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삼효는 엄군의 중요성을 가장 잘 드러낸 효이다. “집안사람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낸다. 엄격함을 후회하지만 길하다. 부인과 자식이 희희락락 하면, 끝내 수치스럽게 될 것이다.(九三 家人嗃嗃 悔厲吉 婦子嘻嘻 終吝) 학학(嗃嗃)은 원망하는 의성어로 엄군이 너무 엄격하게 해서 집안사람들이 원망이 자자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엄하게 하지 않으면 희희락락 하면서 제멋대로가 된다. 가정을 다스리지 못해 가인들이 제멋대로 하게 두기 보다는 집안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는 엄격함이 필수라는 것이다.
왜 엄해야 하는가. 공자님 주석에 따르면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워야“하기 때문이다. 언 듯 보면 역할을 고정 시켜 놓은 것 같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위치에 맞게 처신하는 게 핵심이다. 만약 아버지가 아버지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자식의 효도만을 바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고 보니 우리 시대에 어른이 돼도 어린이에 머물고 싶은 키덜트(kidult) 문화는 엄군의 실종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 딸 바보, 아들 바보로 불리는 부모는 엄군과는 거리가 멀다. 어릴 때 엄군의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에 나와서도 상황에 맞게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대우만 받으려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가도는 초장에 잡아야 하고 원성이 있더라도 기강을 세워야 한다. 말이 쉽지 생활이 밀착된 공간에서 ‘엄격함’의 적용은 쉽지가 않다. 잘 못을 지적했다가 상대기 고치기는커녕 감정이 상하면 거기에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 결국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입을 닫는다. 상대의 원망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엄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자님은 마지막 효 주석에서 힌트를 주신다. 위엄을 발휘하려면 “마땅히 먼저 자신의 몸에 엄격히 하라(威嚴不先行於己)”고.
그렇다. 내가 상대의 문제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것은 스스로에게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늬만 엄격하다고 먹히겠는가. 이렇듯 가도를 세우는 리더십은 바로 나의 수행에서 출발한다. 내가 많은 사람들과 결별한 것도 결국 나에게 엄격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다. 맹자가 “자신이 도를 행하지 않으면 처자에게서도 행하지 못하고, 사람을 부리는 데에 도로써 하지 않으면 처와 자식에게도 행할 수 없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공동체에서 선배로써 처신하려면 성찰의 과정을 통과해야 위엄이 발휘되는 거였다. 그래야 원망이 있을지라도 종국에는 기강이 잡힌다.
나에게 엄하셨던 부모님, 스승, 선배들이 생각난다. 많이 혼나고 섭섭했던 순간들. 그 분들이 나에게 개입할 수 있었던 힘은 ‘자신에게 엄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책임질 일이 많아지는 일이다. 나이에 맞게 잘 처신하려면 매 순간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이것이 공동체 즉, 집안이 잘 굴러가는 이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