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총 6회에 걸쳐 ‘금요일은 니체’ 에세이를 연재하기로 되어있다. 그런데 마지막 에세이를 앞두고 출산에 대한 걱정으로 글쓰기가 부담스러웠다. 마무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지금은 글쓰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충돌하면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근영샘에게 마지막 글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답문에는 정 힘들면 안 써도 되지만 ‘구미호의 99일’ 같다는 표현이 있었다. 순간 내 눈에는 ‘구미호’만 보였다. 고민 끝에 보낸 문자였는데 구미호가 되기는 싫어서 나는 다시 써보겠다고 말했다. 왠지 그 찝찝함이 출산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도 들었다.
이럴 때 보면 니체의 말처럼 행위는 ‘자아’나 ‘주체’가 아니라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글을 쓰기로 한 것을 단순한 변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의지, 감정 등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 무엇은 바로 ‘충동’이다. 충동은 쉽게 말하자면 성욕, 식욕, 수면욕처럼 ‘~하고자 하는 욕구, 기분, 감정’등이다. 우리는 충동 앞에서 속수무책이며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마치 충동이 ‘나’라는 신체를 숙주로 삼아 나를 자기 멋대로 이끌고 있는 것만 같다.
니체는 행위는 수많은 충동들의 경합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수많은 충동들이 굶주리고 있다가 경험이라는 음식물이 주어지면 가장 배고프거나 힘이 쌘 놈이 그것을 낚아채서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충동이 아닌 자아나 주체가 행위를 결정한다고 믿을까? 충동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인간이 충동 앞에서 수동적인 존재라면 행위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