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란(감이당 금요대중지성)
火澤 睽 ䷥
睽, 小事吉.
初九, 悔亡, 喪馬, 勿逐自復, 見惡人, 无咎.
九二, 遇主于巷, 无咎.
六三, 見輿曳, 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
九四, 睽孤, 遇元夫, 交孚, 厲无咎.
六五, 悔亡, 厥宗噬膚, 往何咎?
上九, 睽孤,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之弧, 匪寇, 婚媾, 往遇雨, 吉.
규괘는 물과 불, 애초에 갈 길이 다른 존재들이 임시로 동거하는 형상의 괘이다. 안 그래도 위로 타오르는 불이 윗자리에 있고, 아랫자리에는 밑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놓인 꼴이니 이제 앞으로 둘의 사이는 어긋나고 멀어질 일만 남았다.
분열이 시작되는 규(暌)의 시대. 지금 우리 집이 딱 그 짝이다. 우리 집 최연소 구성원은 방년 십오 세. 사춘기의 정점을 찍는다는 중2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깜찍발랄한 초딩이었는데 이젠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 털이 숭숭 난 종아리의 중딩이 되어버렸다. 쪄죽는 삼복더위에도 문을 꼭꼭 닫고 들어앉거나 마루에 있는 컴퓨터 앞에 고난이도의 부동자세로 장시간을 버티는 특기를 지닌 이 녀석의 귀에는, ‘할 말만 하고 들을 말은 안 듣기 위한 용도’가 아닌 가 추측되는 헤드폰이 근 24시간 장착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악을 쓰지 않고는 대화가 불가능한 조건인데, 악을 쓴다는 건 이미 대화가 아니므로 이래저래 소통이 불가하달까.
이런 녀석의 작전에 대한 나의 대응책은 이러했다. 성을 내거나 서러워하거나, 엄마를 감시자로 만들지 말라고 호소하거나 조용히 옆에 책 펴고 앉아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거나. 나름 다양한 수를 쓴 것 같지만 실은 그저 감정적인 반응에 불과했다. 집안에 발발한 분열의 싹을 순지르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한. 결과는 뭐, 역시나 좋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매우 불쾌한 기분이 되었을 뿐. 그런데 규괘에는 전혀 다른 대응책이 제시되어 있다. “안타까이 여길 필요 없다. 잃어버린 말을 쫓지 마라. 저절로 돌아올 테니.(悔亡, 喪馬, 勿逐自復). 미운 사람을 보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見惡人, 无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