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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아디오스, 엘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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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8-09-13 08:13 조회1,8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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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오스, 엘람

 

 

김해완

 

지금 나는 외국인 전용 병원인 시라 가르시아 옆에 있는 한 카페에서 평화롭게 글을 쓰고 있다.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고, 고막을 때리는 레게똔이 아닌 부드러운 팝송이 흘러나온다. 쿠바 같지 않다. 뭔가 한국 카페에 온 기분이다. 이런 공간은 아바나에서 눈 씻고 찾아도 만나기 힘들다. 이 카페뿐만 아니라 이 동네에 있는 곳들이 다 그렇다. 외국인 병원뿐만 아니라 대사관이 줄줄이 모여 있는 이곳 미라마르는 한국으로 치면 청담동이다. 아바나의 중심지인 아바나 비에하나 베다도에서는 꽤 떨어져 있지만, 동네 자체는 오히려 더 고급지다. 여기서 나는 ‘엘레강스한 외국인’이 되어 작정하고 돈을 쓰고 있다. 2쿱짜리 에스프레소 대신 2쿡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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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허의 길, 멘탈 붕괴된 나

  

삼 주 전만 해도 나는 내가 이런 고급진 서비스를 누릴 수 있을 줄 몰랐다. 나는 내가 조용한 바닷가 마을인 바라코아에 콕 처박혀 있을 줄 알았다. 카페는 고사하고, 와이파이 공원도 마을 버스도 딱 하나밖에 없는 그 작은 동네에서 의학서적만 파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현재 나는 내가 예상치 못한 집, 동네, 학교에 처해 있다. 바라코아가 아닌 미라마르에, 학생용 하숙집이 아닌 외국인 전용 정식 카사에, 그리고 엘람 의대가 아닌 히론 의대에. 내 예상대로 된 것은 흰 셔츠에 푸르딩딩한 바지인 못생긴 교복을 매일 입고 있다는 것,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엘람 교복과 히론 교복은 똑같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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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하겠다. 나는 엘람에 들어가지 못했다. ‘올라’ 하기도 전에 ‘아디오스’ 하고 말았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어디서부터 내 계획은 꼬였던 걸까? 나도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 정말 모르겠다. 아니, 그러면 돈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전체 그림으로 보면 부수적인 사고였지만, 나의 멘탈은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1. 돈 : 팬티 안에서 무슨 일이

8월 19일에 한국에서 쿠바로 향할 때, 내가 걱정했던 것은 오로지 현금 운송이었다. 쿠바와 한국 사이에는 금융 거래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 사무실은 내게 1년치 등록금을 현금으로 들고 오라고 했다. 8,500달러, 한국 돈으로 970만원에 육박하는 거금을 말이다. 게다가 쿠바까지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서울에서 상해로 가고, 상해에서 뉴욕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미국에 입국한 다음, JFK의 다른 터미널로 가서 9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3시간을 가야 아바나가 나왔다. 36시간이 넘는 이 머나먼 여정에서 돈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느냐. 이것이 관건이었다.

내가 찾은 방법은 바로 ‘찜질방 팬티’였다. 이 팬티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 아주머니들이 찜질방에서 잠을 자기 위해 특별히 개발한 아이템이다. 할머니 팬티 같은 넉넉한 사이즈를 자랑하며, 앞쪽 안감에는 지퍼 달린 주머니가 있다. 여기에 돈이나 여타 귀중품을 넣어놓으면 누가 훔쳐가려고 해도 도저히 모를 수가 없다. (누가 속옷에 돈을 보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칠 년 전에 사촌 언니가 유럽 여행을 가면서 사용했던 것을 이번에 내가 받아 쓰기로 했다. 

처음 써보는 것이라 그런지 애로사항이 많았다. 인천 공항에서 돈을 유로로 바꿨는데, 돈의 양이 워낙 많았을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유로 지폐가 한국 원보다 크기가 컸다. 그래서 절반을 접어서 넣으니 앞섶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내가 레깅스를 입고 있어서 있는 그대로 테가 났다. 뭔가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넉넉한 남방으로 앞을 가리고 거울을 보니 감쪽같았다. 그 누가 내가 팬티 속에 뭘 넣었는지 알겠는가? 나는 부모님과 작별하고 출국 심사대로 향했다. 그러나 안전 검색대에서 남자 직원이 스캔 결과를 보더니, 나를 잡았다. 허리에 찬 복대를 풀라는 것이다. 나는 대답했다. “팬티 복대라서 못 푸는데요.” 직원은 조용히 나를 여자 직원에게 넘겼고, 나는 특별 검색실에 가서 복대의 진짜 정체를 보여주어야 했다. 여자 직원들은 내가 지퍼를 여는 순간 순수하게 감탄했다. “오오...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이런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찜질방 팬티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비행기 안에서도, 뉴욕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샐 때도, 나는 항상 돈과 함께 있었다. 아바나에 도착해서도 나는 은행에 도착할 때까지 이 특별한 팬티를 벗지 않았다. 안에 입은 진짜 속옷은 계속 갈아입었어도, 찜질방 팬티만큼은 지퍼도 열지 않고 그대로 사수했다. 그렇게 은행에 도착해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드디어 미션을 완수했다. 이제 환전만 하면 등록금을 낼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마법이 일어났다. 200유로가 증발한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증발’이었다. 만약 내가 찜질방 팬티를 입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또 야무지지 못하게 어딘가에 돈을 흘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이 어떤 돈인 줄 아느냐고 나를 호되게 자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돈이 샐 수 있는 그 어떤 동선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창구에 가서 돈을 바꾸러 왔다고 하고, 7,400유로라고 말하며 돈을 건넸다. 그러자 직원은 내가 종이를 주면서 주소를 적으라고 했다. 늘 하던 절차라서 별 생각 없이 고개를 숙이고 볼펜을 잡았다. 그런데 주소를 건네자, 직원은 갑자기 내게 돈 뭉치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쪽 창구에는 충분한 현금이 없으니, 저기 끝에 있는 창구에 가서 돈을 바꾸라고 했다. 나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직원은 돈 뭉치를 세보더니, 7,200유로라고 말했다. 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직접 세보라고 했다. 정말로 72장이었다. 인천공항에서 74장인 것을 두 번 확인하고 팬티에 돈을 넣었는데, 돈을 꺼낼 때는 72장이 되었다. 도대체 팬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물론 무슨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 첫 번째 직원이 두 번째 직원이랑 짜고 돈을 슬쩍한 것이다. (뭐라고 소곤소곤 말하는 걸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CCTV를 보자고 했어야 했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 얼이 빠져버린 데다가 24시간 가까이 깨어 있느라 두뇌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36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돈을 보호했는데, 막판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내 두 눈을 믿지 못했을 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 수중에는 길쌤이 용돈으로 쓰라고 챙겨주신 캐나다 달러 300달러가 있었다. 모자란 등록금은 그 돈과 내 돈으로 메웠다. 그렇게 눈물겨운 환전을 끝냈지만, 돈 내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사무실도 두 군데나 찾아가야 했고, 일처리도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다. 서류를 제출하는 데까지 두 시간, 그리고 그 다음 날 다시 찾아가서도 두 시간을 기다려서야 돈을 낼 수 있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직원의 눈앞에서 낱낱이 지폐를 세서 보여주었다. 더 이상 돈을 뺏길 수는 없었다. 안 그랬다가는 쿠바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았다. (MVQ 글에는 안 썼지만, 작년에도 별별 우여곡절 속에서 거의 50만원 되는 돈을 잃었다.) 

더 이상 팬티 속에서 돈이 증발하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무실 직원은 내가 그토록 염원했던 영수증을 주었다. 이 영수증을 손에 쥐려고 그 모든 모험을 치렀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서 마침내 찜질방 팬티를 벗었다. 그리고 14시간을 내리 잠만 잤다. 이제 준비해온 서류와 영수증만 학교에 제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꿈같은 생각을 하면서.

 

2. 집 :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그 다음에는 집 문제가 터졌다. 나는 원래 돈을 납부하는 순간 곧장 이사를 갈 생각이었다. 6월 말에 한국에 오기 전에 미리 집을 찾아 두었다. 그런데 집주인이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해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마침내 전화를 받은 집주인은 내게 진실을 고백했다. 지방에 사는 여동생이 예고 없이 자기를 찾아왔다고. 그래서 9월 20일까지는 내게 집을 내어줄 수가 없다고. 그때까지만 다른 곳에서 머무르면 안 되겠느냐고.

마음에 돌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바라코아에서 집을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 집을 구할 때까지 그 먼 동네를 세 번이나 찾아갔다. 이 집이 마음에 쏙 든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 집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거의 한 달 동안 살 집을 이제 와서 또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이메일에서 알려준 대로 코히마르의 학교 분점을 찾아가서 서류를 제출하려고 하니, 위생 검사를 해야 하니 10일 동안 학교에서 합숙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가 시작하기 직전에야 합숙이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집은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집주인은 내게 사과를 하면서 자기가 어떻게든 이웃집에 빈 방을 구해보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마음이 급해서 집주인과 이야기를 하러 바라코아까지 직접 찾아갔다. 내일이면 나는 코히마르에서 10일 동안 붙들려 있을 테니, 그때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집주인은 난처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리고 이웃집에 연락을 했는데 나를 거절하더라고 했다. 내가 예전에 이 집을 방문했었는데,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이 지금 나에게 화가 나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헐, 이럴 수가. 그의 말이 맞았다. 이 집을 찾기 전에 나는 또 다른 집을 찾았었다. 그 집은 너무 작고 에어컨도 없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집을 전혀 찾지 못한 터라 거절하지도 못했다. 내가 확실하게 결정을 못 하자, 아주머니는 나중에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새 집을 찾은 후에도 이 옛날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연락하지 않았다. 새 집이라도 지금은 오케이지만 언제든지 상황이 잘못될 수 있다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렇게 되면 이 작은 집이라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아주머니도 내게 전혀 연락을 취하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다른 학생을 구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두 번째 집을 찾게 되었을 때 나는 이 집과 그 집이 서로 이웃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알았더라면 조취를 취했을 것이다. 나는 왜 이 둘이 딱 붙어있는 이웃이라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나는 내 멍청함과 부주의에 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웃을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를 하겠다고 했다. 나를 받아주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내가 약속을 어긴 것은 사실이었으니, 직접 사과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집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모녀는 이 동네에서 성격이 고약하고 자존심 세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감정을 내려놓으면 한 달치 숙소비를 벌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자존심을 세우는 것을 보라고. 자기도 불편해서 이들과 말을 잘 섞지 않는다고. 나는 앞으로 바라코아 생활이 골치 깨나 아프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 집을 안전하게 구해보려는 얕은꾀가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서 나를 넘어뜨릴 줄이야. 예수님 말씀이 맞았다. 이웃을 사랑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이 나를 미워하게 된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라. 집 문제가 엉킨 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곧 알게 되었다. 더 큰 폭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폭탄의 위력은 앞의 두 폭탄을 무화시키고도 남을 만큼 셌다.

 

3. 학교 : 돈 내는 학생은 서럽다

쿠바에 도착한 지 5일째, 나는 다시 짐을 쌌다. 10일치 합숙을 위해서였다. 빵빵한 여행 배낭을 메고, 끙끙대면서 아침 일찍 코히마르에 도착했다. 교직원은 나를 기숙사로 안내했고, 나는 에어컨이 없는 기숙사의 상태에 우울함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얼굴이 익은 할머니 직원이 멈춰 섰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여기는 예비 코스를 밟는 애들만 오는 곳이야. 그런데 너는 이미 시험을 통과했잖아?”

여기 왜 왔냐니. 오라고 했으니까 왔지. 내가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할머니는 어디서 공부할 예정이냐고 물었다. 나는 엘람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엘람에 직접 가서 서류를 내면 된다고 말했다. 내가 믿을 수 없어하자, 친절하게도 엘람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런데 더욱더 믿을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올해 입학 예정인 학생 중에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일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예감했다.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고,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서 곧바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엘람이 아니라 SMC(나처럼 돈을 내는 비장학생 의대생들을 관리하는 사무실)로 향했다. 이곳은 내가 2월부터 입학 절차를 밟아왔던 곳이다. 내가 이곳에서 엘람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게 10번은 된다. 그리고 이곳의 직원들 중 그 누구도 엘람에 갈 수 없다고 내게 말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입학 절차를 밟으면 된다고만 했다. SMC에 도착하자, 나는 닥터 마누엘을 불러냈다. 그와는 계속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입학 과정에 대해 의논한 바가 있었다. 닥터 마누엘은 나를 기억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폭탄을 던졌다.

“아, 몰랐나? 비장학생들은 엘람에 못 가요. 엘람은 국가끼리 하는 프로젝트라서 국가 장학생들만 갈 수 있어요. 비장학생들은 다른 쿠바 학생들처럼 아바나 의과대(La Universidad de ciencia médica de la Habana)에 입학해야 해요. 엘람에서 꼭 공부를 하고 싶다면 이론 공부야 거기서 할 수 있지만, 그래봤자 더부살이 식으로 1년 밖에 같이 공부를 못해요. 그리고 졸업할 때도 엘람이 아니라 아바나 의과대 졸업장을 받을 거에요. 공식적으로 입학이 안 되니까”

왜. 왜. 왜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 해주는 건가? 돈도 다 내고, 서류도 다 공증 받고, 6년 동안 이곳에 살 마음의 준비를 다 한 상태에서? 최대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쿠바에서는 모든 의대들이 똑같은 교육 시스템을 따른다. 쿠바 학생들은 의대를 선택할 수 없고, 국가가 배정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또, 삼학년 때부터는 학교와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 섞여서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엘람을 가든 히론을 가든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일 년에 천만 원 가까이 내고 제 발로 찾아온 학생에게 이렇게 배려 없이 대해서는 안 되는 거다. 아니, 이건 배려가 아니라 상식의 차원이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엘람에 가고 싶다고 말했던 6개월 전 그 때 그 순간에 했어야 하는 거다. 정말이지, 돈을 내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심각하게 입학 보류를 고려했을 것이다. 혹은 쿠바를 떠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때는 진짜로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나 쿠바는 녹록치 않은 나라다. 떠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나는 환불 절차를 밟으면 10%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의대 정책을 떠올렸다. 10%를 제외하고 돌려주는 게 아니라, 10%만...... 나는 심호흡을 깊게 했다. 그리고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아바나 의과대는 여러 분점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 본점인 히론에 가서 입학 절차를 밟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어느 분점으로 갈 것인지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택시를 탔다. 그리고 히론에 갔다. 교직원은 내게 어느 분점에서 공부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여기 있겠다고 말했다. 이제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다고.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그 순간 나는 히론 학생이 되었다. 아바나에서 명성이 제일 드높은 의대 학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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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게 졌다

나는 나를 추슬렀다. 멘탈 붕괴가 되어 주저앉아봤자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돈은 이미 냈고, 나는 이미 쿠바에 있고, 주사위는 이미 던져 졌다. 내가 바랐던 대로 온갖 나라의 친구들을 사귀는 게 아니라 곧바로 쿠바 친구들에게 둘러싸이겠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좋으리라. 다수가 쿠바인이고 외국인이 소수이니 수업이 훨씬 더 빡세겠지만, 그것도 어떻게든 따라가 보리라. 이런 큰일을 연속해서 겪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의대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적으로 준비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강하게 살아보려는 내 의지를 꺾은 일이 있었다. 나보다 이주일 늦게 쿠바에 도착한 현우가 나처럼 히론에서 입학 절차를 밟는데, 엘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 교직원은 엘람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대신 2월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엘람에 가기 위해 반년을 준비했다. 그리고 막판에 와서 모든 게 뒤집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갈 수 있다고? 그리고 반년을 더 기다리라고? 이 모든 시스템이 나를 바보로 만드는 것 같았다. 이제는 정보를 더 알아보러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그 동안 나는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여기 MVQ에 대놓고 글로 쓰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 살면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이며, 내 개인적인 문제로 괜히 생색을 내봤자 누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마음으로 이왕이면 유쾌한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의 한계가 무너졌다. (재의쌤의 별자리 해석을 참고해서 말하자면, 전갈자리 달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진 것이다.) 나는 쿠바에게 졌다. 내 멘탈리티는 승리하지 못했다. 거의, 거의, 거의 이길 뻔 했다. 상황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할 때마다 나는 잡생각을 줄였고, 쓸데없이 짜증내면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며 해결책을 찾았다. 내가 예전보다 좀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시험을 내린 쿠바에게 감사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한도를 넘었다. 내 뱃속에서 화는 용암처럼 끓어올라 마침내 폭발했다. 아직도 불쑥불쑥 분노가 나를 덮친다. 으아. 으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러니까, 비싼 카페에서 2쿡짜리 커피를 마시는 것쯤이야 애교인 거다. 200유로짜리 커피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가. 그리고 ‘엘레강스한 외국인’ 코스프레를 두 시간 쯤 하는 게 무슨 대수인가. 나는 곧 ‘매직 리얼리즘’이 판을 치는 쿠바의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쿠바인처럼 살고자 했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쿠바는 사방에서 나를 덮쳐오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마음을 비우고, 에너지를 채우고, 정신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를 쓰는 것. 나는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되었나? 아, 내가 오겠다고 했었지. 하하......

멘붕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 아직 풀지 않은 썰이 많다. 너무 많아서 문제다. 그럼, 그때까지 아디오스. 다들 건강하시라.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씩씩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하루하루 진정한 쿠바나가 되어가는 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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