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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짝짓기’로서 존재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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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08-19 09:59 조회1,2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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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정 (청년 스페셜)

옷을 골라 입고 화장을 한다. 거울을 본다. 나름 예쁘다. 이 정도면 크게 꿀리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와의 만남에 있어 ‘꿀리지 않는’ 건 아주 중요하다. 만나서도 계속 신경을 쓴다. ‘내 이야기가 별로인 건 아닐까?’, ‘내 인생을 후지게 보고 있지는 않나?’ 이러니 누구 하나 만나는 일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만나기 전부터 후까지 검열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24시간 붙어있는 내 안의 ‘나’에게 말이다.

검열자는 도처에서 기능했다. 그는 늘 나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몰아세웠다. 행동 하나, 말 하나마다 후회가 돌아왔다. 그렇다고 그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했는가 하면, 것도 아니다. 그냥 부족한 그 자체가 ‘나’였다. 그게 ‘나’인데, 어쩔?

이런 ‘나’의 세계에 『안티 오이디푸스』가 침입했다. 첫 장부터 충격과 공포였다. ‘젖가슴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이고, 입은 이 기계에 짝지어진 기계이다.’ 철학책이라면서 ‘나’는 안 보고 내 몸의 일부를 본다. 왜??? 게다가 내 입과 가슴이 ‘기계’란다. 사람인 내가 기계라고? 왜????? 엄청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이 책은 철학책이긴 했다. 하지만 한동안 나는 공포 속에서 떨어야 했다. 나를 조각조각 잘라진 것으로, 인간이 아닌 것으로 보게 만드는 SF호러…….

그렇게 ‘내’가 ‘기계들’이 되자, 내 안의 검열자는 졸지에 백수가 됐다. 이제는 딱히 그가 처리할 문제가 없었다. 내가 뭔가 부족한 문제가 아니라, 기계들이 벌이는 짝짓기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기계들은 늘 다양한 짝짓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순간마다 무수한 조합들이 생겨났다. 이른바 기계들의 짝짓기 파티!

모든 것은 기계를 이룬다. 별들이나 무지개 같은 천상 기계들, 알프스 기계들, 이것들은 렌츠의 몸의 기계들과 짝짓는다. 기계들의 끊임없는 소음. <온갖 형태의 깊은 삶과 접촉하는 것, 돌들, 금속들, 물, 식물들과 영혼을 교감하는 것, 달이 차고 기욺에 따라 꽃들이 공기를 빨아들이듯 꿈에 잠겨 자연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것, 렌츠는 이런 것들이 무한한 지복의 느낌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4쪽

렌츠보다 앞서 작동하고 있는 ‘기계들.’ 눈-기계는 밤하늘의 별과 만나 반짝거리느라 바쁘고, 귀-기계는 수천의 나뭇잎들이 떨리는 소리에 맞춰 왈츠를 춘다. 파르르르~ 파르르르~ 발바닥-기계는 또 어떻고? 그것은 돌들과의 접촉을 일으킬 때마다 돌의 생김새를 어림짐작하느라 몹시 예민해져있다. 눈이 안 달려있으니, 블라인드 테스트랄까. 한편, 코-기계를 타고 들어간 밤공기는 폐 세포-기계와 만나 얼싸안으며 첫인사를 하고 있는 중~ 기계들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소음을 일으키며 곳곳에서 짝짓기 활동을 하고 있다. 렌츠라는 ‘인물’은, 나라는 ‘자아’는 단순히 이 기계들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자아’의 세계는 온통 나 하나로 가득 차 있다. 그 세계에서는 무엇을 만나도 오직 한 종류의 삶만이 있다. 내게 결핍된 것을 캐내고 찾아내는 삶. 나의 부족함 외에는 어떤 것도 그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모든 만남이 그저 하나의 피곤한 일로 귀결되는 곳, 그곳이 바로 ‘자아’의 세계다. 반면에 ‘기계들’의 세계는 아주 경쾌하다. 그곳은 결핍으로부터 출발하는 대신, 무엇과도 거침없이 곧바로 접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온갖 형태의 만남들이 이루어진다. 그 만남 하나하나가 우글거리며 살아 숨 쉬고, 그리하여 만나는 것들 모두가 저마다의 삶을 만들어내는 곳, 수천수만의 짝짓기가 삶을 이루고 있는 기계들의 세계.

『안티 오이디푸스』는 나에게 ‘살아있다’는 게 어떤 건지를 다시 보게 한다. 자아의 세계를 지키며 사는 게 정말 생명으로서의 삶일까? 오히려 자아는 온갖 짝짓기로서 존재하는 나를 소외시키는 게 아닐까? 이렇게 조금씩 자아의 세계에 안티를 거는 일은, 한편으로 나를 아주 새로운 세계에 이끌리게 한다. 나도 다르게 살아있고 싶다. 결핍감에서 벗어나 검열자의 시선을 떨치고, 찐~한 짝짓기의 세계를 만나고 싶다. 자아에 매몰된 내가 아닌, 생명으로서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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