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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안티 오이디푸스』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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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09-23 23:17 조회1,3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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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담 (읽생철학학교)

나는 다른 사람 앞에 서면 생각이 참 많아진다. 상대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는 탓이다. 특히 상대의 표정이 어둡기라도 하면 머리는 더 팽팽 돌아간다. 내가 뭘 실수했는지, 다른 말을 했어야 했는지, 어떻게 해야 상황이 좀 나아질지 등등. 이렇듯 넘치는 고민 홍수에 내 피가 마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상대에게 인정받을 때의 쾌감도 컸다. 내가 던진 농담 하나에 빵 터지거나, 나름 멋있는 행동을 해서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노라면… 솔직히 참 좋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상대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려고 안간힘을 썼고, 그것이 나에겐 곧 만남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남은 늘 어렵고 피곤했다.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의 쾌감은 잠시뿐이고, 대부분은 그러지 못해 안달복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에 『안티 오이디푸스』는 딱 맞는 책처럼 보였다. 사랑받으려는 자아, 이는 좋은 반응에 사로잡혀 있는 내 모습이 아닌가? 이 책이 자아에 대한 ‘안티’를 말하고 있는 만큼, 책과 만나면 나 역시 ‘좋은 반응을 얻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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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장장 15주의 수업이 다 지나가도록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발제를 써 가도 『안티 오이디푸스』를 만나지 못했다는 피드백을 듣기 일쑤요, 에세이도 완성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지금 쓰는 한 페이지짜리 글에도 애를 먹고 있다니! 나는 정말 『안티 오이디푸스』와 연이 없다고, 이젠 다 틀렸다고 생각했을 쯤에 책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욕망 그 자체로는 사랑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사랑하는 힘, 즉 증여하고 생산하고 기계 작동하는 덕(德)이다(왜냐하면 삶 속에 있는 것이 어떻게 또한 삶을 욕망할 수 있으랴? 누가 이것을 욕망이라 부르려 할까?).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p.553)

『안티 오이디푸스』는 말한다. 만남은 만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만나는’ 거라고. 그렇다면 나는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와 만나고 있다는 건가? 놀랍게도 그렇다. 물론 책은 이해되지 않지만, 이해되지 않는 글들 사이사이로 꽂히는 문장들이 있었다. 책에서 그 부분만 형광펜으로 칠한 듯 보이거나, 읽을 때 미묘하게 콧등을 간지럽히는 문장들이. 처음의 꽂힘, 그 이끌림은 책을 읽다가 정말 돌연히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그 문장이 내 문제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이처럼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것, 기대하지 않았던 것에서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여태까지 내가 만난다고 생각했던 건 대체 무엇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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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으면서 ‘좋은 반응’에 집착하는 내 모습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인 한에서였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수없이 많이 자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기존에 알던 방식과는 굉장히 상이했다. 나는 그 상이함과 접속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보고, 더욱 더 열심히 이해하려 노력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틀에 『안티 오이디푸스』를 재단하려 했던 것이다.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어려웠던 건, 어느 누굴 만나도 ‘좋은 반응’을 갈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기대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무시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만나지 못했다는 좌절이 책읽기를 어렵게 했듯, 상대와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느낌들은 ‘좋은 반응’을 얻으려 애쓰는 조바심과,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에 묻혀버렸다. 만나려고 하면 할수록 ‘만남’에서는 멀어지는 이 역설!

이제는 이 거짓된 만남에 작별을 고할 때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내게 말했다. 네가 타자를 대하는 그 순간에 올라오는 느낌들이 곧 ‘만남’들이라고. 그 느낌들은 나 역시 타자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준다. 만남을 어려워하는 나에게서 실제로 ‘만나는’ 나로! 『안티 오이디푸스』를 이해하지 못해 부끄러워했던 나는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만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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