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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공부하는 노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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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09-03 15:02 조회1,4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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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노인의 노래







이한주 (금요대중지성)

 

重火 離 ䷝

離, 利貞, 亨, 畜牝牛吉.

初九, 履錯然, 敬之, 无咎.

六二, 黃離, 元吉.

九三,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九四, 突如其來如, 焚如, 死如, 棄如.

六五, 出涕沱若, 戚嗟若, 吉.

上九, 王用出征, 有嘉, 折首, 獲匪其醜, 无咎.

 

올해 공부의 일환으로 ‘공부하는 노인 되어 보기 상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일명 <공로상 프로젝트>이다. 40대에서 60대까지, 중장년층의 참여로 이루어진 공부 모임이다.자본주의에 예속된 인간의 무의식을 파헤치는『안티 오이디푸스』를 바탕으로 해서, 이 시대에 끌려다니는 노인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토론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함께, 또는, 각자 자신의 삶을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간 평가를 해보자면,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다.

솔직히 말해, 이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우려되는 점이 많았었다. 진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 이 실험에 대해 미심쩍은 마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여자들 모두『안티 오이디푸스』가 처음일 뿐만 아니라 몇몇 분은 서양 철학을 처음으로 공부하는 분들이셨다. 이분들이 매주 화요일마다 모여 밥까지 나누어 먹으며 하루를 같이 보내야 했다. 그것도, 어렵고 어렵다는『안티 오이디푸스』와 함께. 더구나 프로그램 안에는 공부뿐만 아니라, 명상, 산책, 탐방, 관람 등, 체험 활동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참여자들의 능동성이 필요했다.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실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시작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이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의 분위기가 그것을 말해 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에 보여주었던 책에 대한 거부감과 토론의 두려움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활동에 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며 반영되기를 원한다. 아무튼, 참여자들은 현재 이 프로젝트를 즐거워하는 듯 보인다. 결석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 이 즐거움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사실 이 즐거움을 누리게 된 배경에는 주역의 힘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화리 괘. 올해 초 중화리 괘의 구삼효를 공부하며 노년을 앞둔 나의 마음을 점검해 보았다. 그리고 노년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화리괘의 구삼효는 이 프로젝트의 명실상부한 가이드 효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중화리(重火離)는 한자 그대로, 두 개의 불이 중첩된 때와 상황을 보여준다. 그냥 불이 아니라 아주 큰불이 활활 타오르는 형상이다. 느므느므(너무너무) 크고 뜨거운 불. 리괘는 이 상황을 통해 불이 어디엔가 붙어 타는 것처럼 세상의 이치란 어떤 것이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붙어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지만 붙어서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영속되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크고 뜨거운 불일지라도, 반드시 타다가 잦아드는 시기가 온다. 그때가 하괘의 구삼효이다.

구삼효의 시간적 배경은 태양이 하루 동안 뜨겁게 빛나다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잠깐 쉬러 가는 일몰의 때이다. 그때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구삼효에서는 기운 해가 걸려 있는데 질그릇을 두드리고 노래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앞둔 늙은이가 슬퍼하는 것이니 흉하다(九三, 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고 한다. 즉, 일몰의 때에 할 것은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일몰과 곧 죽음을 앞둔 노인(大耋)의 시간성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낮과 밤,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동일한 시간성.

이에 대해 정이천은 이렇게 해석한다. 그의 해석을 풀이해보면, 한 사람이 죽고, 또 한 사람이 태어나는 것, 이것이 때의 변혁이다. 따라서 죽고 태어남이 일어나는 변혁의 때는 하루의 해가 기울어 가는 때와 같다. 해가 기울고 밤이 와야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성대하면 쇠락하고, 시작하면 반드시 끝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는 이 이치를 통달한 자는 이러한 이치에 순종하여 즐거워하게 된다고 한다.

주역이 알려주는 세상의 이치는 이렇게 간략하고 쉽다. 생에서 사로 넘어가는 일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 생사는 우리가 보내는 하루 24시간의 주야와 같다. 환하게 빛났던 낮을 기쁜 마음으로 보내고, 캄캄한 밤을 즐겁게 맞이할 수 있다면, 생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이치에도 다다를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이치를 통찰하게 되면 해가 기울 때나, 죽음 직전의 노인이 되어서나, 소박한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 구삼효가 의미하는 바다. 하지만,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참으로 흉한, 노인의 서글픔만 남는다고 구삼효는 일침을 놓는다. 이 상황까지도 깨닫는 것, 이것이 생사에 대처하는 인간의 자세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어떠한가. 낮보다 빛나는 불야성의 밤은 일몰의 시간을 앗아가 버렸고, 젊음을 유지하고픈 열망은 늙음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길을 막아 버렸다. 활활 타기만 하고 꺼지기를 거부하는 이 전도된 흐름에 동화되지 않았다고 나 자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떠한가? 이 흐름의 끝에는 ‘흉’이라는 최악의 상황, 불안하고 우울한 노년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삶은 빛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저 삶일 뿐. 삶이 빛나기를, 아름답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에 불과하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죽음일 뿐이다. 죽음 자체가 서글픈 것이 아니라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자연의 힘을 거스르려고 하는 인간의 무지가 서글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시대가 제공하는 노인의 삶을 수동적으로 따라갈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노인이 되어 삶과 죽음의 이치를 깨닫고 소박한 마음으로 그 즐거움을 노래하면 어떠할까? 이것이 중화리괘의 구삼효가 가르쳐 준 노년의 삶에 대한 지혜였다. <공로상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는 선생님들의 즐거운 노래가 아주 작은 기쁨으로라도 자신들의 삶에 주어지는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이렇게 노년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다. 그들과 함께 소박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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