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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浚恒(준항)’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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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07-09 11:50 조회1,4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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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浚恒(준항)’의 함정


오창희(금요 감이당대중지성)

 

雷風恒

恒, 亨, 无咎, 利貞, 利有攸往.

初六浚恒貞凶无攸利.

九二, 悔亡.

九三, 不恒其德, 或承之羞, 貞吝.

九四, 田无禽.

六五, 恒其德, 貞, 婦人吉, 夫子凶.

上六, 振恒, 凶.

 

뇌풍항 괘는 오래도록 지속하는 도(道)를 이야기하는 괘이다. ‘항(恒)’이라고 하면 항상성, 항심, 지속하다, 꾸준하다, 변함없다 등등의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작심이 삼일에 그쳐서 좌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단단히 먹지 못한 나를 탓하며 더 굳게 각오를 다진 것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항 괘의 초효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浚恒(준항)貞凶(정흉)无攸利(무유리)정이천은 이렇게 풀이한다. ()이란 깊게 하는 것이니, ‘준항이란 상도를 구함이 과도하게 깊다는 말이다그래서 올바르더라도 흉하니 이로울 게 없다고. 약해서 탈이지, 아무리 해도 과할 것 같지 않은, 오래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깊으면 되레 지속에 방해가 되다니.

정이천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나의 의구심에 답해 준다. 준항이란, ‘배움을 처음 시작했는데 주공과 공자에 이르려는 것이고, 정치를 시작했는데 요순처럼 교화시키려는 것이며, 친구와 처음 교제했는데 깊은 우정을 나누려는 것’이란다. 사례를 보니, 단번에 이해가 된다. 그러면서 ‘글이 왜 이렇게 안 써지는지 모르겠다. 공동체 생활에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등등의 원망 섞인 푸념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가르치는 사람이 시원찮아서, 공동체가 이상한 곳이라서, 사람들이 나랑 안 맞아서’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더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 경우에도, 과하게 구하는 것이 문제라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결심이 굳지 못함을 탓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참에, 어떤 일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구하는 것이 깊으면 왜 흉함으로 가는지, 그 이치를 한 번 따져 보자.

초효의 풀이를 다시 읽어보니, ‘깊이’ 라는 단어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두 개의 단어가 나란히 붙어 있다. ‘조급하게 (깊이) ‘요구하는’. 항(恒)의 시작 단계에서는 ‘깊게 하는 것이’ ‘조급하게’와 ‘요구하는’ 심리를 동반한다고 보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초장부터 무언가를 과하게 바라는 마음에는 ‘조급함’이 있다. 그 분야에 축적된 바가 없는 초짜로서는, 바라는 바가 깊다 보면 조급함이 생기고, 조급함은 누군가에게 ‘요구하는’ 마음, 즉 의존성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명 사이비단체들이나 단기속성코스들이 이런 심리에 바탕을 둔 것이구나 싶다. 일단 조급함이 발동하면 객관적인 상황판단 능력이 사라진다. 그래서 척 봐도 사기꾼인 ‘도사’한테 속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발병 이후 처음 10년간 변함없이 명약을 찾아다닌 나의 행동도 다 이런 조급함과 의존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깊게 하다’는 준(浚)이라는 글자에 왜 ‘빼앗다. 약탈하다’라는 의미가 함께 있는지, 조급함이 왜 죄인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게 없는 걸 급히 얻으려면 빼앗는 수밖에. 그런데 명약을 요구하는 대가로 돈을 주었고, 나으려고 하는 게 나쁜 일도 아닌지라, 그 밑바닥에 빼앗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알고 나니 좀 섬뜩하다.

준항이 흉하다면 어떻게 해야 ‘항’할 수 있나. 정이천은, “하나에 고정하여 집착하면 오래 지속할 수가 없으며”, “이 세상 만물 중에 움직이지 않고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뜻밖이다. 한 번 먹은 그 마음을 쭉 밀고 나가는 게 항심인 줄 알았는데, 변해야 오래 간다니. 이천 선생은, “사람들이 항상성을”, “한 가지를 고정하여 집착하는 것”이라고 오해할까 염려가 돼서 ‘항’의 이치를 이렇게까지 자세히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지속의 비결은 “오직 때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고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항’을 잘못 이해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항’이라는 것을 다시 정리해 봐야겠다. ‘항’은 오랜 시간 어떤 길을 간다는 것을 전제로 한 상황이다. ‘준항’은, 그런 때에 처음부터 한 가지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흉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때와 상황에 맞게 변화하고 바꾸는’ 걸 어렵게 하기 때문이란다. 여기에 ‘준항의 함정’이 있었다. 역(易)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오래 가고자 한다면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고정과 집착이 변화를 가로막아서 흉하다면 초기단계에서 필요한 건 뭘까. 가고자 하는 길을 긴 안목으로 바라보는 여유,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만나는 변수들과 섞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유연함이다. 그러고 보니 감이당이라는 공동체를 만나면서, 동의보감과 다양한 고전들을 읽으면서, 니체의 ‘위대한 건강’에 매료되면서, 뉴욕이라는 낯선 곳을 경험하면서…. 이렇듯 참으로 많은 변수들과 섞이는 과정에서, 건강에 대한 생각은 변화를 거듭해 왔고, 앞으로도 고정된 하나의 건강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나만의 건강함을 끊임없이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오직 원상회복만이 건강하게 사는 길이라 생각하고 거기에만 집착했다면, 그간의 몸 상태로 보아 건강하게 사는 길은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제 2학기 에세이 발표를 했다. 날은 덥고, 글을 읽는 우리도 힘들고, 일일이 코멘트를 하시는 선생님도 힘들어 보였다. 글이 흡족하지 않았더라도, 행여 학기 초, 올해의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기대한 모습에 집착하지 말자. 그 대신 각자의 ‘때와 상황’에 맞게 ‘변화하고 바꾸면서’ 지금-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유연성을 발휘해 보자. 그렇게 한다면 ‘준항의 함정’에 빠져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섞이고 변하면서 가다보면, 더위도 한풀 꺾이고, 어느새 연말 에세이를 발표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나만의 다양한 글쓰기를 좌충우돌 만들면서 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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