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으면서 ‘좋은 반응’에 집착하는 내 모습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인 한에서였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수없이 많이 자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기존에 알던 방식과는 굉장히 상이했다. 나는 그 상이함과 접속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보고, 더욱 더 열심히 이해하려 노력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틀에 『안티 오이디푸스』를 재단하려 했던 것이다.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어려웠던 건, 어느 누굴 만나도 ‘좋은 반응’을 갈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기대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무시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만나지 못했다는 좌절이 책읽기를 어렵게 했듯, 상대와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느낌들은 ‘좋은 반응’을 얻으려 애쓰는 조바심과,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에 묻혀버렸다. 만나려고 하면 할수록 ‘만남’에서는 멀어지는 이 역설!
이제는 이 거짓된 만남에 작별을 고할 때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내게 말했다. 네가 타자를 대하는 그 순간에 올라오는 느낌들이 곧 ‘만남’들이라고. 그 느낌들은 나 역시 타자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준다. 만남을 어려워하는 나에게서 실제로 ‘만나는’ 나로! 『안티 오이디푸스』를 이해하지 못해 부끄러워했던 나는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만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