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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너희는 어떻게 사랑할래?-루쉰의 사랑에서 너희들의 사랑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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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8-06-27 16:14 조회2,368회 댓글1건

본문

 

 

 

 

너희는 어떻게 사랑할래?

루쉰의 사랑에서 너희들의 사랑을 묻다

 

 

 

 

 

 문탁 

 

 

 

 루쉰의 스캔들

 

  1906년 6월, 루쉰은 어머니가 정해준 정혼상대와 결혼한다. 루쉰은 스물여섯이었고 일본유학생이었고 센다이의전을 때려치우고 문예운동을 하겠다며 도쿄에서 암중모색 중이었다. 상대는 전족을 했고 읽고 쓸 줄 몰랐던 구식 여성, 스물아홉의 주안(朱安)이라는 인물이었다. 

  1925년 3월, 루쉰은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답장과 답장이 이어지면서 둘 사이에는 연애감정이 생긴다. 루쉰은 마흔 다섯이었고 대학교수였으며 이미 몇 편의 소설을 히트시킨 바 있는 명망가였다. 상대는 전족을 하지 않은 채로 베이징으로 유학 와있던 신여성, 스물여덟의 쉬광핑(許廣平)이라는 인물이었다. 

  1927년 10월, 마흔일곱의 루쉰과 서른의 쉬광핑은 함께 상하이에 도착하고, 함께 살 집을 구하고, 공개적인 동거를 시작한다. 2년 후 1929년 9월,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태어난다. 이후 루쉰은 1936년 쉰여섯으로 사망할 때까지 쉬광핑과 산다. 본부인은? 베이징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1947년 독거사 한다. 일흔이었다. 쉬광핑은 루쉰이 죽은 후에도 마우저뚱의 완벽한 후원 하에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다가 1969년에 숨진다. 일흔 하나였다. 

  자, 여기까지가 전기적 팩트이다. 루쉰은 본부인이 있는 상태로 무려 열일곱 살이나 어린 제자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와 살았고 아이까지 낳았다. 어떤가? 뻔하디뻔한 유부남의 불륜스토리인가? 아니면 시대의 통념과 맞장 뜬 위대한 러브스토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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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안(朱安)                                루쉰과 쉬광핑, 아들 하이잉

 

 

  사태는 간단치 않다. 루쉰의 소년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루쉰은 명문가의 장손으로 태어났지만 철이 들자마자 거대한 가문의 몰락이라는 현실과 부딪힌다. 할아버지는 과거시험 감독관을 매수하다가 뇌물수수죄로 옥에 갇혔고, 부친으로 인해 출세의 모든 길이 박탈당한 아버지는 술에 절어 살다가 결국 쓰러졌다. 가장들의 옥바라지와 병 수발은 결국 집안의 맏며느리와 장손의 몫으로 떨어졌다. 루쉰의 어머니는 전답이든 물품이든 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팔아야 했고, 루쉰은 꼬박 4년 동안 거의 매일 전당포와 약방을 출입하였다. 그러니 이웃, 친척들의 냉대와 모욕 속에서 몰락의 고통을 함께 나눈 이 모자(母子) 사이에 특별한 동지적 연대감이 생겼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짝짓기를 한 귀뚜라미 한 쌍’, 낡아빠진 오랜 북 가죽으로 만든 ‘패고피환’ 따위의, 루쉰으로는 ‘듣보잡’ 약들을 의사에 지시에 따라 구해다 드렸지만 결국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루쉰은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루쉰에게 고향 사오싱은 친척과 이웃들이 점차 “불량배, 건달, 아편쟁이, 주정뱅이, 기생오라비, 도둑, 거지가 되어”, “서로 억압하고 모욕”하는 곳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머니! 맏아들만이 유일한 마음의 거처였던 어머니,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서양귀신에게 영혼을 파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있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붙잡지 않았고, 집을 떠나는 열여덟 루쉰에게 말없이 돈 8원을 건넸다고 한다. 애틋한 이별이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일본유학중인 루쉰을 불러들인다. 루쉰이 고향에 도착했을 때 혼례와 관련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고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 루쉰은, 이 혼사를 받아들인다. 루쉰은 가짜변발을 쓰고 바닥이 높은 장화를 신은 채 묵묵히 이 혼사의 모든 절차를 수행했다. 

 

 

 

 

나는 몰락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루쉰은 자신의 결혼과 관련하여 단 한 점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기록의 사나이 루쉰이 자신의 결혼과 관련하여 어떤 기록도 남지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까? 때로는 침묵자체가 발화의 기호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결혼에 대한 루쉰의 심경을 루쉰의 작품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먼저 소설 「고독자」. 주인공은 웨이롄수. 그는 고향 S시에서는 외국사람 취급을 받는 해외유학파이다. 어느 날 그를 키워준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문중사람과 할머니의 친정식구들이 모여 장례준비를 하는데 그들의 가장 큰 걱정은 상주인 이 ‘맏손자’가 모든 장례의식을 신식으로 바꾸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롄수가 오면 반드시 흰 상복을 입히고, 무릎을 꿇려서 절을 하게 만들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마침내 롄수가 도착했고 큰 야단법석이 날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동네사람도 모여들었다. 그러나 전의를 다지던 문중사람들에게 롄수의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는 “다 좋습니다”면서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할머니에게 수의를 입히고, 절을 하고, 곡을 하고, 입관을 한다. 사람들은 김이 빠졌다. 그러다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롄수. 사람들이 말렸지만 소용없었고, 말리다 지친 사람들은 그냥 흩어져버렸다. 그리고 또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친 롄수. 그는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깊은 잠을 잔 후, 다음 날 일가친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가재도구를 불살라 할머니 영전에 바치고, 나머지는 할머니 임종을 지킨 하녀에게 나눠주고 고향을 떠난다.

  나는 소설 속 롄수를 루쉰으로 바꿔 읽는다 “마치 상처 입은 이리가 깊은 밤 광야에서 울부짖는 것 같았고, 그 슬픔 속에는 분노와 비애가 뒤섞여 있는 듯 했다”(「고독자」, 1925.10.17., 『방황』)는 롄수의 대성통곡 속에서, 혼인날 밤의 루쉰의 통곡소리를 듣는다. 루쉰도 롄수처럼 모든 혼인절차를 관례대로 치른 후, 사흘 째 신방에서 나와 버렸고, 나흘 째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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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학시절의 루쉰

 

 

  그렇다면 루쉰같이 민감한 사람이, 그리고 1906년이면 루쉰 생애에서는 드물게 목격되는 ‘파이팅’의 시기인데, 왜 “사랑 없는 비애”, “사랑할 것이 없는 비애”(「수감록 40」, 『열풍』)인 그 결혼을 묵묵히 받아들였을까? 절친 쉬서우창(許壽裳)의 회고에 따르면 언젠가 루쉰은 이 결혼에 대해 “어머니가 주신 선물”이어서 잘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단다.(쉬서우창, 「망우 루쉰 인상기 亡友魯迅印象記」, 쑨위, 『루쉰과 저우쭈어린』, 215쪽에서 재인용) 차마 물리칠 수 없는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 루쉰이 이 결혼을 받아들인 첫 번째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처럼 시대의 희생자인 또 한명의 여성, 정혼자 주안이 받을 타격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 파혼당한 여성은 주변의 멸시 속에서 살아갈 게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루쉰의 또 다른 소설 「죽음을 슬퍼하며」에서도 그랬다. 주인공 쥐안성이 쯔쥔에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진실을 말했을 때, 쯔쥔은 슬퍼하며 떠나갔고 결국 죽었다. 쥐안성은 후회한다. 쯔쥔이 자신을 떠나면 결국 “아버지-자녀의 채권자-의 추상같은 위엄과 얼음보다 차가운 이웃의 멸시 뿐”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자신의 진실이 그녀를 그곳으로 몰아냈다고. “허위의 무거운 짐을 질 용기가 없었던 나는 무거운 진실의 짐을 그녀에게 넘겨주고 말았다.”고. 주인공 쥐안성은 자신이 비겁했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슬퍼하며」, 1925.10.21. ,『방황』)

  롄수이자 쥐안성이기도 한 루쉰, 눈을 떠보니 “창문이라고는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만든 방”(「자서」, 1922.12.3., 『외침』)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루쉰. 그에게 과연 어떤 선택이 가능했을까? 상대에게 “멸시의 공허”를 씌울 것인지, 자신이 “허위의 공허”를 안고 살아갈 것인지, 어쩌면 이 양자택일 밖에 없지 않았을까? 루쉰은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가 죽는 쪽을 택한다. 어머니와의 의리, 정혼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청년 루쉰은 그 때 죽었다. 

  대신 루쉰은 동생 저우쭤런을 구한다. 저우쭤런은 루쉰의 소울메이트, 루쉰의 다른 자아, 루쉰의 청춘. 그 동생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저우쭤런은 하숙집 처녀, 하부토 노부코(羽太信子)와 연애결혼을 한다. 몇 년 후 루쉰은 아래와 같은 글을 쓴다.

 

 

“노인들은 소년들이 걸어가도록 길을 열어 주고 재촉하고 장려해야 한다. 그들이 가는 도중이 심연이 있으면 자신들의 주검으로 메워야 한다. 소년들은 심연을 메워 준 그들에게 감사하며 스스로 걸어 나가야 한다. 노인들도 자신들이 메운 심연 위를 걸어 멀어져, 멀어져 가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수감록 49」, 1919.2.15, 『열풍』

 

 

 

我可以愛. 나는 사랑해도 되는 사람이오!  

 

  1932년 루쉰과 쉬광핑은 자신들 사이에 오고 간 편지 160통 중에 135통을 묶어 출판한다. 루쉰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던 ‘연애편지 한 묶음’이 공식적으로 『먼 곳에서 온 편지(兩地書)』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루쉰이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죽느니, 사느니 하는 열정도 없고 꽃이니, 달이니 하는 멋진 구절도 없다” 대부분 “학교의 소요, 자신의 상황, 음식의 좋고 나쁨, 날씨의 흐리고 맑음, 하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실제 읽어봐도 루쉰의 말마따나 이 편지들은 연애편지치곤 너무 “평범하다” 그런데 루쉰은 바로 이 평범함이야말로 자신들의 연애/편지의 특징이라고 말한다.(「서언」, 1932.12.16., 『먼 곳에서 온 편지』)

  그런데 이 말은 반만 맞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이 편지들에는 사랑한다, 보고 싶다, 따위의 노골적 감정표현은 없다. 심지어 베이징 시절의 초기 편지들은 거의 ‘통신 강의’ 수준이다. 쉬광핑이 질문하면, 시차를 두고 루쉰이 대답하는 식의. 혹은 루쉰이 강의를 하면 시차를 두고 쉬광핑이 질문을 하는 식으로. 그런데 편지가 오간 빈도나 행간에서 드러나는 무심하지만 세심한 배려 등을 생각하면 이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내밀한 감정이 수시로 오가는 연애편지가 틀림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 루쉰이 “내 작품은 너무 어둡습니다.”고 하면서 자신은 늘 ‘어둠과 허무’만이 ‘실재한다’고 느낀다고 쓰면(25.3.18), 쉬광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비관을 비관하지 않음으로 삼고, 전도 없음을 전도 있음으로 삼아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스승(25.3.20)이라고 위로한다. 쉬광핑이 바쁜 선생님의 “시간을 낭비하게” 해서 “송구스러울 뿐”이라고 말하면 (25.3.20), 루쉰은 시간은 문제되지 않는다며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고 당일에 다시 답을 한다.(25.3.20) 루쉰이 베이징의 인쇄물 상황을 쉬광핑에게 알려주면서 『맹진』이라는 잡지가 “아주 용감”하고 거기엔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논한 글”이 많다고 평해주면(25.3.31), 쉬광핑은 자기는 이런 간행물이 있는지도 몰랐다며 놀라고(25.4.6), 그러면 루쉰은 “어제 『맹진』 5기를 부쳤으니 벌써 받았으리라 생각하고, 앞으로 부치는 걸 금지하지 않으면 나한테 여러 부가 있으니 내가 보내주겠습니다”라고 즉각 답을 한다. (25.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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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쉬광핑

 

 

  사랑이었다. 대담하고 당돌한 쉬광핑의 질문과 도발은 마비와 망각으로 자신을 죽이며 「죽은 불」(1925.4.23., 『들풀』)로 살아온 루쉰의 삶을 다시 들쑤신 불꽃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이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중국인 남녀..누가 사랑을 아는지 모르겠다”(「수감록 40」, 『열풍』)던 루쉰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경이로운 감정이었다. 베이징시절의 마지막 편지는 루쉰의 이런 당부로 마무리된다. “늘 비가 오니, 꽃무늬 블라우스는 괜찮은가요? 날이 개이면 화창한 볕에 잘 말려 두시길....” (25.7.29)

  두 사람이 각각 샤먼과 광저우로 남하하여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이 둘의 감정이 더욱 깊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둘은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쓰고 수시로 우편소를 드나들면서 상대의 편지가 도착했는지를 노심초사하면서 기다린다. 내용도 훨씬 더 개인적이 된다. 낯선 남쪽 땅에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는 루쉰에게 쉬광핑은 음식이 싱거우면 후추가 아니라 소금을 넣으라는 둥, 돈을 아끼지 말고 통조림이나 소시지를 먹어보라는 둥, 루쉰을 살뜰하게 챙긴다. 바나나와 유자가 아주 맛있고 입에 맞는다고 좋아하는 루쉰에게 바나나와 유자는 소화가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추위를 타는 루쉰을 위해 직접 뜨개질한 옷을 보내기도 한다. 누가 봐도 연인의 감정이었지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쉽지 않은 사랑이었다. 이미 추문이 번지고 있었다. 쉬광핑은 루쉰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루쉰은 계속 망설인다. 결국 루쉰은 결심한다. 추문이, 추문을 만드는 사람들의 비열함이 오히려 루쉰으로 하여금 결심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나는 우연히 사랑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항상 금방 스스로 부끄러워지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소. 따라서 감히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소. 하지만 그들의 언행과 사상의 내막을 똑똑히 본 뒤로는 나는 내가 결코 그렇게까지 폄하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소. 나는 사랑해도 되는 사람이오!” 

(1927.1.11.)

 

   소설 「죽음을 슬퍼하며」에서 쥐안성은 처음에는 연인이었던 쯔쥔과 “언제나 열 걸음쯤 떨어져서 걸었다.” 주변의 “호기심과 비웃음과 상스러움과 경멸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쯔쥔이 독립선언을 하고 쥐안성이 쯔쥔의 용기에 감명을 받은 이후 그들은 “비로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걸었다”

   어떻게 보면 고작 열 걸음이었다. 부모의 자식들에서 개성 있는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고작 열 걸음을 떼면 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열 걸음을 나가기 위해 루쉰은 20년의 세월을 대가로 치렀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사랑해도 되는 사람이오!”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또 백 수십 통의 편지를  쓰고 받았다. 그렇게 느리고 더디게 만들어진 사랑, 루쉰의 사랑이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사랑할래?

 

  이제 잠시 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80년대에 청년이었던 나와 내 친구들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루쉰과 쉬광핑의 후예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전 존재를 걸고 바꾸어 낸 사랑의 새로운 형식-자유연애-의 상속자였고 향유자였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미처 해결하지 못한 성별 역할분담이라는 숙제 역시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우리는 더 이상 입센(Henrik Ibsen)의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페미니즘의 자녀로는 살아가야 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섹슈얼리티라는 욕망을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라는 인식 속에서 새롭게 배치해야 했던, 어쩌면 첫 세대였다.  

  하여, 나는 노동운동을 하지 않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남친과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헤어졌고, 계급의 모순이 젠더의 모순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하는 남친과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결혼하지 못할 뻔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놈의 PC(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이성애에도 반대해야 했고, 혼전순결에도 저항해야 했으므로, 의식적으로 레즈비언이 되기도 하고, 사적영역인 섹스를 공적영역으로 끄집어내어 발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가를 치렀다. 우리는 수시로 구설수에 올랐고, 툭하면 봉변을 당했고, 일상적인 모욕과 조롱을 견뎌야했다. 서명숙은 언젠가 『흡연여성잔혹사』라는 책을 써낸 적이 있는데, 그것을 조금만 비틀어 말한다면 80년대는 ‘연애여성잔혹사’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나름 꿋꿋이 버텼고 맞벌이, 가사노동 분담, 공동육아 등의 새로운 관계의 형식을 만들어갔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이성애 가족에 또다시 포획되었지만..ㅠㅠ) 

  우리 시대는 사랑의 주체, 섹스의 주체가 되기 위해 부모세대의 규범이나 사회적 습속과 박 터지게 싸웠다. 그것에 비추어 본다면 요즘 세대들의 사랑과 섹스에는 거의 금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만났다 헤어지는 것을 밥 먹듯이 해도, 심지어 앱으로 ‘섹파’를 만나 원 나잇을 즐겨도 이제 그것은 자유의 영역이고 노터치의 영역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성성과 남성성의 전형적인 이분법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귀여운 여성만큼이나 쎈언니들도 어필하고, 누나들과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는 연하남의 존재도 이제는 흔하다. 

  그런데 이렇게 도래한 자유연애, 프리섹스의 시대에 왜 내 주변의 젊은이들은 더 에로틱해지고, 더 야성적이 되고, 더 감성이 풍부해지지 않고 있을까? 정말 의문이다. 나아가 나의 의문을 모종의 의심으로 만드는 것은, “애타게”, “정말”, “죽도록”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주변의 청년들이, 막상 연애를 시작하면 얼마 못가서 헤어진다는 사실이다. 지난 몇 년 간 내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감각적인 위로와 스포츠 같은 섹스의 시기가 지나 서로가 서로의 삶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가 오면, 이들은 쉽게 피곤해지고, 서로에게 지치는 나머지, 그냥, 헤어져버린다는 것이다. 서로를 감당하지 못하거나, 서로를 감당하기 싫어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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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소개팅 어플

  

 

  한병철에 따르면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던 데 반해 이제 우리는 면역학적 시대의 특징인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 으로 하는 시대로 진입했다고 한다. 즉 그동안 우리는 바이러스나 테러리스트처럼 우리를 공격하는 이질성과 타자성에 맞서 우리의 삶을 구성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부정적 타자들은 사라졌고, 그 대신 그 자리에 동일한 것에 불과한 작은 차이들 (리스본 버스킹과 부다페스트 버스킹의 차이, 혹은 A브랜드의 커피와 B브랜드의 커피의 차이)이 끝없이 증식하고 있으며 자아는 그 차이의 증식 속에서 구축된다.  

  문제는 부정성만큼이나 긍정성도 폭력적이라는 점에 있다. 부정성의 폭력이 바이러스나 테러리스트와 같은 외부의 공격이라면 긍정성의 폭력은 시스템 내적인 것이어서 피곤과 탈진으로 나타난다는 게 다를 뿐. 하여, 한병철은 후기근대, 포스트 면역학의 시대를 '피로사회'라고 부른다. 과도한 생산, 과도한 활동,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인해 생겨나는 ‘피로사회’는 이미 ‘깊은 심심함’을 잃은 사회이고,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를 더 이상 “짜지도, 잣지도” 않는 사회이다.(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 32쪽) ​ 

  나는 모든 금기(부정성)가 사라진 작금의 연애지상주의 사회(긍정성)를 피로사회의 한 증후군으로 읽는다. 태솔로어장관리썸남썸녀, 철벽남녀, 연애고자, 편식남, asky 등으로 끝도 한도 없이 분열증식되는 연애언표/연애담론 속에서, 연애를 하든 안하든 못하든 모든 사람을 과잉연애의 상태로 만들어 연애활동(작업) 속에서 탈진시키는.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병철, 『피로사회』, 48쪽

 

  너무 멀리 돌아왔다. 청년들에게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굳이 루쉰의 사랑과 나의 연애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내가 꼰대여서도 아니고 레트로 취향 때문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어느 시대나 사랑은 능동성의 증가와 관련된 것이고, 그것을 위한 형식을 창안하는 일이라는 것. 루쉰의 시대에 그것은 대로에서 “나란히 걷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수백통의 편지를 썼으며, 우리 시대에 그것은 “평등하게 섹스 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세미나를 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주변의 남성들이 우리들을 많이 비웃었다. "쟤네하고 연애하면 매일 세미나하자고 하는 거 아닐까? 섹스하고 난 뒤에 토론하자고 할 것 같아")

  그렇다면 자유가 너무 많고 자유의 주기가 너무 빨라서 어떤 형식도 만들기 힘든 이 시대에 청년들은 어떻게 사랑의 주체가 되고 삶의 능동성을 키울 수 있을까? 난 그것이 정말 궁금하고 걱정된다. 지원아, 고은아, 정우야, 너희들은 어떻게 너희들만의 사랑의 형식을 만들어 갈래? 모든 형식은 느리고, 우회적일수 밖에 없다면, 너희는 LTE급으로 주어지는 이 자유를 만끽하는 게 아니라, 이 자유의 가속도에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하는 것은 아니겠니? 쉽게 만날 수 있는 자유, 쉽게 헤어질 수 있는 자유와 대결하지 못하면 너네, 혹시 망할지도 몰라. 어쩌면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마지막 말은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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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은아님의 댓글

이은아 작성일

문탁선생님의 글이  드디어 올라왔네요.
저는 9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세대로
문탁쌤과 요새 연애의 중간쯤이었나봅니다. 아직 학보에 편지 보내던 시절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