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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Q글소식]<금요일은 니체>진리에의 의지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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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04-13 16:37 조회2,4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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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의 의지를 묻다

보연

 『선악의 저편』, 제 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에서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를 문제 삼는다. 그들은 변하지 않는, 순수한,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믿으며, 철학자들은 이러한 진리를 발견한 자들이다. 그들은 진리에 근거해 세계를 진리와 비진리의 대립적 구도로 나눈다.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이 있을까? 예를 들면 모든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이성이 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사랑이다 등이다. 이성, 도덕, 사랑 같은 진리는 다른 생각의 침범을 받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 모든 것에 우선하는 최우선의 가치로 설정돼 있다. 

  니체는 이 생각을 반대한다. 진리란 없으며 진리를 원하는 마음, ‘진리에의 의지’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우리안의 무엇이 이토록 진리를 원하는지, 우리는 왜 차라리 허위를, 불확실성을, 무지를 원하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그의 질문을 마주하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허위나 불확실성, 무지를 원할 수 있는가? 삶에는 당연히 따라야 할 기준과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있는 게 아닌가? 진리가 없다면 삶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니체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의 의지'만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갈림길에서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한다. 다수가 선택한 길, 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일이 내게는 진리이다. 이런 선택은 위험이 적었고 손해를 보는 일도 적었다.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일, 가진 것을 최대한 적게 잃고 적어도 중간은 갈 수 있는 일, 다수가 선택한 안정적 길을 가고 싶었다. 니체의 질문은 나를 도발한다. 허위와 불확실성, 무지를 원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것만 같다. 도대체 그는 어떤 맥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진리에의 의지는 비난받아야 할 일일까? 그는 왜 진리에의 의지를 묻는 것일까? 니체의 질문을 따라가며 이 궁금증을 해소해보고자 한다.  

철학, 충동들의 질서의 기록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에 대해 물을 때 ‘누가’ 그것을 지향하는가? 라고 묻는다. 그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다. 그는 진리를 욕망하는 마음, 진리를 욕망하는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면 진리에의 의지를 욕망하는 철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 철학은(그 철학자는) 어떤 도덕을 지향하고 있는가? 따라서 나는 ‘인식에의 충동’이 철학의 아버지라고는 믿지 않으며, 다른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인식(더구나 잘못된 인식!)을 단지 하나의 도구로서 이용했을 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충동들이 철학에서 그야말로 영감을 불어넣는 수호신(또는 악마나 마귀)으로서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를 고찰해볼 경우, 우리는 이러한 기본충동들 모두가 이미 한번은 철학을 수행해왔으며, 그 기본충동들 하나하나가 바로 자신을 기꺼이 존재의 궁극목표이자 나미지 모든 충동들 위해 군림하는 정당한 주인으로 내세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선악의 저편』, 아카넷,  32쪽 

니체가 볼 때, 철학을 수행하는 것은 기본충동들이다. 뭐? 충동이라고? 충동이라는 용어 자체가 우리에게는 정돈되지 않은, 날 것의, 원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은 이성의 표본이며 충동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이성과 충동, 몸과 정신을 분리해서 보는 대립적 가치판단에 속한다. 니체는 이성과 충동, 몸과 정신을 분리해서 보지 않았다. 이성, 감정, 충동, 의지 등은 모두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기본적인 충동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흔히 ‘충동구매를 했어’라고 얘기할 때를 떠올려보자. 합리적 구매를 하려고 했으나, 쇼핑의 순간에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혹은 목록에 없는 물건을 구매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목록에 없었던 물품을 사려는 충동이, 목록에 없는 물품을 사면 안 된다는 충동보다 강하게 작동해 그것을 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행위와 거의 동시에 이렇게 생각한다. ‘아, 오늘 이성을 잃었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말 또한 본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명분을 주기 위한 충동에서 나온 것이다.

 흔히 ‘충동구매를 했어’라고 얘기할 때를 떠올려보자. 합리적 구매를 하려고 했으나, 쇼핑의 순간에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혹은 목록에 없는 물건을 구매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목록에 없었던 물품을 사려는 충동이, 목록에 없는 물품을 사면 안 된다는 충동보다 강하게 작동해 그것을 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행위와 거의 동시에 이렇게 생각한다. ‘아, 오늘 이성을 잃었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말 또한 본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명분을 주기 위한 충동에서 나온 것이다. 

이성, 감정, 충동, 의지 등은 우리신체의 기본적인 충동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가 대상을 볼 때 눈과 뇌, 마음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왜곡해서 바라보게 조건지어 있다. 따라서 ‘이성’은 모든 것을 투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존재의 편견, 경험, 가치, 감정 등이 뒤섞인 해석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과 본능은 분리되지 않으며 의식은 본능의 활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능적 활동의 주인이 바로 충동들이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모든 행동은 충동들 하나하나가 주인이 되어 실현한 승리의 기록이다. 후회하거나 비겁했던 행동들 또한 어떤 충동의 승리의 기록인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 어떤 철학자의 진리는 기본충돌들 하나하나가 자신을 다른 충동들 위에 군림한 기록이다. 갑자기 철학자들과 내가 동급으로 느껴진다. 내게는 명성이 없을 뿐 가장 강한 충동의 작용에 이끌려 사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충동들의 역사는 뒤집어지고 또 뒤집어질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의 강한 소망, 편견을 ‘진리’라는 불가침의 영역에 세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래서 니체는 이들이 ‘진리’라는 자신의 편견에 대한 교활한 대변인이며,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고백할 양심의 용기가 없다고 비판한다.

왜 그런 믿음이 필요할까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를 속여 왔다. 우리의 편견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를 ‘진리’라는 이름의 고정된 세계로 만들고, 이 편견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도록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영역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그래야 했을까? 그렇게 했을 때 얻게 되는 효과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자도 결국은 아름다운 가능성들로 가득 찬 수레보다 한 줌에 지나지 않는 ‘확실성’을 여전히 선호한다. 심지어 불확실한 어떤 것보다는 차라리 확실한 무를 위해서 죽으려고 하는 양심적인 청교도적인 광신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덕의 태도가 아무리 용기 있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니힐리즘이며 절망에 빠져 있고 빈사상태에 이를 정도로 지쳐 있는 영혼의 징후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선악의 저편』, 아카넷,  39쪽 

니체는 영원, 불별, 순수성에 대한 열망, 이러한 진리에 대한 믿음은 ‘확실성’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우리는 한 줌의 확실성을 얻기 위해서 목숨까지 건다. 내 경우에도 세상에 절대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마음이 놓일 것 같다. 깜깜한 어둠에 빠졌을 때,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진리라는 정답이 있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한줄기 희망이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찾는 모험 대신, 바로 앞이 절벽인지 땅인지 더듬어가려는 노력 대신 무언가에 의존해 빨리 안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은 모험이자 매력이지만 동시에 위험이다. 따라서 두려움이 많을수록 피곤에 지친 사람일수록 재빨리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니체는 이러한 모습을 니힐리즘이며 지쳐있는 영혼의 징후라고 말한다.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려는 용기, 스스로 길을 내려는 사람일수록 강한 체력과 활력이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우리는 편견을 ‘진리’로 고정해야만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만나고 경험하며 생각하기를 그칠 수 있다. 이것이 니힐리즘,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삶에 매혹을 느끼지 못하며 모든 것이 두렵고 허무한 상태, 그래서 빨리 안심하고 쉬어야만 하는 나약한 상태, 이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휴식일 수밖에 없다. 

니체가 도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

 지금까지 우리가 진리를 원하고 또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질문을 따라가자 ‘진리’라는 견고한 벽 뒤에 숨은 우리의 민낯이 드러났다. 숨기고 싶었던 치부가 드러난 느낌이랄까. 우리가 진리를 원하는 이유는 빠른 편안함과 휴식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약한 신체가 계속 편안하려면 ‘진리’라는 확실한 명분이 필요하다. 나는, 철학자들은 게으르고 피곤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세계를 거부하며 그것을 겪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 세계, 내가 서있는 현장을 진리의 벽으로 둘러쌓아 놓고 그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려는 나 자신을 보게 만든다. 그가 볼 때 진리에의 의지는 자기자신의 지속적인 어둠과 빈곤을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 차라리 무지를! 허위를! 불확실성을 욕망하라고 도발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조금이라도 고개를 돌려볼 테니까. 그의 도발이 견고한 이 벽을 계속 흔들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할 수 있도록, 이 벽을 나가려는 한 걸음을 조금씩 내딛을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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