 끝없는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해방될 수 있을까? 부모와 처자, 나라와 지위를 버리고 궁 밖으로 나온 그는 스승을 찾아 배웠다. 그러나 그들 또한 답을 알지 못했다. 결국엔 스승과 도반에게서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수단은 고행뿐이었다. 그는 무섭게 고행에 정진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철저한 고행으로도 답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고행이라는 마지막 수단마저 버려야 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중 최후의 수단조차 버려야 할 때, 이걸 버리면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을 때, 그것마저도 버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붓다는 최후의 수단을 버렸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대단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야망이 있었다면 그는 죽음과도 같은 고행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아, 혹시 그것은 살아 남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정진의 경>을 보자면 그런 의혹은 사라지고 만다. “네란자라 강의 기슭에서 스스로 노력을 기울여 멍에로부터의 평안을 얻기 위해 힘써 정진하여 선정을 닦는” 고타마에게 악마 나무치가 위로하며 다가왔다. “당신은 야위었고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입니다 존자여, 사는 것이 좋습니다. 살아야만 공덕을 성취할 것입니다.” 
  
공덕, 그것은 제사와 윤회 시스템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공덕을 쌓아야 다음 생에서 좋은 곳에 태어난다. 그리고 공덕을 가장 많이 쌓는 길은 신과의 직거래, 제사가 최고였다. 그러니 살아야 공덕을 많이 쌓지 않겠냐는 나무치의 유혹은 가장 합리적인 충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타마는 윤회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 사람이다. 그는 단호했다. 고타마는 악마에게 이렇게 답했다. “내게는 믿음이 있고, 정진이 있고, 내게는 또한 지혜가 있다. 이처럼 용맹을 기울이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삶의 보전에 관해 묻는가?” 
 
이쯤이면 우리도 의혹 따윈 집어치워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이제까지 알고 의지했던 길들을 모두 버리고 나서 그는 진리의 눈을 뜰 수 있었다. 그야말로 “뱀이 묵은 허물을 벗듯, 이 세상 저 세상 다 버리”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욕계와 색계, 무색계를 가리킨다. 욕계는 감각적 쾌락에 끄달리는 세계이며 색계, 무색계는 비물질적 욕망 그러니까 자만이나 자기 정당화 등의 정신적 욕망의 세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욕망에 응하도록 길들어 있다. 이 욕망의 길과 외부의 세상이 별개일 리 없다. 이렇게 구성된 내적 외적 세계라는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새로운 감각, 새로운 욕망의 길을 내어야 가능하리라. 고타마의 행보를 통해 다시 정리해보면, 혼자 간다는 것은 동행이 있고 없고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떠난다는 것이며, 길을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끝까지 가서 끝내 길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새로 한 발을 내딛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 세상의 정체
고타마가 찾아낸 새로운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야차 헤마바따는 “마치 사자처럼 코끼리처럼 홀로 가는 그 님”을 찾아 가서,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물어본다(뱀의 품/헤마바따의 경).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야차는 이런 질문을 한다. “무엇에 의해 세상이 생겨납니까?” 세계의 근원을 물은 것이다. 굉장히 철학적인 야차다. 과연 세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빅뱅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우주가 빅뱅에 의해 탄생했다는 앎은 나의 삶에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앎은 지혜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고타마 붓다는 말한다. 세상은 여섯 감역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감역이란 우리 몸에 있는 감각기관과 외부에 있는 감각의 대상을 이르는 말이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은 각각 쌍을 이룬다. 예를 들어 ‘본다’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눈이라는 시각 기관이 있어 본다고 여긴다. 하지만 붓다는 이 ‘본다’라는 일이 실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통찰하였다. 그에 따르면 ‘본다’는 일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작용을 일으킨다. 눈(眼)과 시각적 요소인 형상(色)이 시각이라는 하나의 ‘감각 영역’을 형성하는 것, 따라서 감각 기관과 감각의 대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여기에 ‘의식’이 개입하여야 감각의 행위가 완성된다. 눈이 있다 해도 색이나 형상을 지닌 대상이 없다면 볼 수 없고 의식이 없어도 볼 수 없다. 거꾸로 눈이 없으면 대상이나 의식이 있어도 본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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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현상은 완벽하게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이 상호 의존을 통해 나의 세상이 구축된다. 따라서 세상의 실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이란 이 여섯 개의 관문을 통해 일어나는 체험일 뿐이다. 이것이 붓다가 깨달은 세상의 정체이다. 
 
그렇다면 이 깨달음은 괴로움으로부터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는가?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해결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앞서 말한 여섯 감역과 각 감역에서 일어났다 스러져가는 과정 속에서 괴로움이 발생한다. 각각의 감각은 저마다 쾌감과 불쾌감을 일으키는데, 우리는 쾌감은 지속되고 불쾌감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욕망을 갈애(渴愛)라고 부른다. 갈애를 흔히 비유하길, 마치 사막에서 목이 타 들어가는데 물이 없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한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만족이 아니라 더한 갈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감각적 쾌락의 길에 들어서 욕망이 생겨난 사람에게 만일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는 화살에 맞은 자처럼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여덟 게송의 품/감각적 쾌락의 욕망 경)
 
한데 우리는 대개 이 몸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과정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이를 불교용어로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무지에 대한 무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라면, 무지는 괴로움을 반복하는 원인이다. 모른다는 사실 조차 모르기에, 알면 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괴로움의 메커니즘이 밝혀졌다! 여섯 가지 감각의 영역에서 감각 현상들이 서로 의존하며 일어났다 스러진다. 여기까지는 괴로움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달라붙는 갈애와 무지로 인해 화살에 맞은 듯한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다. 이렇게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눈앞의 탁자를 보는’ 그런 게 아닌 것이다. 하여 붓다는 선언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세상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대상과 그 여섯 번째인 정신의 대상, 이런 것들에 대   한 탐욕을 제거하면 곧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그대들에게 있는 그  대로 선언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나는 그대들에게 가르칩니다. 이렇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     다.”(뱀의 품/헤마바따의 경)

버려라! 떠나라! 혼자서! 

■ 홀로 있는 기쁨
진리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이 세상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희노애락, 그것은 지금 여기 이 몸에서 찾아야 했다. 야차 쑤찔로마와 붓다의 대화는 바로 이것에 관한 가르침이다. 

 
야차 쑤찔로마; 탐욕과 미움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불쾌함과 즐거움, 털이 곤두서는 전율, 끊이지 않는 마음의 상념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붓다; 탐욕과 미움은 여기서 연유하고 불쾌함과 즐거움도 털이 곤두서는 전율도 여기서 일어납니다. 끊이지 않는 마음의 상념도 여기서 일어납니다. 

무엇이 일어나는가? 탐욕과 미움, 불쾌와 즐거움과 공포, 끊이지 않는 상념이 일어난다. 그것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여기’서 일어난다. 붓다는 이어 말하길, “어디에서 생겨났는가를 밝게 아는” 사람들은 “원인을 없앨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알아차리면 그것은 사라진다. 이것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위파사나 수행이다. 위파사나는 지관(止觀)수행이라고도 한다. 앞서 인용한 뱀의 경에서 “흘러가는 급류”를 말려버리는 길은 고요한 바라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것은 고요히 홀로 있는 시간이다. <날라까의 경> 또한 홀로 있음을 강조, 또 강조하고 있다. 날라까는 고타마가 태어났을 때 붓다가 되거나 전륜성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남긴 선인 아시따의 조카이다. 늙은 아시따는 자신은 그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장차 붓다가 나타나면 반드시 그를 찾아가라고 조카 날라까에게 당부했다. 붓다가 35세에 정각을 얻었으니 날라까는 이 날을 35년 동안이나 고대하면서 질문을 벼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궁극의 질문은 이러하다. “아시따가 알려 준 말을 잘 듣고 찾아왔습니다. 고타마시여,(......) 성자들의 최상의 삶에 대하여 제가 여쭈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홀로 앉아 명상을 닦고 
 수행자로서의 수행을 배우십시오. 
 홀로 있는데서 기쁨을 찾으십시오. 
 홀로 있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 불립니다.” (큰 법문의 품/날라까의 경)

최상의 삶은 어떤 삶인가? 홀로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해탈의 길이 있다. 해탈이 너무 종교적인 느낌이라면, 절대적 자유라고 불러도 좋다. 단, 오해는 말자. 홀로 있는 시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하는 시간이다. 수행(修行). 행을 닦는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은 외적 활동에서도 이루어지지만, 멈추어 관찰하는 시간 속에서 보다 근본적인 행이 닦여질 것이다. 그리하여 “네 갈래 방향과 그 사이 방향과 위, 아래의 이 시방 세계에서 당신에 의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감지되지 않고, 또 의식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피안에 이르는 길의 품/ 학인 삥기야의 질문에 대한 경)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이렇게 모든 감각의 영역을 두루 알아차리는 것을 일체지(一切智)라고 한다. 바로 붓다의 경지이다. 그래서 붓다를 일러 ‘감관의 수호자’라고 하는 것이다. 아득한가? 아득하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명백하지 않는가.   

■ 우리는 본래 자유다!
그렇다. 모든 진리는 단순하고 명명백백하다. 우리도 이제 알게 되었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임을. 지금 여기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거기에 내 갈애와 무지가 들러붙어서 괴로움을 일으키고 있음을. 그리고 이 메커니즘을 관찰하려면 홀로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기에 우리가 걸려 있는 그물이 있고, 여기에 그 그물에서 빠져나갈 길이 있다.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어째서 그토록 “혼자서 가라”고 했는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는 모두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자유를 멋대로 해석해왔던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자유를 불교식으로 해석하자면, 그것은 쾌감을 지속하고 불쾌감을 주는 것을 멀리하고자 하는 욕망일 것이다. 그 욕망이 아무 장애 없이 언제까지고 충족되는 상태가 우리의 소위 ‘자유함’이다. 하지만 이것은 갈애요 집착이다. 감각적 쾌락은 만족될 수 없고, 결국 더 큰 고통을 야기한다. 자유는 여기에 있지 않다. 욕망과 절망의 끝없는 반복을 그만 두고, 이러한 삶으로부터 떠날 것을 결심할 때 비로소 자유는 획득되어진다. 

그렇다면 처음 <무소의 뿔>경에서 느낀 자유의 바람은 단지 착각이었을까? 그건 아니라고 믿는다. 착각과 오해로 범벅된 와중, 우리 안에도 없지 않을 본래적 자유함이 공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자처럼, 바람처럼,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의 영혼은 공명의 떨림을 미미하게 자각한다. 이 떨림은 착각과 오해의 더께를 치우고 그 본래적 자유를 아는 만큼 더 선연해질 것이다.
 
<무소의 뿔>경은 끝없는 고통의 정체를 환히 보고 다른 삶의 길, 자유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에 저절로 울려나온 감흥의 노래이다. 그들이 성취한 자유의 경계는 어떤 것인가?  “대나무 순이 서로 달라붙지 않듯”, “숲 속에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초원을 찾아 거닐듯”, “어깨가 벌어지고 반점 있는 장엄한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나 마음대로 즐기며, 숲속을 유유히 거닐듯”, “흑단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물에 사는 물고기가 그물을 찢는 것처럼”, “불꽃이 불탄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이빨이 억세 뭇 짐승의 왕이 된 사자가 뭇 짐승을 제압하고 승리하듯이” 그들은 ‘간다’. 여기서 ‘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알아차림 속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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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어들이 말해주듯, 이 세상은 이미 자유롭다. 사슴과 코끼리와 사자는 자유롭다. 대나무 순과 흑단 나무는 자유롭다. 찢긴 그물은 더 이상 물고기를 얽어매지 못하고, 한 번 탄 자리로 불꽃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사자는 원래 소리에 놀라지 않고,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으며, 연꽃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자유의 연시(聯詩)들이 보여주는 경계는 ‘성취된 자유’가 아니라 이미 삼라만상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아닌가. 이 시에 따르면, 본래 모든 존재는 자유다!

■ 이것은 낚싯바늘
그럼에도 우리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대상에 미혹되고 집착에 얽매인다. 유능한 금세공사가 재주를 다해 만들어낸 ‘빛나는 한 쌍의 황금 팔찌’의 아름다움에 홀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깨달은 이는 이렇게 노래한다. 

   
“금세공사가 잘 만들어낸 빛나는 한 쌍의 황금 팔찌도 
 한 팔에서 서로 부딪치는 것을 보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아름다운 팔찌지만 서로 쨍그랑 쨍그랑 부딪치며 서로 흠집을 만드는 것을 잘 관찰한 이는 여기서 모든 관계의 잡음을 통찰한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팔찌에 미혹되어 실상을 놓치고 있던 자신을 알아차린다. 하물며 팔찌조차도 사람의 이목을 홀리는데, 자식과 배우자, 친구나 동료는 어떠할까. 이것만큼 우리가 강하게 집착하는 대상이 또 있을까? 우리는 ‘자식과 배우자, 친구나 동료’만큼은 욕망과 무관한 ‘최후의 성지’로 여긴다. 정도를 넘어선 욕망은 어디서나 경계의 대상이 되지만 이 영역에서만큼은 예외다. 외려 ‘인간적’이라는 찬미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그래서 이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숫타니파타는 분명히 선언한다. “동료들 가운데 유희와 환락이 생겨나고, 자손이 있으면 커다란 애착이 생겨”난다고. 그러니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변명은 그만 두자. 사랑한다면 서로에게 집착이 아닌 자유를 선물해야 하지 않겠는가? 숫타니파타의 가르침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것은 집착이다.” “여기에는 행복이 없다.” “이곳에는 만족이 적고 괴로움이 많다.” “이것은 낚싯바늘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때, ‘그래도 이것만은’하며 챙겨가고 싶다면 그것이야말로 낚싯바늘일 테니. 하여 우리는 이렇게 가야 하리라. 

   
“물에 사는 물고기가 그물을 찢는 것처럼, 
 모든 장애들을 끊어 버리고, 
 불꽃이 불탄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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