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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디오니소스의 세계’를 만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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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8-07-18 13:41 조회1,9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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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리뷰 ①


‘디오니소스의 세계’를 만나는 자세


성승현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임꺽정은 언제 등장하나?’일 것이다. 2권이 다 끝나갈 때 즈음 꼬마 임꺽정이 잠깐 등장하는 것으로 그 시작을 알리는데,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도 말썽을 부려 걱정을 시킨다 하여 ‘걱정이’로 부르다 ‘꺽정이’가 되었다는 좀 우스운 이야기다. 그렇다면, 장장 2권의 『임꺽정』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일까. 

 

작가 홍명희는 임꺽정이라는 소설을 쓰겠다고 장담을 한지 오래였는데, 도대체 그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각설, 명종대왕 시절에 경기도 양주 땅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란 장사가 있어…

수호지 지은 사람처럼 일백 단팔마왕이 묻힌 복마전을 어림없이 파젖히는 엄청난 재주…

삼국지 같이 천하대세 합구필분이요, 분구필합이라고, 별로 신통할 것 없는 말쯤이야 얹을 수… (홍명희,『임꺽정』,사계절출판사,7쪽)

이처럼 다양한 구상을 하다가 ‘이야기가 생긴 시대를 약간 설명하여 이것으로 이야기의 제일 첫 머리말씀을 삼으리라’ 작정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성종, 연산주, 중종, 인종, 명종대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1권에서는 성종과 연산주, 중종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왕들의 이야기가 주요한 내용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해당 왕의 시대를 살았던 양반이나 양민, 백정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궁금하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왜 필요하지? ‘임꺽정’이라는 영웅을 등장하도록 만들었던 암울한 시대임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정작 소설이 풍기는 분위기는 다르다. 누구도 피해자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 처음을 장식하는 게 바로 '이장곤'이다. 

 

 

도망자 이장곤이 만난 디오니소스의 세계

디오니소스는 니체의 개념에서 가져왔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자 축제의 신으로 불리며,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맹목적이고 혼란스러운 본능적 충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를 부정적인 요소로 해석하지 않는다. 혼란스럽고 부정적인 것들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추동할 수 있기에 그렇다. 니체의 디오니소스를 떠올리게 된 이유가 있다. 이장곤이 교리로 평탄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맞이하게 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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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왕이었던 연산주는 사약을 먹고 죽게 된 어머니의 한을 풀지 못해 포악해질대로 포악해져 있었다. 술과 여자에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행동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신하들을 불러 어머니의 피 묻은 저고리를 보여주며 “내 복수가 정당하지?”를 묻는 것이다. 이장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임금의 원수 갚는 법은 필부와 다를 것입네다. 임금이 덕을 닦으셔서 국가가 태평하오면 원수 갚는 것쯤은 그 속에 있사올 줄로 소신은 생각합네다.”(21쪽)라며 소신을 밝혀 귀양길에 오르게 됐다. 하지만 귀양을 간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연산주는 의심이 많아 귀양 보낸 사람을 결국 죽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이장곤의 죽음을 걱정하던 이가 있었으니, 삭불이다. 그는 유모의 아들이었는데, 이장곤과는 어릴 때 형제처럼 지냈다. 그는 남소문에 있던 한치봉이의 적당에서 도적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삭불이는 그를 살리기 위해 계획을 짜 거제로 간다. 삭불이가 도망할 계획을 말하지만, 이장곤은 ‘도적의 손에서 살아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렇게 삭불이를 떠나보냈지만, 죽음이 임박하자 이장곤은 결국 도망을 결심한다. 음양술수를 아는 친구 정한림으로부터 받아두었던 ‘북방길(北方吉)’이라는 세 글자를 믿고 북쪽을 향해 도망친다. 도망자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이장곤은 자기가 놓여있던 세계를 벗어나 혼돈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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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을 치다 기찰 다니는 장교에게 잡힐 뻔도 하고, 오랜 도망생활에 남은 기운이 일시에 빠져 길에 엎드린 적도 있었다. 한번은 물건이 똑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힘이 빠졌는데, ‘이러다 길송장이 되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보리밥이 채 다 삭지 아니한 똥을 발견하고는 물에 일어 골라 먹고 간신히 기운을 차렸다. ‘적당 틈에 가서 피신하느니 죽는 게 낫다’는 호기는 이미 사라졌다. 똥에 섞인 밥알을 골라 먹으며 그러한 분별은 내려놓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또 다른 터닝포인트를 만들어낸다. 함흥에 도착해 봉단이를 만나게 되는 사건이다. 우물가에서 만난 봉단이와 우여곡절 끝에 혼인을 하게 된다. 이제 백정의 집에서 ‘김서방’으로 살게 된 것이다. 양반으로 살던 이장곤은 무엇을 해도 손이 늦고, 눈치가 없었다. ‘게으름뱅이 사위’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특히 장모에게 구박을 받으며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곤은 향교말 도집강에게 주문받은 동고리를 가져다주는 심부름을 하게 된다. 도집강이 동고리를 받고도 값을 치르지 않자, 이장곤은 장모에게 구박받을 것이 걱정되어 “쌀은 아니 주십니까?”라고 물었다가 멍석말이에 볼기를 맞게 되었다. 이는 양반으로 평생 당할 까닭이 없는 일이었다.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잘못했습니다”를 말하기까지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공으로 동고리를 빼앗으려는 자에게 쌀 말을 하였으니 그런 풍파가 아니 날 리가 없다"는 주팔의 말처럼, 양반은 착취와 폭력으로 백정을 대했던 것이다.  

 

이장곤은 김서방으로 사는 동안 진정한 ‘타자 되기’를 했다. 양반의 눈으로 백정의 삶을 관찰한 것이 아니었다. 멍석에 말리기 전에 항변하듯 말한다. “동고리를 갖다드리라고 해서 가지고 왔고, 쌀을 주시거든 받아오라고 해서 주시지 않느냐고 하인에게 물어본 것이 무슨 죄입니까? 대체 양반은….”(104쪽)이라고. 그 당시에 그는 진짜 백정 김서방이었던 거다. 이장곤은 봉단이와 혼인을 결심하면서 이미 또 한 번의 디오니소스의 세계로 진입했던 것이다. 피신을 위해 잠시 머무를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새롭게 감당해야 할 ‘불확실한 세계’와의 조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나야 할 디오니소스

알 것 같지 않은가. 홍명희가 맨 처음 연산주와 이장곤을 나란히 두었던 이유를 말이다. 앞쪽에 서술된 짧은 글에서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에 갇혀 있는 연산주를.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장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술과 여자, 폭력에 빠져 있는 연산주를 말이다. 그는 폭군이 되어 나라를 참혹한 육시와 처참으로 다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외면적으로는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강한 힘을 가진 인간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상처와 기억에 매몰되어 어떤 능동적인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나약하디 나약한 인물로 보일 뿐이다.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고 실재하는 것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을 짐에서 풀어주고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 보다 높은 가치들이라는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며 삶을 경쾌하고 능동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206쪽)

어머니의 처참한 죽음은 연산주에게 해결되지 않는 디오니소스의 세계였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이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불행이라는 단어에서 어머니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연산주 자신도 다른 삶을 살아낼 수 있다. 반면, 이장곤은 백정의 세계를 능동적으로 경험했다. ‘김서방’을 피해자로 만들지 않았다. 주팔이와 우정을 맺었고, 봉단이와 사랑을 했고, 봉단이의 식구들과 일상을 살았다. 그렇기에, 이장곤이 양반임을 알고 앞일을 걱정하는 봉단이에게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좋은 세상이면 아내에게도 좋을 것이고 아내에게 좋지 못한 세상이면 남편에게도 좋지 못할 터이지.”(123쪽)라고. 이는 김서방으로의 삶이 잠시 액회를 면하기 위한 삶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으름뱅이 사위로 조명을 받으며 지내는 팍팍한 김서방의 삶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경쾌하고 능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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