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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 글소식] 앎이란 마음으로 아는 것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9-01-10 10:15
조회 : 292  

앎이란 마음으로 아는 것

 

한수리  

 

다만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저번 전습록 발제에서 아내와 별것도 아닌 집안일 문제로 다투었던 것을 썼다. 둘 다 요즘 아이를 돌보느라 힘들어서 그랬는지 예민했다. 아내가 집안일을 부탁했지만 나는 한의원 예약 시간에 늦어 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는 짜증을 냈고 나도 기분이 상했다. 나중에 아내에게서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지만 내 안에서는 그 감정이 잘 풀리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아내가 힘들어서 그랬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도 할 만큼 하고 있고 힘든 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같이 들었다. 분명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는 문제라는 걸 알겠는데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 고민이었다. 거기에 대한 문샘의 코멘트는 아직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알지 못하기 때문일 거라고 하셨다. 또한 양명선생도 이러한 고민에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아직까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다만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1) 나는 분명 알지만 행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양명학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양명학에서는 안다는 게 무엇이길래 알면 행동할 수밖에 없고, '앎과 행위는 합일한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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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앎에 대한 다른 태도

  양명은 『대학』의 한 구절을 통해 참된 앎과 행위를 설명한다. 

 

(『대학』에서 ) “마치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여색을 보는 것은 앎에 속하고,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행위에 속한다. 아름다운 여색을 보았을 때 이미 저절로 좋아하게 되는 것이지, (아름다운 여색을) 쳐다본 뒤에 또 하나의 마음을 세워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악취를 맡는 것은 앎에 속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은 행위에 속한다. 악취를 맡았을 때 이미 저절로 싫어하게 되는 것이지 (악취를) 맡은 뒤에 따로 하나의 마음을 세워서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전습록1』 서애의 기록 5조목, 88쪽, 왕양명 지음,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

 

  인용문에서 아름다운 여색이라 말했지만 아름다운 색깔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아무튼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이게 아름답구나 인식하고 나서 아름다우니까 좋아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진다. 악취도 마찬가지로 맡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든 코를 막든 한다. 양명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 악취를 맡는 것이 바로 앎이다. 즉 안다는 건 머리로 생각하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무의식적으로 잡으면 뜨겁다는 것을 느끼고 바로 손을 떼는 것과 같다. 행은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자마자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지행은 떨어질 수가 없다. 

 

  여기서 느끼는 주체는 눈, 코, 입, 사지가 아니다. 양명은 눈이 보게 하고, 귀가 듣게 하고, 입이 말하고, 사지가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마음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느낀다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느끼고, 마음이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내를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는 건 머리로 알지 못한 게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해야 한다는 걸 먼저 머리로 알아야 느끼려고도 하고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이지 않나? 어떻게 머리로 알지도 못하는데 마음으로 알고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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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먼저다

 

  양명의 친구 고동교 역시 쌀이 먹을 것인 줄 알아야 밥을 지어 먹고, 길이 길인 줄 알아야 앞으로 갈 수 있다는 비유를 들며 지식적 앎이 있은 후에 행할 수 있다며 양명의 지행합일 설에 대해 반박한다. 이에 대해 양명은 이렇게 답한다. 

 

무릇 사람은 반드시 먹고자 하는 마음이 있은 뒤에야 밥인 줄 안다. 먹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의향[意]이며, 바로 행위의 시작이다. 음식의 맛이 좋은지 나쁜지는 반드시 입에 넣은 뒤에야 안다. 어떻게 입에 넣지도 않고 음식 맛이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알 수 있겠는가? (무릇 사람은) 반드시 걷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뒤에야 길인 줄 안다. 걷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의향[意]이며, 바로 행위의 시작이다. 갈림길이 험한지 평탄한지는 반드시 몸소 걸은 뒤에야 안다. 어떻게 몸소 걸어가 보지도 않고 갈림길이 험한지 평탄한지를 먼저 알 수 있겠는가? 

- 위의 책, 고동교에게 답하는 글 132조목, 360쪽

   마음이 있어야 밥인 줄 안다고? 먹을 것인 줄 아는 것과 마음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것은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나오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해서 배가 고픈 상태다. 그럴 때 젖이 먹는 것인 줄 알고 먹는 게 아니라 배고프니까 일단 뭐라도 빨려고 한다. 그러다 엄마가 젖을 주니 빨아보고 빨아보니 먹을 만하고 배도 부르니 먹는다. 먹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배고프다고 느끼면 먹을 것을 찾고 먹는 행동을 하게 되고 그 이후에 맛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잠자리를 따듯하게 해야 하고, 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건 지식으로 알아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이 춥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있어야 방을 살피고 따듯하게 해드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봐야 부모님에게 어느 정도가 적당한 온도인지 알 수가 있다. 물에 빠지려는 아이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소리쳐서 구하든 달려가서 구하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봐야 아이를 진정 구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았다 할 수 있다. 이처럼 머리로 알아야 행동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정반대로 양명은 마음이 느껴야 행동을 하고 머리로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따로 분리될 수가 없다. 그래서 양명은 ‘지행합일’을 주장한 것이다. 

 

  양명에게서 앎과 행은 절대로 마음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배고프고, 걱정하고, 측은히 여기는 것은 모두 마음이 하는 것이고 이미 마음에 모두 있다. 그래서 양명은 이치(理)가 우리의 마음에 모두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이미 마음에 이치가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아내가 힘들어서 그랬다는 걸 마음으로 느끼지도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걸까? 이치가 내게도 있다면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는 걸 느끼고 행동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치가 이미 마음에 있는데 왜 사람들은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일까?

 

 

앎을 가로막는 사욕

 

예컨대 코가 막힌 사람은 비록 악취가 나는 것을 앞에서 보더라도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몹시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아직 냄새를 알지 못한 것이다. 

-위의 책, 서애의 기록 5조목, 89쪽

 

  코가 막히면 마음도 냄새를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면 행동할 수 없다. 막힌 것을 제거해야 행동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제거해야만 알고 행동할 수 있다. 양명은 막히게 하는 것을 사욕이라 말한다. 예를 들어 잃어버린 지갑을 주웠다고 하자. 그때 그 안에 있는 돈을 탐낸다면 우리는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의 안타까운 심정을 느끼지 못하고 그 돈을 자기가 쓰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을 안다면 어떻게든 찾아주려 애를 쓸 것이다. 이처럼 사욕은 우리의 마음이 알지 못하게 해 이치에 맞는 행동을 막는다. 그렇다면 내가 아내와 싸웠을 때 이해해야 한다는 걸 마음으로 알지 못했던 것도 사욕 때문일까? 그것은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듯 상대방이 힘든 것을 느끼지 못하게 했으므로 사욕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욕이 가로막았던 것일까?

 

  그 사욕은 '이해받고 싶어'였다. 나는 일방적으로 이해를 받고만 싶었던 것 같다. 아내의 상황과 마음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를 알아주지 않는 상대가 서운했다. 여기에는 아내가 나에게 부탁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못 하는 상황보다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있었고 그것을 상대의 이해를 통해 가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맘대로 되지 않자 뿔이 났다. 이러한 사심들이 있으니 아내와 소통이 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해받고 싶어'하는 나의 사욕은 다른 관계에서도 종종 있어왔다. 내 여러 글에서의 주제는 나의 일상과 생계 문제였다. 그 안에는 항상 '힘들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아마 그것 또한 나는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더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 역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감추려는 사욕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욕이 나를 알지 못하게 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는 걸 알았다 해도 그것이 내 맘대로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사욕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자기를 위하는 마음

 

소혜 :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기기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양명 :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자기를 이길 수 있으며, 자기를 이길 수 있어야 비로소 자기를 성취할 수 있다.”

소혜 : “저에게도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지만 눈은 아름다운 것을, 귀는 좋은 소리를, 입은 맛을, 사지는 안일을 구하기 때문에 이길 수 없습니다.”

양명 : “그것들은 모두 너를 해치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자기를 위한다면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아야 한다.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모두 너의 마음이므로 반드시 네 마음으로 말미암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예(禮)가 아닌 것이 싹터 움직이면, 마치 칼에 베이고 침에 찔린 듯이 참지 못하여, 반드시 칼을 물리치고 침을 뽑아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자기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책, 설간의 기록 122조목, 327쪽 정리 및 편집

 

  양명은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한다는 제자에게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혜가 말하듯 누구에게나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욕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우리는 그 사욕을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좋은 소리를 듣고, 맛있는 것을 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하게 있는 게 나에게 좋은 것이라 여긴다. 잃어버린 지갑을 주워서 그 돈을 쓰는 사람도 그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보다 그 돈을 쓰는 게 자기에게 이롭다고 여긴다. 하지만 양명은 그러한 것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해치는 것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예(禮)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禮)란 무엇인가? 양명에게 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식적인 게 아니다. 양명에게 “예(禮)자는 곧 리(理)자”​2)로 이치를 뜻한다. 그리고 그 이치는 바로 마음에 있다. 이 마음은 사욕이 제거된 마음의 본체로 양명은 이를 '양지'라 한다. 어떤 사건과 상황 속에서 이 양지는 나에게 가장 좋은 최선의 행동을 하게 한다. 양명의 한 일화가 이 양지를 잘 보여준다. 양명은 목숨을 걸고 왕을 좌지우지하던 환관 유근의 잘못을 상소한다. 그는 이 일로 곤장 40대를 맞아 죽을 뻔한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그 행동만이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떳떳할 수 있을 때 그 마음은 환하고 밝아진다. 그 환하고 밝은 마음은 자신 안에 있던 참된 즐거움(眞樂)을 불러온다. 이 참된 즐거움은 고통이나 슬픔, 두려움이나 걱정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한다. 과연 이것보다 더 자신을 위하는 길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만약 나에게도 이런 진정 나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해받고 싶어' 하던 내 마음을 즉각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나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통해서 내가 하지 않은 것을 감추고 못 하는 것처럼 꾸미려는 마음이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내 마음을 불편하고 힘들게 하였다. 그렇기에 그런 행동은 절대 나를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진정 나를 위한다면 양명처럼 나의 마음을 먼저 위해야 한다. 마음을 진정 위한다면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않은 사욕이 올라올 때 그것이 나의 마음을 칼로 베고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이 느껴져 즉각 없애버리려 할 것이다. 그랬을 때 자신을 위한 행동을 하며 참된 즐거움을 가진 밝은 마음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좋은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자기를 위하는 굳센 마음을 스스로 다져 자기를 이겨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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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습록1』 서애의 기록 5조목, 88쪽, 왕양명 지음,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

2) 위의 책, 서애의 기록 9조목,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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