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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한서라는 역사책]가을녘의 한제국을 지키는 법, 오직 믿음 뿐!
 글쓴이 : 감이당 | 작성일 : 19-08-08 15:18
조회 : 55  

가을녘의 한제국을 지키는 법, 오직 믿음 뿐!


길진숙

1. 황혼 무렵, 무제의 결단

무제 시기 한나라는 최고로 팽창했다. 무제의 재위 기간은 장장 55년(기원전 141-기원전 87년). 반세기 너머 동안 무제는 땅 넓은 줄 모르고 사방을 정복했으며 동시에 사방의 인재들을 여한 없이 기용했다. 무제 시대, 한나라는 부지런히 뻗어 나갔고 바쁘게 움직였으며 화려하고 눈부시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이 성장과 팽창이 계속 갈 수는 없었다. 절정은 곧 쇠락의 시작이다. 오르면 내려가야 하고 차면 기우는 것, 이는 천지자연의 법칙이자 만고불변의 진리다. 반고는 팽창에 여념이 없었던 무제 때에 쇠락의 기미를 포착했다. 제국의 표면은 크고 번화하고 사치했지만, 국고는 비었고 백성들은 절반으로 줄었다. 더 이상의 확장은 불가능했다. 수습하고 마무리해야 했다.

팽창과 성장의 욕심을 접고 내실을 다지고 마무리해야 할 즈음무제 개인에게도 황혼이 찾아왔다태양을 삼키고 태어난 무제그 개인의 생애도 저물고 있었던 것이다황혼의 시기 무제는 혼암한 상태였다. 66무제는 큰아들을 잃었다군대를 일으켜 강충의 무고를 진압했지만멈추지 못하고 진격하여 끝내 황실의 군대와 대결했던 맏아들 위태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그 후 둘째 아들 제나라 왕 유굉도 죽었다셋째 아들 연나라 왕 유단은 너무 앞서 나갔다둘째 형이 죽자 유단은 자신이 즉위할 차례라 생각하고아버지 무제에게 입궁하여 숙위하겠다고 상서를 올렸던 것이다유단은 황제가 되기에는 처신이 너무 가벼웠고 신중하지 못했다무제는 화가 나서 상서를 가지고 온 사신을 오히려 가둬버린다넷째 광릉왕 유서와 다섯째 창읍왕 유박이 있었지만 무제는 이들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다.

지난주에 올린 글에서 보았듯죽기 직전 무제는 뉘우쳤다인의 장막에 가리어지고성장과 사치 그리고 불로장생과 환락의 욕망으로 혼암해진 자신을 돌아보았던 것이다생애 마지막 1년 무제는 병들었고죽기 전날 유조를 내렸다구익 부인의 막내아들 유불릉을 태자로 정하고 대장군 곽광거기장군 김일제좌장군 상관걸어사대부 상홍양승상 차천추에게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유조를 남기고 다음 날 붕어했다이때 유불릉의 나이 8이 어린 황제가 무제의 대권을 계승한 소제(昭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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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유불릉의 나이 8살, 이 어린 황제가 무제의 대권을 계승한 소제(昭帝)다.

무제는 장성한 아들들을 다 물리치고 겨우 8살짜리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정치를 직접 돌보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어린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준 이유는 무엇일까? 무제는 자신의 아들들보다 자신을 보좌했던 신하들을 믿었다. 자신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고 마무리하여 나라를 지켜야 할 시기, 무제는 여섯 아들 중 이 일을 감당할 만한 인물은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무제가 보기에 한나라의 앞날은 곽광, 김일제, 상홍양, 차천추 이 네 명의 신하에게 달려 있었다. 유씨의 한나라가 유지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이 대신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

무제는 결단했다. 장성한 아들들은 고분고분 대신들의 말을 듣기 어려울 터, 대신들이 섭정할 수 있도록 8살의 막내아들을 황제로 앉힌 것이다. 무제는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했다. 자신의 죽음 이후 어린 황제가 어떻게 될지, 대신들이 배신할지 그건 예측 불가. 이럴 때 무제는 장고(長考), 심사숙고(深思熟考)! 자신의 판단을 믿고 대신들을 믿을 뿐. 그리고 어린 황제가 대신들을 믿으리라고 믿을 뿐. 적어도 막내아들 유불릉에게 옳은 것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판단력이 있다고 믿을 따름이었다.

2. 어린 황제의 믿음, 흔들리지 않으리!

8살의 소제가 등극하면서 대장군 곽광이 내치를 담당하고 승상 차천추가 지방을 관할하였다. 과연, 무제의 판단은 옳았다. 소제의 재위 기간(재위 기원전 86-기원전 74) 13년 동안 나라는 안정되었다. 곽광은 어린 소제를 대신하여 충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곽광을 받쳐주며 각자의 역할에 전력했던 김일제, 차천추 또한 변함이 없었다. 대신들은 다른 마음 없이 소제를 보좌했다. 대신들의 충심이 한나라의 가을을 지켜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소제 시대, 한나라를 지켜낸 공은 무엇보다 소제 자신에게 있었다. 소제의 판단과 믿음이 한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나이가 어려도 판단은 명석할 수 있다. 무제가 소제의 그런 점을 눈 밝게 보았던 것인지, 소제는 아버지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믿었던 곽광을 한결같이 믿었다. 여러 사람의 참소에도 곽광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소제 시대의 안정을 있게 한 건, 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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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의 참소에도 곽광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소제 시대의 안정을 있게 한 건, 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늘 그렇지만 상황도 변하고, 마음도 변한다. 한마음 한뜻을 변함없이 지켜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무제가 보필을 부탁한 대신들의 사이도 시간이 지나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내치를 전담한 곽광에게 불만을 갖는 세력들이 생겨난 것이다. 소제의 형 연왕 유단, 소제의 누이 개장공주, 상관걸 부자, 상양홍. 이들은 모두 곽광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모두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곽광에게 분노를 폭발시켰다.

유단은 평소 황제로 뽑히지 못한 것에 불만이 많았다. 당연히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하는 곽광에게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유단을 자극했다. 어린 황제가 유씨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며, 서열로 보아 유단이 황제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부추긴 것이다. 유단은 중산국 애왕의 아들 유장, 제 효왕의 손자 유택 등과 모의하며 무기를 정비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거사가 일어나기도 전에 발각되어 유택은 처형당했으나 유단은 용서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왕의 황실에 대한 원한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권력에의 의지는 더욱 불타오른다. 유단은 호시탐탐 소제와 곽광을 노렸다.

개장공주는 총애하는 내연남 정외인을 제후로 책봉하고자 상관걸 부자를 움직였으나곽광이 이를 불허했다개장공주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이로 인한 원한은 깊디깊었다곽광의 장녀와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은 결혼하여 둘 사이에 딸이 있었다상관걸은 개장공주를 통해 손녀를 소제의 후궁으로 넣었고 몇 달 뒤 황후가 되게 하였다그런 까닭에 상관걸 부자는 개장공주를 위해 정외인을 여러 차례 추천했다곽광은 이런 사감에 휩쓸리지 않았다이 말도 안 되는 청탁은 거절되었다상관걸 부자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곽광을 미워하게 된다더구나 상관걸은 무제 때 곽광보다 지위가 높았는데소제 때 이르러 곽광이 내치를 전담하면서 권력을 다투었으니 곽광에 대한 미움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상양홍은 술소금철의 전매로 나라 살림을 이롭게 한 공적을 내세워 아들의 관직을 얻으려 했다그러나 뜻대로 할 수 없게 되자 곽광에 대한 원망을 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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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곽광에게 분노를 폭발시켰다.

결국 소제가 14살 되던 해, 개장공주, 상관걸 부자, 그리고 상양홍은 곽광을 내치기 위해 모의를 한다. 이들은 연왕 유단을 움직였다. 유단의 이름으로 곽광의 죄를 고발하는 상서를 올린 것이다. 곽광이 제멋대로 낭관을 검열하면서 길을 치우게 하고 음식을 차리게 했으며, 마음대로 막부의 교위를 늘렸다는 내용이었다. 말인즉슨, 곽광의 전횡을 문제 삼은 것이다.

소제는 이들의 요구를 불허했다. 놀랍게도 소제는 이들이 올린 내용이 거짓임을 알았던 것이다. 소제는 곽광의 행적을 훤히 꿰고 있었다. 곽광이 검열한 일은 며칠 안 되었고, 교위를 선임한 것도 열흘이 안 되었는데, 멀리 있는 연왕이 이 일을 어찌 이리 빨리 알 수 있는지, 터무니없는 모함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소제는 허수아비 황제가 아니었다. 이후에도 이들은 곽광을 참소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소제는 결국 화를 내며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곽광을 헐뜯는 말이 계속된다면 법으로 다스리겠노라고. 상관걸 무리들은 다시 참소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권력에의 욕망은 가라앉지 않는 법. 개장공주와 상관걸 무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곽광을 죽이고 소제도 폐위시키고 연왕 유단을 황제로 세울 거사를 계획한다. 권력을 농단하고 싶은 마음이 모여 반란을 꾀하게 된 것이다. 이 끈질긴 붕괴 작전에 소제도 곽광도 말려들지 않았다. 소제가 곽광을 믿었기에 이 반란도 바로 진압되었다. 연왕과 개장공주는 자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3. 소제와 곽광의 콜라보, 나라를 살리다!

소제는 진실하게 믿었고, 곽광은 사심 없이 황제를 보좌했다. 반고는 소제와 곽광을 주나라 때의 성왕과 주공에 비견했다. 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하고 얼마 안 되어 붕어하자,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했다. 어린 성왕을 대신하여 주나라를 섭정한 이가 무왕의 동생 주공이다. 주공 또한 곽광처럼 참소를 많이 받았다. 주공이 성왕의 자리를 노린다는 참소가 들끓었던 것. 성왕은 삼촌 주공을 믿었다. 이 때문에 주공은 초창기 주나라 안팎을 안정시키고, 장구히 뻗어나갈 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그리고 주공은 성왕이 장성한 뒤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반고는 소제와 주공의 관계를 성왕과 주공에 비견하면서도, 곽광에 대해서는 주나라의 주공이나 은나라의 이윤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고 평가한다. 황제의 스승이자 보호자로 큰 절개를 지켜 나라를 바로 잡고 위태로운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그 누구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곽광은 황제에게 스승이자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도, 황제를 위해 또 다른 스승이자 보호자가 될 인물을 승상으로 기용했다. 소제에게 『시경』을 가르쳤던 채의를 승상으로 발탁한 것이다. 소제는 채의에게 『시경』을 전수받고 매우 기뻐하며 벼슬을 내린 바 있었다. 채의는 급사중, 어사대부를 거쳐 나이 80세에 승상이 되었다, 작은 체구에 수염과 눈썹도 없어 모습이 할머니와 비슷했으며 걸을 때 허리가 구부러져 늘 양쪽에 관리가 부축해야만 걸을 수 있었다. 호사가들은 채의의 겉모습만 보고 곽광이 현명한 사람을 고르지 않고 부리기 좋은 사람을 되는대로 골랐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곽광은 세상 사람들에게 채의가 황제의 스승임을 알리지 않았다. 곽광은 채의와 같은 스승을 통해 어린 황제를 절차탁마하였다. 황제와 곽광의 신뢰는 이런 바탕 위에서 쌓여 간 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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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광은 채의와 같은 스승을 통해 어린 황제를 절차탁마하였다.

한나라의 가을은 소제와 곽광 덕분에 계속 이어졌다. 소제와 곽광은 서로를 신뢰하며 한나라 가을녘, 열매가 익을 수 있도록 나라 안팎을 다독거렸다. 성인이 되었을 때도 소제는 곽광에게 정사를 일임했다. 소제는 20살에 생을 마감했다. 아들을 남기지 못해 권력의 공백이 걱정되었지만, 그 공백을 곽광 이하 대신들이 메꾸었다. 무제의 믿음은 이렇게 증명되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군주에 그 신하. 무제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아버지의 믿음에 아들과 신하가 부응하지 않았다면, 한나라의 안정이 다시 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을녘의 한나라를 지키는 건. 오직 믿음 뿐! 반고는 소제 시기를 이렇게 평가했다.

  성왕이 주공을 의심하지 않았듯이 효소제도 곽광에게 위임하면서 성왕과 효소제는 모두 명성을 남겼으니 위대하도다. 효소제는 효무제의 사치와 여러 작폐, 용병의 뒤처리를 물려받아 국력이 바닥났고, 호구는 절반으로 줄었는데 곽광은 시무의 요체를 알아 요역과 부세를 가벼이 하며 백성과 함께 휴식을 취했다. 시원과 원봉 연간에는 흉노와 화친하여 백성의 살림도 충실해졌다. 현량 문학을 등용하며 백성의 고통을 위로하였으며 소금과 철 그리고 술의 전매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니 그 존호를 소(昭, 밝다)라 한 것이 참으로 합당하도다.

(진기환 역주, 「소제기」, 『한서』1, 명문당,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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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녘의 한나라를 지키는 건. 오직 믿음 뿐!

곽광은 승상 차천추와 협력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원인을 전국에 물었다. 술과 소금과 철의 전매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올라온 60여 명의 준걸들이 조정의 뜰에 모여 치국의 근원을 논의하고 술과 소금과 철의 전매에 대한 논쟁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 논쟁이 벌어진 때는 기원전 81년.

이런 노력 끝에 소제와 곽광은 무제 이전의 정치 비전으로 돌아갔다. 무위와 휴식! 흉노 정벌로 국고가 바닥나고 백성의 절반이 줄어든 때, 곽광은 오히려 부세를 가볍게 하고, 백성들을 쉬게 했다. 그 결과 백성의 살림은 충실해졌다.

백성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대대적으로 물었던 소제와 곽광. 소제 시대 나라를 살린 또다른 한방이 바로 이것! 이 논쟁은 선제 때 관리, 환관이 『염철론』이란 제목으로 정리하여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런 논쟁이 있었고, 이 논쟁을 정리한 책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하기 짝이 없다. 소제 때 사방 각지에서 뽑힌 준걸들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내놓은 방책은 어떤 것이었을지? 다음 번 글에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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