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Q 글소식] 복수는 나의 것 > MVQ글소식

MVQ글소식

홈 > 커뮤니티 > MVQ글소식

[MVQ 글소식] 복수는 나의 것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8-08-08 22:46 조회1,951회 댓글0건

본문


복수는 나의 것


문탁

 

 

복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나는 무협지도 좋아하고 무협영화도 좋아한다. 매일 매일의 정직한 단련으로만 체득되는 내공의 힘, 그런 고수들이 합을 겨루는 강호무림(江湖武林), 그 실전의 세계가 좋았다. 그곳은 야바위나 설레발이 통하지 않는 투명하고 정직한 세계이고, 오직 고수들만이 맺고 유지할 수 있는 우정과 신의의 세계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많은 무협스토리가 ‘복수’를 주제로 삼아 전개된다는 것이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뜻의 ‘군자복수십년불만(君子復讐 十年不晩)’이라는 말은 무협물의 단골 레토릭인데,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말이다. 나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주인공들의 유장한 기질도 아주 맘에 들었고, 원수를 찾아 헤매는 정처 없는 여정에도 매료되었고(보통 주인공은 이 과정에서 평생친구 하나쯤을 사귄다^^), 단도직입(單刀直入) 끝에 원수를 갚고 장렬히 죽음을 맞는 바로크적인 비장미에도 황홀해했다. 강호는, 적어도 나에게 무협의 세계는, 복수의 서사가 살아있는 곳이고 영웅의 죽음이 환기되는 곳이고 정의가 회복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다른 복수극도 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박찬욱의 영화 중 <복수는 나의 것>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이전의 무협지적인 복수물과도 다르고, 이후의 사적복수를 다룬 많은 영화들과도 다른 독특한 서사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선천적 청각장애인이자 공장노동자인 류. 그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누나의 장기이식을 위해 장기밀매업자를 찾아가지만 역으로 자신의 신장 하나와 전 재산인 1,000만원을 빼앗긴다. 그렇게 되자 주인공의 애인이며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를 주장하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동맹의 유일한 조직원인 영미가 ‘착한 유괴’를 제안한다. 딸을 유괴당한 아빠는 아내 없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하는 중소기업사장 동진이다. 그런데 사태가 꼬인다. 류의 누나가 동생의 범죄사실을 알고 자살한다. 누나를 묻는 날 유괴한 여자아이도 사고로 죽는다. 이제 남는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복수극. 류는 장기밀매업자들을 찾아가 이들을 때려죽이고 장기를 몽땅 적출하여 회를 쳐 먹는다. 동진은 영미를 전기고문으로 죽이고, 류의 아킬레스 건을 끊어 자신의 딸처럼 익사시킨 후 사체를 토막 내서 쓰레기처럼 버린다. 복수는 이제 완결되는가? 그런데 마지막 반전. 느닷없이 등장하는 영미의 동지들.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동맹의 조직원들은 판결문을 낭독하고 동진을 처단한다. 동진은 칼과 함께 자신의 가슴팍에 꽂힌 판결문을 읽으려고 애쓰나 끝내 읽지 못하고 죽어간다. 

 

 

d767e9fe034f0a0e6e8f745e24f4a889_1532966 

위 <와호장룡>(리안, 2000), 아래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2002)

 

  줄거리에서 드러나듯 이 영화는 고전적 복수서사의 플롯을 따르지 않는다. 사건의 인과관계는 단일하지 않고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억울한 놈이 착한 놈을 죽이는 영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반대로 말해도 무방하다.) 한편 박찬욱 감독은 언젠가 “이 영화는 남한 내 계급문제를 다루겠다는 포부에서 기획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이 영화가 계급문제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영화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 어렵다. 이곳의 복수는 구조적인 모순만큼이나 개인적인 죄의식에 의해서도 추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이 영화는 정의의 회복이 아니라 정의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태는 종종 오인과 실수에 의해 발생하지만 결과는 늘 피칠갑으로 가득한 과도한 폭력이고, 이 폭력은 무협물에서와 같은 미적 쾌감이 아니라 관객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미적 불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미덕은, 그러니까 월드컵이 열리고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2002년에 개봉된 이 복수 영화의 미덕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정의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연대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묵시론적 예언. 나는 이 영화를 그렇게 읽었었다. 

 

 

복수의 시적 정화(淨化)

  그런데 여기 무협지적인 복수물과도 다르고 박찬욱의 복수물과도 다른 복수극이 있다. 내가 꼽는 최고의 복수극, 바로 루쉰의 복수극이다. 루쉰은 자신의 고향을 샤오싱(紹興)이 아니라 옛 이름인 콰이지(會稽)로 부르곤 했는데, 그곳은 그 옛날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 포위되어 패한 곳이다. 오나라로 끌려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맛보았던 구천은 콰이지로 돌아온 후 20년간 매일 매일 쓸개를 맛보면서 절치부심 복수를 꿈꾸고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켜 복수를 완성한다. 하여 “콰이지(會稽)는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어내는 고장”이며 루쉰 자신은 “월(越)인으로 그 뜻을 잊지 않고” 있다. (「19360210 황핑쑨에게」, 『서신 14』)고 말한다. 

 

  그러나 루쉰이 치를 떨면서 떠난 자신의 고향 샤오싱을 복수의 땅, 콰이지(會稽)로 재발견하고 자신을 월(越)의 후예로 재정립한 것은 니체와 바이런을 경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도쿄유학시절 니체와 바이런을 만났고, 월인의 후예가 되기 전에 먼저 니체와 바이런의 제자가 되었다.

 

  일본 유학시절, 루쉰이 니체의 평전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닳고 닳도록 읽었다는 이야기, 센다이 의전을 그만둔 후 세계문학을 광범위하게 섭렵했고, 특히 헝가리,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 세르비아, 그리스 등 약소국가의 문학에 깊이 공감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런 독서를 통해 루쉰이 이해한 서양의 19세기는 미국 독립정신과 프랑스 혁명정신이 이미 사라진 시대이고, 모두가 물질문명을 숭배하면서 고만고만한 평균주의적인 삶에 빠져있던 시대이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미래의 시간인 ‘차라투스트라’가 벼락처럼 등장하는 시대이다. 이 새로운 “정신은 반동과 파괴로 채워졌고, 신생(新生)의 획득을 희망으로 삼아 오로지 이전의 문명에 대해 배격하고 소탕하는 것”(「문화편지론」, 1907, 『무덤』)을 임무로 삼는다. 

 

  루쉰이 만난 니체는 위대한 몰락과 위대한 도약의 차라투스트라였다. “너희에게 적이 있다면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이 없도록 하라. 적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다”라며 선의(善意)를 부정하는 자, “누가 너희를 저주할 때 축복하려 들지 말라, 내 맘에 들지 않는 일이니, 차라리 얼마쯤 같이 저주해주어라!”라며 저주를 부추기는 자, “작게나마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앙갚음을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인간적이다”라며 복수를 긍정하는 자이다. (니체, 「살무사의 기습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113쪽) 그러니 당대의 인간들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당대의 인간들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니체, 「서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쪽) 

 

 

d767e9fe034f0a0e6e8f745e24f4a889_1532965

                니체                                                                                         바이런

 

  그리고 니체적인 독법으로 읽은 바이런! 그에게 바이런은 영국의 귀족 이전에 스칸디나비아 해적의 후손이었고 무엇보다 복수의 시인이었다. 그는 “가슴에 품었던 불만을 과감히 발설했으며, 자신만만하고 거침이 없었고 여론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파괴와 복수에 대해서도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이다.(「마라시력설」, 1907, 『무덤』) 그래서 “그는 평생 동안 미친 파도처럼, 맹렬한 바람처럼 일체의 허식과 저속한 습속을 모두 쓸어버리려고 했다. 앞뒤를 살피며 조심하는 것은 그에게는 아예 모르는 일이었다. 정신은 왕성하고 활기차 억제할 수 없었고, 힘껏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정신만은 반드시 스스로 지키려고 했다. 적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싸움을 그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마라시력설」, 1907, 『무덤』) 

 

  20대 루쉰, 니체와 바이런의 제자가 된 루쉰은 ‘복수’에 꽂혔다. 루쉰은 수천 년간 사람 잡아먹는 예교로 지탱해온 식인(食人)의 중국 사회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복수의 시적 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완전한 몰락, 완전한 파괴, 그리고 위대한 창조! 청년 루쉰은 독서했고, 새로운 세계 인식을 얻었고, 그것을 「문화편향론」이나 「마라시력설」, 「과학사교편」, 「파악성론」, 「인간의 역사」 같은 논문들로 열렬히 토해냈고, 무엇보다 기꺼이 그 메시아적 폭력(벤야민) 속으로 자신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내가 티끌로 될 때에, 그대는 나의 미소를 볼 것이다!”

  20대 루쉰은 40대가 되었다. 세상은 별로 바뀌지 않았고 중국의 인민은 여전히 센다이 시절 환등기 속의 군중들처럼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한 구경꾼들이었다. 루쉰 역시 오랫동안 적막 속에 자신을 유폐한 채로 있었다.  

 

“군중 – 특히 중국의 군중 – 은 영원히 연극의 관객입니다. 희생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 만약 기개가 있다면 그들은 비장극을 본 것이고, 만약 벌벌 떨고 있다면 그들은 골계극을 본 것입니다. 베이징의 양고기점 앞에는 항상 몇몇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양가죽을 벗기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자못 유쾌해 보입니다. 인간의 희생이 그들에게 주는 유익한 점도 역시 그러한 것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일이 끝난 다음 몇 걸음도 채 못 가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이 유쾌함마저도 잊어버리고 맙니다.”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1923.12.26, 『무덤』

d767e9fe034f0a0e6e8f745e24f4a889_1532965

처형장면을 구경하는 중국의 군중들

 

  그리고 그 즈음엔 중국의 오래된 만리장성이 무너지기는 커녕 “예전부터 있어 온 낡은 벽돌”에 “보수하기 위해 보탠 새 벽돌”까지 “연합하여 성벽을 이룬 채,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만리장성」, 1925.5.15, 『화개집』)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포위를 풀 것인가? 만리장성을 무너뜨릴 방법은 있는 것일까? 루쉰의 첫 번째 방법은 연극을 아예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군중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들이 볼 수 있는 연극을 없애 버리는 것이 도리어 치료책입니다. 바로 일시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희생은 필요하지 않고 묵묵하고 끈기 있는 투쟁이 더 낫습니다.”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1923.12.26, 『무덤』

   그렇게 써진 루쉰의 「복수」! (1924. 12. 20, 『들풀』) 한 쌍의 검투사가 “온 몸을 발가벗은 채 비수를 들고 광막한 광야에 마주섰다. 그 둘은 보듬을 것이고, 죽일 것”이므로,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행인들이 사방에서 달려온다. 겹겹이, 빼곡하게.” 이들은 “죽자 사자 목을 세워, 이 포옹 혹은 살육을 감상하고자 한다.” 그런데 연극은 끊임없이 지연된다. 그 둘은 마주 서 있을 뿐 “보듬지도 죽이지도 않는다” 언제까지? “통통하던 몸집이 메말”라 버릴 때까지. 하여 행인들은 “무료함을 느꼈다. 무료함이 털구멍을 파고드는 듯하였다. 무료함이 심장에서 털구멍을 뚫고 나와 광야를 가득 메운 채 기어가서 다른 사람들 털구멍을 파고드는 듯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들 마주 보더니 서서히 흩어졌다.” “그리하여 광막한 광야만 남았”고, 두 사람은 여전히 “비수를 들고 메마르게 서 있다. 죽은 사람 같은 눈빛으로”

 

  루쉰이 보여준 이 무시무시한 복수극. 피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구경꾼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으로써 심심해죽게 만드는 “피가 없는 대 살육.” 내가 아는 한, 이 이상의 하드 보일드한 복수극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d767e9fe034f0a0e6e8f745e24f4a889_1532965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포위를 푸는 두 번째 방법. 차라투스트라의 충고처럼 고독으로 탈주하여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파멸하는 것이다. 

 

“너는 네 자신의 불길로 너 자신을 태워버릴 각오를 해야 하리라. 먼저 재가 되지 않고서 어떻게 거듭나길 바랄 수 있겠는가! 고독한 자여, 너는 창조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너는 너의 일곱 악마로부터 신을 창조하고 싶어 하는구나! 고독한 자여, 너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며, 그 때문에 너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그 같은 경멸을. 사랑하는 자는 창조하려 한다. 경멸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경멸할 까닭이 없었던 자가 어찌 사랑을 알겠는가! 형제여, 너의 사랑 그리고 창조와 더불어 고독 속으로 물러서라. 그래야 비로소 정의가 절뚝거리며 네 뒤를 따를 것이니. 형제여, 눈물로 간청하노니 너의 고독 속으로 물러서라. 나는 자기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 하며 그 때문에 파멸의 길을 가는 자를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107쪽

  소설 「고독자」(1925.10.17, 『방황』)의 주인공 롄수는 사람들이 무서운 ‘신당’이라고 기피하는 냉랭한 인물이지만 사실 “아이들 얼굴만 보면 평소의 차가운 태도는 보이지 않고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따뜻한 심정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실직했고, 추위에 떨었고, 굶주렸고, 거의 거지나 다름없이 살게 되자 뜻밖의 선택을 한다. 자신이 증오해마지 않았던 군벌의 고문이 되어 매달 80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새로운 손님, 새로운 선물, 새로운 찬사, 새로운 아부, 새로운 절과 인사, 새로운 마작과 연회”의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여기서 그친다면 이것은 복수극이 아니라 변절 막장극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금의 월급을 모으지 않고 물 쓰듯이 썼다. 심지어 “물건을 사더라도 오늘 산 것을 내일 죄다 팔아 버리거나 부숴 버”렸다. 그는 변절하고 돈을 모으고 출세를 향해 나아간 것이 아니다. 그는 돈, 선물, 손님, 아부, 찬사를 펑펑 써버리면서 그것들을 파괴했다. 그는 “터무니없는 일만 하면서 실속 있는 일이라곤 조금도 하려고 하지 않”고 불면과 각혈로 자신을 몰아감으로써 자신의 실패를 앞당겼다. 하여 돈과 손님과 찬사와 아부와 절과 인사와 마작과 연회와 함께 자신의 육체조차 파멸시킬 때 그의 복수는 완성되었고, 비로소 그는 승리한다. 

 

  마루오 쯔네키는 「고독자」의 복수가 도착된 복수라고 말한다. 롄수의 복수는 루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어두운 충동의 분출인데 루쉰은 이러한 복수가 어떠한 현실도 바꿀 수 없음을 롄수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한다.(마루오 쯔네키, 『루쉰』, 제이앤씨, 196쪽)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롄수는 원숭이와 초인 사이의 교량인 인간, 그 중에서도 최후의 인간인 것은 아닐까? 나는 롄수의 죽음과 복수가 니체적이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기 원하는 사람, 그리하여 그 과정에서 파멸하여 사라지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루쉰은 여전히 차라투스트라의 제자이기 때문에. 

 

 “심장을 후벼 스스로 먹다.....내가 티끌로 될 때에, 그대는 나의 미소를 볼 것이다!” 

「빗돌글」, 1925.6.17., 『들풀』


복수의 연대기, <검을 벼린 이야기>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루쉰 복수서사의 최고봉은 「검을 벼린 이야기」(1926. 10, 『새로 쓴 옛날이야기』)이다. 그것을 쓰고 있을 때 루쉰은 베이징을 탈출해 샤먼에 있었는데, 베이징 탈출의 이유이기도 했던 현대평론파나 꾸지에깡(顧詰剛) 일행 역시 샤먼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그들과 다시 마주쳐야 했고, 베이징에서 함께 일하던 가오창훙(高長虹)이라는 청년에게 느닷없는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화개집속편을 편집하면서 3.18 참사로 목숨을 잃은 두 제자에 대한 애통한 마음도 새삼 커졌을 것이다.(「교정을 마치고 쓰다」, 1926.10.14.) 베이징군벌에게든, 현대평론파에게든, 자신을 “부려먹어도 좋을 때는 한껏 부려먹고 비난해도 좋을 때는 한껏 비난하고 공격해도 좋을 때는 당연히 한껏 공격하는”(『먼 곳에서 온 편지』, 1926.11.7.) 문학청년에게든 심기가 몹시 불편했을 터, 최고의 복수극을 쓸 모든 여건은 갖추어져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두 명이다. 우선 미간척(眉間尺). 그의 아버지는 검을 만드는 천하제일의 장인이었다. 왕의 후궁이 낳은 무쇳덩어리로 꼬박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검 두 자루를 벼렸다. 마지막 가마의 문을 여는 날, 그 검은 시뻘건 색에서 차츰차츰 푸른색으로 변한 후 마침내는 투명한 긴 얼음덩이처럼 변했다. 하지만 미간척의 아버지는 왕이 자신을 죽일 것을 짐작하고 검 두 자루 중 한 자루만 바치고 한 자루는 자식에게 남긴다. 복수의 검으로. 

 

d767e9fe034f0a0e6e8f745e24f4a889_1532965

 간장(干將)과 막야(莫耶)의 설화

 

열여섯이 되던 해, 어머니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미간척은 복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그는 밤새 솥뚜껑을 갉아 먹으면서 잠을 방해하다 물독에 빠진 쥐 한 마리도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뜨뜻미지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유약한 성격을 고쳐야”만 아버지의 원수를 제대로 갚을 수 있을 것이었다. 미간척은 어머니 앞에서 복수를 맹세하고 길을 떠난다. 

 

  그러나 왕의 목을 치기 위해 “곧장 앞을 향해 걸어”가는 미간척은 갑자기 뛰어오는 아이, 빼곡히 서서 목을 길게 빼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구경꾼들, 그 사이에서 떠드는 아낙들과 울고 있는 아이들 틈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멀리서 다가오는 왕의 행차. 자신과 똑같은 검을 차고 있는 왕을 향해 미간척은 “손을 뻗어 어깨 너머 칼자루를 부여잡고” 달려가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발을 거는 바람에 거꾸로 넘어졌고, 넘어지면서 한 소년의 몸을 누르게 되었고, 그 소년과 시비가 붙었다. 왕의 수레는 이미 지나갔고 왕의 행차를 구경하던 수많은 구경꾼들은 이제 미간척과 소년의 시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미간척의 복수가 수많은 구경꾼들과 자기 자신의 “뜨뜻미지근한” 성격으로 좌절되려는 순간, 이 복수극의 또 한명의 주인공 “검은 수염, 검은 눈동자에 쇠꼬챙이처럼 깡마른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오래 전부터 미간척을 알고 있었으며 미간척의 원수를 갚아주려 왔다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미간척. 그는 묻는다. 왜요? 혹시 의협(義俠)이신가요? 그가 대답한다. 의협심이니 동정심 같은 너절한 말로 나를 수치스럽게 하지 말라고. 자신이 미간척의 원수를 갚아주려는 이유는 자신이 복수의 달인이며, “너의 원수가 바로 내 원수이고, 다른 사람이 곧 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미간척에게 검과 머리를 요구한다.

 

  언제나 우유부단했던 미간척은 이번엔 단번에 자신의 목을 친다. 미간척의 몸과 검을 넘겨받은 검은 사내는 왕에게로 가서 세상에 둘도 없는 구경거리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금룡 앞에 금솥을 설치하고 그곳에 아이의 머리를 집어넣는다. 물이 끓자 아이의 머리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물과 함께 소용돌이 쳤다. 좀 더 잘 보기 위해 왕이 금솥에 다가가는 순간 검은 사내는 “번개처럼 왕의 뒷덜미를 뒤에서 그대로 내리친”다. 솥 안에서 만난 두 머리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들처럼 결사적으로 싸운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교활하고 미간척의 머리는 왕에게 물린다. 이제 검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푸른 검을 쥐고 있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자신의 팔을 아주 조용하게 위로 쭉 뻗”어 자신의 뒷덜미를 내리친다. 이제 솥에는 세 개의 머리가 들어갔고 검은 사내의 머리는 왕의 머리를 물어뜯어 왕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놓는다. 급기야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 버린 금솥 안. 남은 것은 구별할 수 없는 백골 세 개와 비녀 세 개. 왕의 머리를 구별할 수 없으니 신하들은 백골 세 개 모두에게 제사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우유부단한 미간척과 이미 상처투성이로 오로지 복수의 의지만이 있는 검은 사람의 공동의 복수극으로 읽는다. 나는 이 위대한 복수극을 루쉰의 청년에 대한 연대의 이야기로 읽는다. “먹으로 쓴 거짓말은 절대로 피로 쓴 사실을 가릴 수 없”고, “피의 부채는 반드시 같은 것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에 (「꽃이 없는 장미(2)」, 『화개집 속편』)루쉰에게는 검을 쥔 검은 사내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청년들도 예전 「광인일기」의 무조건 구해야 하는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정말 복수를 원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우유부단과 자신의 기회주의를 잘라내야 한다. 그들 역시 자신의 목을 먼저 쳐야 한다. 적에게 머리가 잘리기 싫으면 자기가 자기 목을 먼저 치는 수 밖에 없다. 그것만이 절대로 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동시에 나는 이 이야기를 나와 청년들의 연대의 방법으로 다시 읽는다. 가상화폐 규제와 남북단일팀에 분노하는 청년들의 ‘서바이벌 생존주의’에 맞닥뜨릴 때, 부당한 대학행정에 맞서 시위를 벌인 후 오히려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자기에게는 더 많은 소통과 위로와 힐링이 필요하다는 주변 청년들의 징징거림과 마주칠 때, 나는 한편으로 당황스럽고 또 한편으로 안타깝지만 대개는 화가 난다. 난 청년들에게 정의는 숫자를 맞추는 게임이 아니라고, 불안 속에 감추어져 있는 더 깊숙한 욕망을 들여다보라고, 인정욕망을 소통욕망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호통치고 싶다. (참고로 문탁에서 나는 ‘버럭문탁’, ‘호통문탁’이다) 혐오 대신 분노를! 힐링 대신 복수를! 하지만 이래서야 바로 ‘짱돌을 들어라’라고 말하는 ‘진보꼰대’와 다름없이 된다는 것을 안다. 하여 나는 검은 사람처럼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백배로 분노하마. 내가 천배로 복수하마. 나의 남은 생은 검은 사람처럼 복수의 달인 되기. 물론 전제가 있다. 나는 너희를 동정하거나 위로하는 것이 아니니 나에게 그것을 바라지 말 것. 너희도 목을 내 놓을 것. 목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라도 내 놓을 것. 하여 너의 복수는 나의 것! 마지막 순간까지 지독하게 복수를!! 정의는 나중에 절뚝거리며 와도 좋을 것이다.

 


피에쑤: 회찬 형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 일주일 시도 때도 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수없는 말을 쓰고 지웠습니다. 그러다보니 딱 이 열 글자만 남았습니다.)



문탁샘의 월간연재, "루쉰과 청년"에 대한 글을 더 보고싶으신 분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