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번에 감이당 화요대중지성에서 『마음』을 다시 만났을 때는 조금 다르게 읽혔다. 선생님의 유서에서 무언가를 강하게 호소하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그 울림에 응답하고 싶어졌다. 문제는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에세이를 쓰면서도 나는 선생님이 왜 자살했는지 제대로 해명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선생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일이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말한 바 있다. 문명이 이대로 발달하면 미래에는 대부분의 인간이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이고, 학교에서는 윤리 과목 대신 자살학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아직 학교에서 자살학을 가르치진 않지만, 백 년이 지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다. 『마음』의 선생님, 내 주변 사람들,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유명인들이 자살하는 이유와 그 죽음의 의미는 각기 다를 것이다. 하지만 소세키가 내다본 것처럼, 그리고 『마음』의 선생님이 유서를 통해 호소하려고 한 것처럼 나는 이들의 자살이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마음』을 읽는 이유는 그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 연결 고리를 찾는 과정은, 문명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가에 대해 답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인간의 어둠을 응시하는 용기를 낸다면 소세키가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에 책임감 있게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