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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잡다!]나는 나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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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09-22 09:42 조회1,4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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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모른다


안혜숙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이쯤해서 나의 애초 문제의식을 불러와야겠다. 누구나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과 무상함의 진리를 모르지 않는데 어째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가. 머릿속에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는다. 체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질문은 어떻게 몸으로 터득해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가였다.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는 부처님을 만나 그 길로 출가해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 체득했다는 이야기다. 이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한 부처님의 결정적 한마디는 이렇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게송113)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게송114)

설마 이 한 마디로 그렇게 쉽게?ㅎ 그들이 쉽게 깨우쳤는지 어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출가해 수행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나름 몸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을 터였다. 그것을 알고 하루를 사는 것이 그것을 모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낫다는 그 진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무엇이고, ‘불사의 진리’가 무엇인가? 그들은 어떻게 진리를 몸으로 터득했는가. 그러고 보니 문제는 몸이다. 그럼 불교에서는 몸에 대해 어떻게 통찰하고 있는가부터 생각해보자.

‘나, 나의 것’일수록 아프다

며칠 전 카톡에 후배의 부고가 왔다. 복막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게 삼 개월쯤 전이었다. 대충 삼십년 전쯤 될까. 아이들을 키우며 친목모임을 함께 했던 사이였다. 이후 간간이 통해서 소식은 듣고 있다가 이곳 연구실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론 거의 잊고 살았다. 그는 나보다 서너살 아래였다. 딸의 결혼날짜까지 잡아놨다고 했다.

처음 후배의 발병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고 가슴 아팠다. 그러나 평정심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곤 솔직히 바로 돌아서선 잊어버렸다. 코앞에 닥친 내 일들에 온통 정신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을 때 나 자신에게 화들짝 놀랐다. 어쩌면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동시에 나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 하는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몇 년간 연락도 하지 않던 내가 새삼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었다. 어쩌다 생각날 때마다 어서 좋아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러다 부고를 접하게 된 것이다.

법구경 인연담 속 주인공들은 어떤가. 가족을 모두 잃고 정신줄을 놓쳐버린 빠따짜라,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죽은 아이를 들쳐 업고 살려 달라 헤매고 다닌 끼싸고따미, 그리고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들의 일상은 그 순간 정지되었다. 그들은 이후 더 이상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가 없는 마음의 행로를 겪는다.

난 이들 주인공과 달리, 돌아서서 보통 때와 다름없이 내 할 일을 했다. 내가 부처님처럼 죽음의 문제에 담담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후배와 내가 애착으로 형성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착은 신체적인 것이다. 신체가 연결된 만큼의 강도와 애착의 정도는 같이 간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손녀… 당연히 그 중심에 ‘나’가 있다. 애착의 최종 심급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애착 아닌가.

“직계 가족은 나의 일부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와 자녀는 나의 뼈 가운데 뼈이며 살 가운데 살이다. 그들이 죽으면 나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가까운 친족은 나와 상당 부분 유전자를 공유하므로 친족을 돌보는 행위는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타당하다. 가족 간의 공감과 사랑이라는 유전자도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  

(『불교는 왜 진실인가』, 로버트 라이트, 261쪽, 재인용)

진화의 법칙은 단호하다. 생존하고 번식하라! 그러니 가장 소중한 건 ‘나’다. 그리고 나의 번식을 대신해 줄 ‘나의 것’에 속하는 직계가족이다. 가족에 대한 애착은 신체의 자동반응이라는 얘기다. 애착의 뿌리엔 이처럼 ‘나와 나의 것’의 지속을 바라는 본능이 작동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심이다. 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고 좋은 쾌의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탐심과 진심(성냄)은 동전의 양면이다. 애착의 강도가 큰 만큼 상실의 고통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고통은 싫은 걸 밀어내고 싶은 성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가족관계보다 더 애착적인 관계도 있지 않냐고? 당연하다. 그러나 애착으로 엮인 관계인 한 그 역시 다 ‘나와 나의 것’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불교는 이 모든 애착으로부터 벗어나길 요구한다. 몸에 장착하고 태어난 피할 수 없는 존재조건인데 말이다. 유전자의 명령에서 보면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린다. 생긴대로의 몸의 요구를 거부하라는 말 아닌가. 참 아이러니하지만, 이렇게 타고난 몸의 본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 불교가 전하는 메시지다.

자신을 모르는 무지한 존재

그렇다문제는 이 몸이다나는 곧 나의 몸’ 자체다이 몸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살아간다그런데 이 몸이 세상을 제멋대로 인식한다는 사실그러면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 문제다이런 인간의 인식의 오류에 대해 일찍이 스피노자와 니체도 매우 정교하고 신랄하게 지적했다헌데 이들보다 이천여 년도 넘는 훨씬 이전에 부처님은 깨달았다인간은 스스로 번뇌망상을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것을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감각기관이라는 협소한 인식조건에 갇히는 존재인지를 말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자신을 모르는 무지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타고난 업장(業障)이라면, 가장 고통스러운 업장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자기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것(안이비설신의)으로 대상과 만난다. 그리고 자기식대로 대상과 세상에 대해 나름의 인식을 구성한다. 여기까지는 잘못이 아니다. 애초 그렇게 태어났는데 어쩌라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진실이고 자신의 정체성이라 생각한다는 것. 말하자면 우리는 타고나기를 망상과 허구를 만들어내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라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뇌는 인간을 미망에 빠트리도록 처음부터’ 설계되었다.”(위의 책,14쪽) 또 “자연선택은 우리가 세상을 명료하게 보는 지각과 신념이 아니라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유리한 지각과 신념을 갖도록 마음을 설계했다”(51쪽)고.

내가 느끼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애초 세상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는 발견은 자신이란 존재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게 한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자신을 모르는 무지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타고난 업장(業障)이라면, 가장 고통스러운 업장임은 분명하다. 어둠 속 미망을 헤매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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