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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니체의 ‘아니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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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8-11-30 14:15 조회1,8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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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아니오’ (5) 

 

  신근영(남산 강학원 연구원)

  

자유로운 인간은 전사다

 

니체의 ‘아니오’는 자유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그 운명과 맞서고 있는 자의 모습이다. 이제 한계없는 운명이란 자유의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매 순간이 자유의 공간을 열게 되는 가능성이 된다. 운명의 한계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싸움 역시 한계 없이 계속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끝없는 싸움, 끝없는 자유. 훗날 니체가 말했듯, “자유로운 인간은 전사다.” 

 

한 때 자유라고 하면 아무런 걸림돌도 없는 상태를 떠올리곤 했었다.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안락한 상태가 자유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싸움은 끝이 없었고, 그런 안락함은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지쳐갔다. 그리고 좌절했다. 하지만 그 좌절의 정체는 나의 믿음, 제한없는 자유라는 그 환상에 있었다. 자유는 싸움 그 자체이며, 내가 바라던 안락함이란 어떤 면에서 자유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었다. 

 

싸움에 지치는 이유는 나의 환상 때문이었다. 내게 싸움은 자유를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나는 얼른 싸움을 끝내고 자유라는 어떤 상태에 도달하고 싶었다. 결과를 얻으려는 조급함. 막무가내로 서둘러 목적에 도달하려는 마음. 그 마음이 싸움을 한없이 피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니체를 쫓아 싸움 그 자체가 자유가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싸움은 더 이상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나란 존재의 자유로움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자유가 주는 안락함이 있다면 그것은 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느껴지는 안락함이 아니라,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것, 그래서 삶이 자유 위에 서 있다는 존재적 자신감에서 말이다. 

 

니체는 평생에 걸쳐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들과 직면했고 그것을 넘어서는 싸움을 지속했다. 이런 모습에 힘들고 괴로워했을 니체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니체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그는 싸우는 한 자유로웠고,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만 편안했다. 그렇기에 니체는 자신을 가로막는 운명을 결코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유의지의 적이지만, 그 적이 자신의 자유를 실현시켜 주기 때문이었다. 적과의 우정! 전사는 이 우정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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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우정! 전사는 이 우정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마주한다. 

 

  

아마도 자유의지란 단지 운명이 가진 최고의 잠재성일 것이다. (<운명과 역사> 중) 

 


그대 전사로 살아 갈 수 있는가

 

자유정신으로서 전사. 전사는 싸우는 한 자유로울 수 있는 자이다. 그렇기에 전사의 관심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싸움을 놓지 않을 수 있는가다. 요컨대, 그는 싸움을 멈추고 싶은 마음과도 싸워야 한다. 이쯤에서 적당히 타협하자는 마음, 적당한 예속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마음, 어찌 보면 이 마음이 전사를 가장 위험에 빠뜨리는 전쟁터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성장은 이런 전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성숙한 인간이란 모름지기 적당히 화해할 줄 아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서도 슬쩍 눈감고 넘어가주는 센스랄까. 쉽게 용서하고, 쉽게 화해하는, 그러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 묘한 찜찜함 하나쯤은 가지고 가는 어정쩡함. 결국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한 때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퇴역장군이 된다는 것이 성숙한 인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늙는다는 것은 비단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쉽게 화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25살에 문헌학 교수가 되어서 살았던 10년의 자신에 대해 너무 일찍 늙었다고 말한다. 그는 대학에서 안정된 삶을 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 자신 안에는 청춘이 있었다. 18살 <운명과 역사>를 써내려가던 그 청춘이, 운명에 대한 싸움이 자유라고 말하던 그 전사가. 니체는 그 늙음 속에서도 툭툭 밀고 올라오는 청춘에 화답하듯, 《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 고찰》을 썼다. 그리고 결국 대학을 떠난다. 그렇게 니체는 너무 일찍 늙어가던 자신에게 청춘을 되돌려 준다. 

 

니체가 말해주는 청춘은 전사다. 청춘은 희망에 부푼 가슴도, 좌절에 몸부림치는 아픔도 아니다. 그것은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는 굳건함이 만들어내는 푸르름이다. 때로는 피곤해서 싸움을 멈추고 쉬기도 하지만, 청춘에게 그 평화는 오직 싸움을 위한 잠시의 휴식일 뿐, 목적이 되지 못한다. 그는 평화가 주는 편안함을 떨치고 일어나 싸움터로 향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사로서의 존재양식이 청춘이며, 하여 청춘은 자유다. 

 

이러한 청춘에게 필요한 것은 지치지 않고 싸움을 이어갈 수 있는 지혜, 싸움이 주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커다란 건강이다. 니체에게는 이런 지혜가, 그 건강이 무르익는 것이 나이듦이다. 그러니 우리는 니체를 따라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전사에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점점 더 푸르른 청춘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자유로운 인간은 점점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젊어지는 것이며, 그렇게 어린아이로서 죽게 된다고. 

 

니체에게 삶이란 싸움의 지혜와 커다란 건강을 만들어가며 가장 탁월한 전사가 되어가는 여정이다. 그 길에 막 들어선 18살의 니체는 조금은 서툰 솜씨로 운명과 대결한다. 니체의 이런 무딘 칼은 <운명과 역사> 이곳저곳에 모호한 흔적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 글은 명확한 해답을 담은 글이라기보다는 질문들의 연속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모호함이 오히려 무언가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법. 이 서투른 전사는 질문 하나를 건져낸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평생을 품고 갈 질문을. 그대 전사로 살아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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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투른 전사는 질문 하나를 건져낸 것이다. 

 

  

삶에 대한 전사의 사랑 

 

1889년, 니체는 토리노 광장에서 쓰러진다. 채찍을 맞는 말을 부둥켜안고 연민에 울부짖던 니체는 더 이상 예전의 니체가 아니었다. 그날의 발작 이후, 그는 암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10년 정도를 정신적 식물인간 상태로 살다가 1900년, 니체는 생을 마감했다. 

 

철학을 통해 완성된 인격체가 되기는커녕, 반미치광이 상태로 맞이한 니체의 죽음. 이런 니체의 마지막은 그가 걸어왔던 사유의 길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곤 한다. 하지만 전사의 죽음을 가늠하는 척도는 싸움의 결과가 아니다. 승리인가, 실패인가는 그 전사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전사됨은 그가 끝까지 싸웠는가에 있으며, 이것만이 전사의 승리다. 

 

니체는 죽는 날까지 싸움을 내려놓지 않았다. 발작적인 상태로 치달아가는 와중에도 그는 사유하려 했고, 쓰려했다. 그렇게 내놓게 된 말년의 글들. 어떤 이는 그런 글들이 별로 믿을 게 못된다고 말하곤 한다.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글들에 담긴 최종적 내용은 아니지 않을까. 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매순간을 자신의 질문과 살아갔음에, 그 질문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았음에 있다. 니체는 자신을 엄습해 들어오는 병들 속에서도 ‘전사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았다. 이 질문의 증표가 그의 마지막 글들이다. 

 

니체는 결코 자신과 타협하지도, 삶과 화해하지도 않았다. 그것만이 진정 삶을 사랑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기에 결코 쉽게 화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이 그가 믿는 삶에 대한 사랑이었다. 연인이자 적으로서의 삶,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전사의 사랑! 니체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죽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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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매순간을 자신의 질문과 살아갔음에, 

그 질문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았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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